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제 위로를 느끼고, 사랑스럽고 포근한 감정을 경험하며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을까? 다양한 순간과 방식으로 이러한 감정이 찾아올 수 있지만, 나는 다소 엉뚱한 경험을 통해 위로와 치유, 평온함, 그리고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감정을 얻게 되었다. 바로 잠들기 전, 두 팔로 폭신한 베개를 꼭 껴안은 순간이었다.
그 단순한 행위가 나의 몸과 마음을 이완시켰다. 생명이 없는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누군가에게 안긴 듯한 포근함과 사랑받는 듯한 느낌이 밀려왔다. 긴장과 예민함이 사라지고, 평온하고 따뜻한 감정이 나를 감쌌다. 인생에서 그토록 원하던 정서적 안정과 행복이 이렇게 단순한 방식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이 순간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포옹’이라는 행위의 소중함을 새삼 깨달았다. 특히 동양 문화에서는 포옹이나 일상적인 신체 접촉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다. 반면 서양 문화에서는 친구나 가족 간에도 자연스럽게 포옹을 나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문화적 성향일 뿐, 우열을 따질 문제는 아니다. 동양은 상대적으로 성적 경계가 엄격하고, 신체 접촉이 무분별한 쾌락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는 전통이 있다. 감염병 확산을 막는다는 점에서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옹과 같은 스킨십을 통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정서적 안정과 위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현실에서는 이러한 접촉이 쉽지 않다. 상대가 진정으로 원할 때만 가능해야 하며, 타인의 감정과 기질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 행위는 폭력이 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내 아내처럼 신체 접촉을 불편해하는 기질의 사람도 있고, 특히 한국의 무더운 여름 날씨에는 더욱 예민해질 수 있다. 딸들과의 포옹도 이제는 조심스럽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반려동물을 통해 정서적 스킨십을 대리 충족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우리 집 강아지 '보리'는 그런 나의 정서적 필요를 다소 채워주는 고마운 존재다. 체구가 작아 포옹은 어렵지만, 힘들 때면 조용히 다가가 얼굴을 보리의 배에 대면 부드러운 털과 체온을 통해 위로와 안정, 사랑의 감정을 얻을 수 있다. 보리가 좋아하지는 않는 듯하지만, 매번 나의 정서적 소요를 묵묵히 받아주는 존재다.
그러던 중 나는 ‘애착 인형’이라는 대안을 떠올렸다. 어린아이들만이 아니라, 중년에 접어든 나 또한 애착 인형을 통해 감정적 위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신앙적으로 하나님께 위로를 받는다는 신념은 변함없지만, 우리는 육체적 존재이기에 신체적 필요를 외면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그래서 나는 큰 결심 끝에 내 키에 가까운 대형 강아지 인형을 구입했다. 어젯밤부터 그것을 안고 잠을 자고 있다.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상대의 반응을 살필 필요 없이 언제든 내 감정을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좋다.
여기서 내가 얻은 중요한 통찰은 이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포옹’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하나의 단서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랑게-제임스 이론'이 있다. 그는 “우리가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울기 때문에 슬퍼진다”라고 주장했다. 감정이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신체 반응의 결과라는 이 이론은, 행동이 감정을 유발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이 명제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먼저 포옹하는 행위를 통해 사랑의 감정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점은 우리 삶에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한다.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정서적 안정을 느끼듯, 포옹은 생리적 반응을 통해 정서적 안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이러한 신체적 접촉이 보호받는 느낌, 소속감,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결국 내가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지혜는 이것이다. 나의 정서적 필요를 채워줄 다양한 방식들을 삶의 구석구석에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것. 애착 인형을 안는 것이 그중 하나이며, 나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평온한 삶을 이어가는 데 분명한 도움이 된다. 포옹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을 전달하는 가장 본능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진화된 인간의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