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받고 싶은 마음, 그 안의 외침
어느 조직이든, 인간이 모여 사회적 집단을 이루는 곳에는 유독 ‘빌런’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한 명쯤 존재한다. 그는 공동체를 불편하게 만들고, 말과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인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신이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이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인생은 무대이며 우리는 모두 배우"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이 ‘악역’ 임을 모른 채 충실히 연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이런 사람들은 존재할까? 나는 이 현상에 대해 심리적으로 접근해 본다.
첫째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가 태어났을 때, 첫째는 본능적으로 둘째를 경계하고 질투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엄마의 관심이 이전처럼 오롯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가 좀 더 들면, 엄마가 바쁘거나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느낄 때, 아이는 사고를 치며 주목을 받으려 한다. 그 혼란스러운 행동의 본질은 사랑받고 싶다는 갈망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괜히 고무줄을 끊으며 놀려댔던 기억이 있다. 표현하는 법을 몰랐고, 내 마음이 드러날까 부끄러웠던 것이다. 결국 그 모든 장난은 관심을 끌기 위한 행위였다.
이러한 감정은 성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어릴 때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한 이들은 그 결핍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 학대받거나 무시당하며 자라난 사람은 자기 존재가 존중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그 상처는 인격의 밑바탕에 남아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갈망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욕망은 때로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된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차이는 표현 방식에 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자기 계발로, 인간관계로 긍정적으로 승화시킨다. 반대로, 자기 가치를 의심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공동체를 불편하게 하는 방식으로 관심을 끌려한다. 어딘가 어긋나 있고 불편하지만, 그 사람 역시 관심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이런 이들이 공동체에 던지는 파장은 결코 작지 않다. 평소에 떠올리지도 않던 그 사람이, 나의 마음을 뒤흔드는 존재가 되어 하루 종일 감정을 쓰게 만들고, 내 안의 공간과 시간을 차지한다.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만, 역설적으로 내 우주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그의 전략은 결과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이러한 통찰 끝에 도달하는 결론은 분명하다. 우리가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은 사실, 사랑받지 못한 채 살아온 사람들일 수 있다. 그래서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행동으로 "나를 봐달라"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미워하기보다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표현하는 그를, 신이 사랑하는 존재로 바라보며 긍휼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존재의 결핍에서 오는 그 사람의 절규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우리는 단지 갈등을 넘어서, 더 깊은 이해와 사랑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