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음을 동시에 가질 수 없는 인간

by 신아르케

웃으면서 우는 것은 가능할까? 슬퍼하면서 동시에 행복할 수 있을까? 뜨거우면서도 차가울 수 없는 자연의 이치처럼, 인간도 한 순간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품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예외적인 복합 감정의 상태는 존재할 수 있다. 예컨대, 부모를 잃고도 무대 위에서 웃음을 전해야 하는 개그맨의 상황처럼. 그러나 이는 드라이아이스처럼 차가움이 피부에 닿으면 뜨거움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본질적으로 감정 간 충돌이 일어나는 특수한 예일뿐이다.

우리는 종종 멀티태스킹을 하듯, 여러 생각과 감정을 오가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역시 순차적 교대이지, 두 가지 마음을 동시간에 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의식은 하나의 연속된 흐름으로 작동하며, 이는 칸트가 말한 ‘선험적 인식능력’으로써 통합적인 사고를 가능케 한다.

인지과학적으로 감정과 이성은 뇌의 다른 영역에서 작동한다. 감정은 변연계—해마, 편도체가 담당하고, 이성적 사고는 전두엽에서 발생한다. 이 두 시스템은 한정된 에너지 자원을 놓고 끊임없이 경쟁한다. 감정이 격해지면 사고력은 떨어지고, 사고가 깊어지면 감정의 파동은 잦아든다.

더 나아가 생리학적 측면에서도 두 가지 감정 상태는 공존할 수 없다. 분노는 교감신경을 자극해 심박수, 호흡, 근육 긴장, 아드레날린 분비를 유도하고, 웃음은 부교감신경을 통해 이완, 안정, 도파민 분비를 촉진한다. 이처럼 서로 상반된 자율신경계의 반응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생리적으로 충돌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감정이 격해질 때 우리는 멈추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고력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곧 이성의 복귀이며, 실존적 선택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내 마음속에 큰 충돌이 일어나던 상황에서 이런 생리적·인지적 통찰을 얻었다. 한동안 괴로웠던 인물이나 사건이 시간이 지나고 나자 희미해지고, 전혀 다른 고민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고통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대상이 바뀐 것이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인간에게는 ‘감당해야 할 일정량의 고통’이 존재하는 것일까? 신체 컨디션이 나쁠 때, 우리의 좌뇌는 이유를 만들고 해석하려 든다. 이 과정에서 특정 인물이나 사건이 그 이유의 대상으로 ‘지목’될 뿐, 그것이 본질은 아닐 수 있다.

건강할 때는 웃고 넘길 일들이, 피곤하고 허약할 때는 예민하게 다가오고 짜증이 되어버린다. 이는 우리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준다. 좋은 성품과 온유함은 강한 체력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실제로 온화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유전적으로 신체적 건강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

반대로 예민하고 쉽게 분노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체력이 약하거나 면역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좋은 인성’ 역시 타고나는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놀라운 통찰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감정의 물결에 휩쓸리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이성적 선택이 가능한 실존적 존재이다. 감정은 대체 가능하다. 분노의 대상은 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지금 내가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진정한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러한 인식이 주는 자유는 엄청나다. 그것은 곧 나의 감정을 전환할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분노가 치밀 때, 나는 유머 영상을 보거나, 조용한 산책을 하거나, 지금처럼 이성의 영역에서 글을 써 내려간다. 그것은 내 감정을 바꾸기 위한 주체적 행위이며, 실존의 선택이다.

우리는 동시에 두 가지 감정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내 마음을 채울지, 그 결정은 나의 몫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감정과 이성, 생리와 의식을 아우르는 가장 인간다운 선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