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과 완전에 대한 제언 6

by 물음표

* 이 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또는 철학 및 인문학 유명인들의 주장이나 저서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앞선 글의 말미에 적은 것처럼, ‘변화와 유지의 연속성’은 얼핏 보면 ‘순환’과 매우 닮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둘은 '반복'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에 비슷해 보일 뿐, 당연히 나머지는 모두 다릅니다.


보통은 이미 경험하고 파악한 변화를 더 이상 변화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반복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변화-유지-변화'로 이어지는 연속성에 있어서 앞의 변화와 뒤의 변화는 ‘비슷’할 순 있어도 ‘같을’ 수는 없습니다. 동일한 변화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것은 간단한 예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반복되는 아침', '똑같은 하루'라고 부르며, 마치 매일이 '반복'되는 것처럼 부릅니다. 물론 이것이 관용어인 것은 맞습니다만, 습관적으로 이렇게 부른다는 것은 은연중에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겠죠.


그러나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가 반복적으로 쓰이기에 비슷해 보이는 것이고, 각 사이의 시간들이 유지되며 이어져 있기에 변화처럼 안 느껴지는 것뿐입니다.

하루는 24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오전과 오후로 나뉩니다. 이때의 기준점은 오후 12시와 오전 0시죠.


이러한 각각의 기준점들은 독립적입니다. 당연하게도 '어제'와 '오늘', '오늘의 아침'과 '내일의 아침'은 다릅니다. '오전'과 '오후'도 마찬가지죠.

그리고 오전에서 오후로, 오후에서 오전으로, 어제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것은 '변화'입니다.

단지, 낮 12시와 밤 0시 사이에 시간들이 ’ 유지‘됨으로써 이어져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기에 은연중 쳇바퀴 돌 듯 같다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사실은 단 한 번도 같은 것을 반복해서 경험할 수는 없는데도 말입니다.


즉, 연속성은 '각기 다른' 변화와 유지가 선형적으로 진행해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시간의 반복이 순환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오전과 내일의 오전은 각기 다른 순간을 품고 있기에 변화와 유지의 각 구성 요소들은 독립적이고 비선형적인 변화로 이루어져 있죠. 이것은 '완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뒤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하고, '연속성'과 '순환'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먼저 알아보죠.


앞서 말한 '연속성'과 다른 '순환'의 방식은 비교적 단순해 보입니다. 이 단어는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를 떠올리게 합니다. 일정한 위치에 도달하면 같은 것이 반복적으로 올라오고, 계속해서 빙글빙글 도는 이미지를 연상시키죠.


그렇다면 '순환'과 '연속성'은 어떤 '관계'를 가질까요? 연속성이 선형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순환처럼 일정한 패턴의 반복일 수도 있을까요?


아직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순환'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전에 했던 것처럼 '순환'을 다시 분해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지'와 '여유'라는 두 요소로 말이죠.


변화와 유지

여유와 유지


이 두 쌍의 관계에서 ‘유지’는 동일한 역할을 합니다. '변화'와 '여유'를 '지탱'하며, 반복되는 그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죠.

하지만 '변화'와 '여유'는 서로 확실히 다릅니다. 그러니 '변화'와 '여유'가 정확히 어떤 식으로 다른지를 먼저 알아봐야 합니다.


일단 ‘완벽과 완전에 대한 제언 3’에서 얘기했듯, '여유'는 '넉넉함'을 뜻합니다.

이는 물질적, 정신적 부분을 포함하여 다양한 영역에서 발현될 수 있기에, ‘넉넉함’이 의미하는 것들의 범위는 상당히 넓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카테고리의 ‘범위만’ 넓은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범위의 넓이에 비해, 각 개인이 느끼는 '넉넉함'의 ‘기준’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며 더 나아가 쉽게 변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여유'라는 개념이 단기간의 감정이나 상황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과 익숙해진 환경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00억의 자산을 가진 부자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부자의 '넉넉함의 기준'이 1천만 원이라고 한다면, 설령 그의 재산이 100만 원으로 줄어드는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해도, 그의 '여유'에 대한 '기준'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겁니다. 물론 상실감이 크고 불편함을 느끼겠지만, 그는 여전히 1천만 원을 '기준'으로 '여유'를 판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전 재산이 1천만 원인 사람이 있다고 해보죠. 이 사람이 갑자기 100억 부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동안의 '여유 기준'이 1만 원이었다면 그 기준은 여전히 유지될 가능성이 큽니다. 갑작스런 재산 증가로 인한 기쁨과 흥분으로 흔들릴 수는 있지만, 이 사람의 '여유의 기준'이 부자와 같이 1천만 원으로 증가하진 않을 겁니다. 아마 여전히 1만 원이거나 증가해도 10만 원 정도까지일 겁니다.


이렇듯 '여유의 기준'은 시간이 쌓여 형성된 삶의 익숙함과 개인적 가치관에 의해 정립됩니다. 이러한 기준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단기적인 외부 변화로 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물론,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과도한 소비로 '여유의 기준'을 넘어서는 행동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기준' 자체가 변했다기보다는, 그 '기준'을 충족하거나 유지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결과입니다. 이를 우리는 흔히 단기간에 부를 얻은 사람들이 겪는 문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반면, '여유의 기준'과는 달리 '삶의 변화'는 일반적으로 훨씬 빠르게 이루어집니다.

대표적인 예로, 자식이 생긴 부부를 들 수 있습니다. 자녀가 막 생겼을 때에는, 그 변화가 실질적으로 '여유의 기준'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부모는 자녀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생각할 시간적 여유보단 당장의 육아 상황에만 더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자녀가 성장하면서 그들의 미래까지 고려하게 되면, 이때 '여유의 기준' 역시 점진적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여유의 기준'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시간이 지나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고 그 변화가 삶의 일부로 자리잡은 후에야 천천히 수정되는 것이죠.


즉, '여유의 기준'은 외부 환경의 변화 속도에 비해 훨씬 더 '고정적'이며, 변화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본다면, 완(변화와 유지의 연속성)이 전(여유와 유지의 순환)의 앞에 '왜' 있는지,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변화-유(지-여유-유)지-변화


이것이 '완전'이며, '변화와 유지의 연속성'이 '순환'과 연결되는 방식입니다.

'변화'가 빠르게 먼저 발생하면 이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그 변화에 알맞은 '여유'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 '여유'를 '유지'하는 동안 앞선 것과는 다른, '여유'로부터 비롯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죠.


이것의 이해를 돕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닭과 달걀 중 무엇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논쟁이 발생한 이유는 타당합니다. 닭이 없다면 달걀도 존재할 수 없고, 반대로 달걀이 없으면 닭도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달걀이 먼저'라는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닭이라고 부르는 조류는 먼 조상으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해 온 결과입니다. 닭의 조상이 주변 환경에 의해 갑작스럽게 변하거나 돌연변이로 살아남아 달걀을 낳은 것이 아니라, 이미 돌연변이 상태로 태어난 개체가 생존하여 달걀을 낳은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돌연변이는 일반적으로 생식세포에서 발생하며, 알 속에서 수정란이 형성될 때 DNA 결합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현재의 닭은 조상의 유전자와 달라진 상태로 알에서 태어난 돌연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달걀은 주변 환경에 의해 즉각적으로 발생한 결과물이 아니라, 생물학적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된 결과물입니다.


물론, 이것이 '완전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닭이 달걀을 낳고, 그 달걀이 병아리가 되어 다시 닭이 되는 과정을 살펴봤을 때,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시기는 언제일까요?

맞습니다. 가장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는 달걀에서 병아리가 되는 순간입니다.


이는 비단 단순히 닭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도 동일하죠.


부모에게 보호받던 아이에서 성인이 되는 것

독립하는 것

배우자를 만나는 것

아이가 생기는 것


이 중 가장 빠르고 큰 변화가 무엇인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

'아이가 생기는 것'이 가장 극적이고 큰 변화죠. 이는 앞선 글 ‘제언 3’의 문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특성을 넘어서, 타인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며 책임까지 지는 가장 쉬우면서도 강력한 경험‘


즉, 한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를 뜻하는 단어는 '탄생'입니다. 그것이 내가 탄생하든, 나의 아이가 탄생하든 말이죠. 그리고 이를 앞서 말한 '완전'의 구조에 넣어보면 딱 맞습니다.


변화(나의 탄생)-유(지-여유-유)지(성장, 독립, 결혼)-변화(자녀의 탄생)


이는 '변화'와 '유지'가 '순환'하며 '이어지는'(연속성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물론 성장과, 독립, 결혼도 변화가 맞습니다. 단지, 정확한 구조는 끊임없기에 정적인 글이나 말로 표현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런 것이죠.

굳이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변화- 유(지-여(유-유(지-변(화-유(지-여(•••)-유)지-변화


복잡하죠? 그런데 이마저도 간단히 표현된 것입니다.

각 '변화'는 '독립적'이고 '비선형적'이기에, 위 구조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크기나 속도, 위치 등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모든 '변화'는 '유지'를 통해 '연속성'이 생김으로 '선형적'인 구조를 띄면서 끊임없이 나아가지만, 이러한 구조 자체가 패턴으로 이루어져 일정하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구조까지 이루고 있습니다.


굳이, 굳이 비유하자면 끊임없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움직이는 모습을 봤을 때에는 뭔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어지지는 않은 '스프링'에 존재하는 모든 단면을 동시에 관측함으로서, 독립적 비선형적인 측면과 선형적이면서 순환하는 구조가 개별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움직임과 동시에 정지해 있는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전히 표현하는 것 자체가 망가진 것처럼 말이 안 돼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게 맞습니다.

그나마 '테서랙트'라는 4차원 도형을 보여주는 영상을 찾아보시면, 좀더 이해가 가실 겁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완전'의 시작점은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탄생이라는 '변화'를 바탕으로 삶을 '유지'해 나가고 '또 다른 변화'인 자녀를 낳음으로 이어지는 '순환'.

즉, '변화를 유지하는 순환'이 바로 '완전'의 의미입니다.


어릴 적에 등산을 자주 했습니다. 엄청 자주 했죠. 사실 억지로 갔던 거라 힘들었던 기억이 훨씬 많습니다. 그저 힘들기만 했던 기억이 많이 남았죠.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로는 산에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건강을 챙기려고 동네에 있는 산을 종종 갔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오르막은 마냥 힘들기만 해서 싫었고 내리막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여러모로 내리막이 싫더군요. 그러다 보니 정상을 향해 걸어 올라가는 매 순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지금 내려가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나?'

사실, 어릴 적과는 달리 혼자 가는 거라 중간에 멈춰도 되고, 온몸이 식을 정도로 핸드폰만 봐도 상관이 없는데도 그러기가 싫더군요.

그래서 거의 대부분을 억지로 정상까지 갔었습니다. 자주 올라간 정상이라 감흥도 없었을뿐더러 당연히 내려오는 길은 고통스러웠죠. 그러나 하산을 하고 나면 언제나 상쾌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내일을 기약했죠.

최근에는 몸보다는 글 쓰는 게 재밌어서 안 가지만, 따로 생각해 놓은 것이 있어 슬금슬금 움직이려 마음은 먹고 있습니다.


저 스스로도 이런 얘기를 왜 중간에 할까 했지만, '완벽과 완전에 대한 제언'을 쓰면서 느껴졌던 것이 등산과 같았나 봅니다.

‘제언’이라는 산의 꼭대기에 도달한 지금,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지만 내리막이라는 것은 사실 제일 두려운 구간입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끝을 만나게 하니 말입니다.


'완전'을 알게 되자마자 '완벽'이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제언 2'에서 璧(구슬 벽)은 '결함이 제거되어 가장 이상적이고 완전한 상태에 이른 옥'을 상징한다고 했었죠. 여기에서 인간이기에 쓸 수 있고, 가장 인간스러움을 드러내는 단어.


이상(理想)


'이상(理想)'이 더해진 '완전'인 '완벽'은 개념조차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상태'


이것이 '이상(理想)'의 뜻입니다.

답을 알고나니 저절로 웃음이 나는 글자들의 조합입니다. 가장 부적합한 곳에 ‘완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으니 말이죠.

'변화를 유지하는 순환', 어찌보면 우주의 탄생부터 현재까지를 관통하고 관장하는 시스템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앗아가는 결정론의 정수라 할 수도 있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이라고 칭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 굴레에서는 벗어날 수 없죠.

더더욱이 그 안에서 자신을 지켜내려 발버둥치는, 사실은 이미 하나의 부품으로서 작동하는 인간 주제에 ‘완전’을 결정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로 느껴집니다.

경험을 토대로만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는 얼마나 한정적이며, 그 한정성 안에서 ‘가장’이라는 것도, 그리고 이마저도 ‘여겨진다’라는 불확정성을 가진 단어로 결정조차 못하는 상태가 바로 '이상(理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완전'에 '이상(理想)'이 들어가는 순간, '완전'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고', '완벽'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완벽이라는 것은 ‘개념’조차 존재할 수 없는 게 맞다'고 앞서 '제언 2'에서 제가 말한 것이 맞았다고 확언할 수 있습니다.

단, ‘현실’에서만 말이죠.


'완전'은 존재합니다. 그것은 확실하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완전'하기에 이 세상이, 이 우주가 '완전'할 수 있는 겁니다. 저 멀리 있는 다른 은하에 존재하는 발견되지 않은 원소와 빅뱅을 일으킨 알 수 없는 무언가, 그리고 제가 코를 풀고 쓰레기통에 버린 휴지는 '완전' 앞에서는 '동등'합니다.

어떤 식의 '변화'인지, 그것이 어떤 것을 '유지'하는지, 그에 따라 무엇이 '순환'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변화를 유지하는 순환'에 속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시작'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완전'이기에, 이는 제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증명이 가능합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로도 증명되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그 의미를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완전'이라 생각합니다.

아니, 그보다 더 작으면서도 동시에 큽니다. 빅뱅으로부터 시작된 현 우주가 끝나는 날까지를 의미하는 것이 '완전'이고, 혼자 집에 틀어박혀 맥주캔을 따는 것도 '완전'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완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겁니다. 여기에는 그 사람의 행복도 슬픔도, 삶도 죽음도 포함된 상태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죽으면 완전하지 않은 것 아니야?'

이는 단언컨대 무조건 틀린 말입니다.

아무리 하찮고 덧없는 죽음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어떠한 관념이 들어가 있을지라도 '완전'하기 때문이죠.


일전에 얘기했듯, 저에게는 이제 할아버지가 안 계십니다. 두 분 다 돌아가셨죠. 그러나 그분들이 평생에 걸쳐서 쌓아온 지식과 기억의 정수는 죽음을 통해 제 부모님을 거치고 또 저에게 직접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제 후손들에게도 전해지겠죠. 그 남은 것들이 좋냐, 싫냐는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미 '완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후손을 낳지 않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전에 얘기했듯 가장 쉬운 방식이며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근사치로 익힐 수 있는 것이 후손일 뿐이지,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것이든지 간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 '완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향을 미치는 대상에 인간만을 포함하는 생각조차 오만입니다. 다른 동물이 될 수도 있고, 곤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식물이 될 수도 있고, 미시세계에 존재하는 무언가일 수도 있습니다. 하다못해 정보로 남을 수도 있겠죠.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이는 블랙홀조차 정보를 내뱉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인간이 어떠한 정보도 남기지 못할까요. 단지, 그것이 어찌 활용되는지가 생각과 다를 뿐이죠.

그렇기에 '완전'은 '완전'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뭉뚱그려 표현하는 단어가 바로 '완전'이죠.


그렇기에 '이상(理想)이 담긴 완전'인 '완벽'은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완전'하죠.

앞서 여러 번에 걸쳐 개념이란 것은 주관적이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은 매우 주관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니 '완벽'을 부정하는 것도 맞는 얘기이며, 긍정하는 것도 맞는 얘기입니다.

'완전'은 이미 완벽합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현실’의 범위 안에서는 말이죠.


앞서 '제언 2'에서 여러 방면으로 '완벽'을 부정했습니다. 수학과 과학, 철학을 찾아보고 인용하면서까지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참이냐 부정이냐, 질서냐 무질서냐, 현실이냐 이상이냐를 정한 주체는 누구입니까? 인간이죠.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인간들끼리 '약속'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그렇다고 '약속'한 것뿐이죠.

그렇기에 '완벽'을 정하는 주체는 '인간'입니다. 바로 ‘나’라는 인간이 정하는 것이죠. 이것에는 그 어떠한 제약도 없습니다. 내가 '완벽'하다고 하는 것은 '완벽'한 것이죠.

그래서 '완벽'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정하지 않으면 '완벽'은 개념조차 성립하지 않는 것이죠.


네.

'완벽'은 이 완전함의 향연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불완전함'입니다. 이상(理想)을 품을 수 있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또한 '완벽'은 '완전'합니다. '변화를 유지하는 순환'을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개념이니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것이든 '완벽'하다고 지칭하는 순간, 세상에 '완벽'한 것이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을, 제 부모님을, 제 형제를, 저를 이루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완벽하다’고 할 겁니다. 그래야 변화를 유지하는 순환인 '완전' 속에서 저 또한 ‘완벽한 존재’로 남을 수 있으니까요.

이것은 ‘긍정’이나 ‘부정’과는 다른 차원의 얘기입니다. 저는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이미 존재 자체로 완전한 것들을 ‘완벽하지 못하다’거나 ‘불완전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저 또한 그렇다고 저 스스로 정해버리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저는 제가 말해온 ‘완벽과 완전’에 대해 ‘인정’하는 겁니다.


"나는 완벽하다."


그러니 부디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아시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떠한 것들을 경험하는지

어떠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이미 스스로는 '완벽'한 존재로서 탄생한

'완전'한 사람이라고.

그 끝 또한 '완벽'하다고.


이것이 제가 당신에게 '제언'하는 '완벽'과 '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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