아브라함의 복을 다시 생각하며
성경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복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익숙하게 들어 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 말씀은 많은 사람에게 오래도록 특별한 약속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실제로 ‘복’이라는 단어는 문화적으로도 매우 긍정적인 울림을 가진다. 잘되는 것, 형통하는 것, 성공하는 것, 평안해지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복을 원한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인생이 잘 풀리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한국인들이 새해 인사처럼 “복 많이 받으세요”를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복은 단순히 개인의 번영을 약속하는 문장으로만 읽히기에는 너무 크고 깊다.
이 언약은 결국 한 사람의 형통에서 끝나지 않는다.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말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복을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을 흘려보내는 존재로 부름받았음을 보여 준다. 신약의 빛 아래에서 보면 이 언약은 더욱 선명해진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열방에게 흘러가는 구원의 복으로 완성된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계보를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은 단순한 물질적 번성이나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죄와 죽음에서 건짐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영적 생명의 복으로 확장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가장 깊은 복은 언제나 영적인 복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경신학적 의미와 더불어 삶의 자리에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아브라함의 복은 단지 미래에 주어질 어떤 선물이나 눈에 보이는 보상의 약속이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곧, 복이란 내가 더 많이 손에 쥐는 상태이기 전에, 내 존재로 인해 다른 이들이 유익을 누리게 되는 상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라면, 그 복은 반드시 내 삶의 방향 속에서 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물질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으며 정신적 기민함일 수도 있고 영적 평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복된 존재의 내면에는 감사와 만족, 평화와 안정이 자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진짜 복은 먼저 마음의 상태에서 드러난다. 마음이 가난하고 메마르고 시기와 불안으로 가득한데, 겉으로만 많은 것을 소유했다고 해서 그것을 진정한 복이라 부를 수는 없다. 반대로 마음이 감사와 만족으로 채워지고,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누리며, 자신의 삶을 성실히 감당해 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복된 존재의 길 위에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복을 조금 더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끌어와 보자.
예를 들어 내가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하자. 질서 있는 것을 사랑하고, 게으름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으며, 가정에서 해야 할 일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분리수거를 하고, 택배를 정리하고, 다른 사람이 미처 손대지 못한 자질구레한 일들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와 함께 사는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편안함을 누리게 된다. 누군가의 성실함이 다른 이의 안식을 만든다. 누군가의 질서가 다른 이의 평안을 만든다. 그렇다면 바로 그 사람이 복된 존재이며, 동시에 복의 통로가 아니겠는가.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내 성품이 차분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겸손하고, 인내심이 있고, 용서와 친절이 몸에 밴 사람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특별한 말이 없어도 마음이 놓이고, 괜히 안심이 되며, 설명하기 어려운 평안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내 존재 때문에 마음의 짐이 덜어지고, 관계 속에서 숨을 돌리며, 정서적 안정을 얻게 된다. 이것 역시 복이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지만 분명한 복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인 동시에, 자기 존재로 복을 흘려보내는 사람이다.
물질의 문제도 다르지 않다.
만약 내가 물질적으로도 넉넉함을 누리게 되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 넉넉함이 단지 내 손안에 쌓여 있는 축적에서 멈추지 않고, 지혜롭게 사용되어 다른 이를 돕고, 나누고, 살리고, 위로하는 데 쓰인다면, 그때 그 물질은 비로소 복이 된다. 많이 가진 것이 곧 복이 아니라, 많이 가진 것을 통해 누군가가 삶의 숨통을 틀 수 있게 되는 상태가 복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재산이 많아도 주변을 마르게 하고, 어떤 사람은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주변을 풍성하게 한다. 진짜 복은 소유의 양보다, 존재의 방향과 사용의 방식에 달려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의 복이라는 말은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것은 “내가 복을 많이 받게 해 달라”는 기도 이전에, “내가 복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여야 한다. 나의 성품 때문에 다른 사람이 평안을 누리고, 나의 노동 때문에 공동체가 편안해지고, 나의 친절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이 위로를 얻고, 나의 인내 때문에 관계가 무너지지 않고, 나의 나눔 때문에 누군가가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면, 바로 그것이 복된 존재의 증거다. 이때 복은 더 이상 내 손에 쥐어진 무엇이 아니라, 내 존재를 통해 흘러나가는 어떤 힘이 된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복과 저주의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성실함 대신 게으름이 자리하고, 평화 대신 날카로움이 자리하고, 겸손 대신 교만이 자리하고, 친절 대신 거침과 냉소가 자리하며, 나눔 대신 집착과 움켜쥠이 자리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까지 메마르게 만든다. 그것은 복을 흘려보내는 삶이 아니라, 복을 막아 버리는 삶이다. 성경이 말하는 저주는 단지 신비한 불행의 주문이 아니라,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존재의 방향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복된 존재와 저주스러운 존재의 차이는 외형적 조건보다 삶의 방향성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복은 내게 하나의 존재 선언으로 들린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단지 “복을 줄 것이다”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셨다.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대단히 엄숙한 말이다. 하나님은 한 인간을 복의 소비자가 아니라 복의 근원지처럼 세우기를 원하신다. 물론 인간은 스스로 복의 원천일 수 없다. 참된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들린 한 사람은, 마치 샘이 물을 흘려보내듯, 자신이 받은 은혜를 주변으로 흘려보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아브라함의 복은 바로 그 통로 됨의 약속이다.
그래서 나는 이 언약을 읽을 때마다 결국 하나의 기도로 돌아가게 된다.
하나님, 나를 진정한 의미에서 복된 존재가 되게 해 주십시오.
내가 더 많이 가지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 내 존재로 인해 누군가가 평안을 얻게 해 달라는 기도가 더 본질적이다.
내가 높아지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살게 해 달라는 기도가 더 복되다.
내가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 내 삶이 조용히 누군가를 살리고 위로하는 삶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더 깊다.
나는 오늘도 그런 의미에서 복을 구한다.
영적으로 복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감사와 만족으로 살기를 원한다.
내 노동이 사랑이 되기를 원한다.
내 성품이 안식이 되기를 원한다.
내 물질이 생명이 되기를 원한다.
내 존재 때문에 누군가가 하나님을 더 선하게 느끼게 되기를 원한다.
아브라함의 복은 결국 그런 기도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복을 받는 사람을 넘어,
내가 복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
그 기도가 내 삶 전체를 관통할 때, 비로소 아브라함의 언약은 오래된 성경 문장이 아니라 오늘 내 삶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하나님, 나를 진정한 의미에서 복 받은 자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그 복이 내 안에 머무르지 않고,
나를 통해 흘러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