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인과와 수용의 철학

by 신아르케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이 말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존재의 진실을 꿰뚫는 깊은 통찰이다.

삶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 앞에서, 우리는 종종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이 물음은 때때로 더 깊은 고통을 부를 뿐이다.


나는 이 말을 하나의 삶의 만트라처럼 되뇐다. 불교에서 ‘만트라’가 수행자의 마음을 정화하는 주문이듯, 이 말은 고통 앞에서 흔들리는 내 마음을 다스린다. 저항이나 억울함 대신,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그것이 진정한 수용이자 지혜이다.


삶은 인과의 그물망 속에 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의 연결 위에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신과 같은 초월적 이성을 가지지 않았기에 그 고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억울함, 불만, 원망이 생긴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가장이 직장에서 받은 분노를 집에 와서 가족에게 푼다. 그 아이는 동네 개를 발로 차고, 개는 지나가던 행인을 문다. 그런데 그 행인이 바로 그 가장이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우화 같지만, 삶의 복잡한 인과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뿌린 대로 거두게 되어 있다는 말은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존재의 법칙이다.


성경은 이를 더 깊이 있게 통찰한다. 출애굽기 34장 7절은 “죄악을 삼사 대까지 갚는다”라고 말한다. 이는 신의 무자비함이 아니다. 죄의 결과가 자손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인과의 법칙을 설명한 것이다.


한 사람이 비윤리적으로 부와 권력을 얻었을 때, 그 대가를 자손이 치르게 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은 자라나는 가정환경에 깊이 영향을 받는다. 부모의 언행, 가치관, 삶의 태도는 거울처럼 자녀에게 반영된다. 이른바 거울 신경 모방 이론은 이를 뒷받침한다. 결국 부정한 방식으로 세운 부와 권력은 대물림되는 축복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짐과 저주의 씨앗일 수 있다.


최근 대기업 2·3세들의 갑질이나 윤리적 무감각은 우연이 아니다. 당대의 죄가 세대를 넘어 자연스럽게 재현되는 과정이다. 죄는 흘러가고, 쌓이고, 되돌아온다.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의 법칙이며, 신의 초월적 정의에 따른 삶의 질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일어난 일을 단지 불행으로 단정 지어선 안 된다. 고대 중국의 ‘새옹지마(塞翁之馬)’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불행인 줄 알았던 일이 결과적으로 축복이 되었듯, 인생의 결과는 단기적으로 알 수 없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말했다.


“인간이 불행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섭리가 위장한 축복이다.”


성경 로마서 8장 28절도 이를 강하게 뒷받침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기에 참된 신앙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섣부른 판단을 유보할 줄 아는 자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있다.”는 그 단순한 진실 안에는, 인생을 평안히 살아가는 법과 신의 섭리를 신뢰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는 일도 결국은 더 높은 차원의 질서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판단은 미루고, 고통은 수용하고, 그 안에서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


그것이 곧 신의 뜻을 믿는 자의 자세이며,

인생을 자유롭고 단단하게 살아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