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착각, 그리고 멈춤의 신앙

by 신아르케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보며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과연 하나님이 내 삶에서 무엇을 하라고 인도하신 적이 있는가.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없을 리가 없다. 너무 많다. 다만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돌아보면 수많은 선택과 방향 속에서 어떤 흐름이 있었고, 어떤 길은 막히고 어떤 길은 열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에야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 순간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지나간 뒤에야 해석한다.
그때는 확신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단지 나의 생각이었는지,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는지 다시 묻게 된다.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믿음이 부족해서 멈추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나는 용기가 부족한 것을 잘 견디지 못한다. 마음에 어떤 확신이 들면, 오래 붙잡고 고민하기보다 말하고 행동하는 편이다. 결단하고 움직이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된다.
내가 가진 이 강점이, 동시에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확신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나는 신앙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이, 확신이 강한 상태가 아니라 그 확신조차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이성과 양심도 주셨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과 결과가 따른다.
자유는 축복이지만, 동시에 무거운 짐이다. 선택하는 순간,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필요한 훈련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더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특히 나처럼 결단과 실행을 중요하게 여겨 온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나는 한 가지 생각 실험을 해 본다.
어느 날, 건강을 위해 가정의 식단을 바꿔야 한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고 하자. 그것이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뜻처럼 느껴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서 나는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가족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배달 음식은 금지하고, 식단은 모두 건강식으로 바꾼다고.

이 결정은 틀렸는가?
아니다. 충분히 옳은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내와 자녀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들에게 그것은 계시가 아니라, 강요일 수 있다.
신앙이 아니라, 부담일 수 있다.
심지어 “신앙은 왜 이렇게 독단적인가”라는 반감을 낳을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된다.

내가 옳은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옳음을 드러내고 있는가이다.

좋은 뜻도, 사랑 없이 밀어붙이면 상처가 된다.
정의로운 생각도, 관계를 무시하면 폭력이 된다.

나는 점점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단순히 내 머릿속에서 완성되는 명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검증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그 진리를 적용하는 방식은 반드시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확신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이 더 옳을 수 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밀어붙이기보다,
상대의 마음을 살피고, 상황을 고려하고,
내 뜻을 조율하는 것이 더 하나님께 가까운 선택일 수 있다.

이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확신을 꺾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생각해 보면, 이런 선택이야말로 더 깊은 신앙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믿음을 이렇게 생각한다.

강하게 결단하는 것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

두려움 없이 나아가는 것


물론 이것도 믿음의 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다른 모습도 있다.

멈추는 믿음

기다리는 믿음

맞추어 주는 믿음

손해를 감수하는 믿음


어쩌면 이것이 더 어려운 믿음일지도 모른다.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는 길이 있을 때,
그 길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
그리고 때로는 그 길을 내려놓고, 관계를 선택하는 것.

이것이 더 깊은 순종일 수 있다.

나는 점점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무언가를 이루는 신앙보다,
내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도 관계를 지키는 신앙이 더 클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앞에 나서서 결정하는 신앙보다,
뒤에서 맞추어 주고 조율하는 신앙이 더 성숙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빛나는 자리에 서는 것보다,
무명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하나님을 드러내는 길이 아닐까.

우리는 흔히 업적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은 양보와 희생을 통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나는 다시 다윗의 고백으로 돌아온다.

그는 말한다.
자신이 완전하다고.
자신이 깨끗하다고.

그러나 그 완전함은 흠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이다.

나 역시 완전할 수 없다.
내 선택이 언제나 옳을 수 없다.
내 확신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일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붙들 수 있다.

내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나는 여전히 그 길 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기도하려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말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지 않게 해 달라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뿐 아니라,
멈출 수 있는 지혜도 달라고.

내 생각을 밀어붙이는 힘보다,
내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을 달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 선택이 하나님을 드러내기보다
나를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돌아보게 해 달라고.

어쩌면 신앙의 완성은
무엇을 더 이루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더 내려놓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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