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일기

동몽선습 부자유친(父子有親) 3

by 물음표

* 이 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또는 철학 및 인문학 유명인들의 주장이나 저서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제 이전의 '부자유친1'에서 얘기했던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부모'의 경우에 대해 이야기해 봐야겠죠.


원문의 기존 해석대로라면 부모가 자식을 훈육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애초에 자식이 그릇된 곳에 발 들이지 못하도록 가르치라고만 했을 뿐, 그 방법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가르치다’라는 개념의 범위는 각자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그 폭도 매우 넓게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사람마다 사랑의 정의, 바른 도리에 대한 정의, 그릇됨의 정의가 다 다르기 때문이죠.


반대로 자식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부모를 말리는 것뿐이며, 그것도 자기 보호가 아닌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기존의 해석을 따를 경우, 가정폭력이 아주 심하더라도 부모의 해석에 따라 ‘가르침’이라 주장하면 그럴 수 있는 겁니다. 또한, 부모가 볼 때 자식의 말이 사납다고 느껴지면 폭력을 가장한 ‘가르침’을 내릴 수도 있게 되는 거죠.


그렇기에 저는 기존 해석에서의 유학이 매우 불합리하다고 느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자기 마음대로 대해도 되지만, 정작 자식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말로 표현하는 것뿐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그마저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해야 한다고 못박아 두었으니, 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불평등한 규율인지요.


그러나 여기서 일차적으로 놓치고 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훈육에 '체벌'이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제 생각은 틀렸습니다.

훈육은 체벌이 포함된 행위가 아닙니다. 이는 훈육의 뜻을 한 번이라도 찾아본다면 곧바로 인정하게 될 겁니다.


훈육(訓育)

품성이나 도덕 따위를 가르쳐 기름


사용된 한자는 '가르칠 훈(訓)'과 '기를 육(育)'입니다. 즉, '훈육'의 한자에서도 '가르치고 기른다'는 뜻만 가지고 있습니다. '훈(訓)' 자에도 '육(育)' 자에도 체벌을 의미하는 부분은 어디에도 없죠. 그러니 실제 훈육의 의미로는 그 어떠한 체벌도 포함되서는 안 됩니다. 가정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나 실제로 제가 배웠고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훈육은 당연히 체벌이 포함된 단어입니다. 그러니 일단은 이렇게 실제 사용되는 훈육의 뜻을 바탕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앞서 제가 내린 해석에 따르면, 가정폭력은 당연히 허용될 수 없으며, 훈육조차도 해서는 안 됩니다. 고함을 지르는 것도 당연히 안 되며, 오히려 부모도 자식에게 '신중하게'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이러한 해석도 기존 해석과 마찬가지로 과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떼쓰고 고집을 부린다면?'

'다른 아이들을 다치게 했다면?'

'위험한 상황이라면?'


이런 경우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저는 위와 같은 상황에서도 아이를 혼내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며, 훈육을 하는 것 또한 해결 방법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먼저 원문에 나온 ‘허물을 짓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단순히 주변에 피해를 주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피해를 준 결과 상대에게 원망을 사게 되고, 이로 인해 상대로부터 보복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누군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나에게 보복하는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죠.


또한, 부모는 아이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존재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아이가 떼를 쓰거나 남에게 피해를 줬을 때, 부모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식이 괜찮은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 자식이 괜찮은지 확인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다음에는 바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즉시 사과'를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떼를 쓴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친구나 다른 아이를 때렸다면 그 아이에게 직접 사과를 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앞서 말했던 대로, 보복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서죠.


이것을 했다면, 이제 자식에게 해야 할 것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신중하게' 말을 골라서 하는 겁니다. 이때 신중하게 말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공공장소에서 주변에 피해를 끼치거나 다른 아이를 때리는 것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보통 이럴 때에는 '하지마! 너 그거 잘못된 행동이야!'라고 꾸짖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틀린 거죠. 이 방식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명령’인 거죠.


앞의 글에서 얘기했듯, 가르침과 배움은 '소통'을 통해 이뤄집니다. 그리고 이 소통의 목적은 ‘이해’이며, 이해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됩니다. 즉, 가르침과 배움은 ‘어떠한 현상을 납득하기 위해’ 이뤄진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죠.


부모를 포함해서 일반 성인 대부분은 이미 이런 과정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배운 상태입니다. 어깨너머로 배우든, 직접 경험하든 말입니다.

사회의 약속을 따르지 않았을 때 벌어지게 되는 안 좋은 일들, 예를 들면 앞서 말한 것처럼 보복을 당한다든가, 체면을 구긴다든가, 또는 금전적 손실이 일어난다든가 하는 등과 같은 다양한 손해를 겪으며 세상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 이미 ‘납득’한 상태라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부모는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이런 말을 하곤 하죠.


“하지 마!”

“도대체 왜 그러니!”

“왜 이렇게 속을 썩이니!”


이는 부모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미 배운 바대로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다릅니다. 아이들은 아직 이러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으며, 납득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상태인 거죠.

이때 고함을 치거나 훈육이라는 명목하에 체벌을 가하면, 아이들은 단순히 '떼를 쓰면 혼난다', '친구를 때리면 나도 맞는다' 같은 식으로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납득하지 못한 아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게 됩니다. 예를 들어,


“고함치는 걸 듣는 건 참을 만해.”

“부모님께 맞아도 나중에 몰래 세게 때려서 복수해야지.”


이런 식의 빈틈을 찾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신중하게' 말을 한다는 것은 아이가 이해하고, 납득해서 '스스로' 교정하도록 하는 방식인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어떻게 이해시키고, 무엇으로 납득하게 할 것인가?'


많은 부모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몰라서 답답해 하죠. 하지만 알고 보면 아주 간단히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정답지는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 정답지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부모,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유전자가 반반씩 섞여 있는 존재입니다. 이 섞였다는 것은 A+B=C가 아니라, A+B=A×B의 개념입니다.

즉, 부모와 무관하게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닌, 부모가 가진 특성이 그 자식답게 '혼합'된 존재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남편과 아내가 서로 대화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다들 한 번쯤은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그리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상대는 원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죠.

그러니 저는 ‘내가 원하는 바도, 원하지 않는 바도 상대에게 물어보고 행할지 말지를 정해라'가 보다 정확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식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 부모가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자신과 배우자, 즉 부부가 각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리고 상대방에게 바라는 점을 서로 얘기 나누고, 이를 정확하게 정리하고 기록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다음, 이 정보들을 바탕으로 자식이 어떤 부분에서 부모와 같은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죠.


이렇게 자세하고 세밀하게 파악한 상태에서 ‘내가 자식이라면 혹은 배우자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납득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여 신중하게 말을 하는 겁니다.


혹여 자식이 납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경우, 자식과 함께 납득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알아보면 됩니다. 이 과정 역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루어져야겠죠.


위험한 상황에서도 기본 원칙은 동일합니다. 즉, 위험한 것에 대해 납득시키는 것이 가장 먼저입니다. 물론, 이미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다면 자식을 구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반드시 아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네가 이런 행동을 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단다."

"이런 선택이 왜 위험한지를 같이 생각해 보자."


이런 방식으로 '아이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해서, 받아들이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죠.


만약 이러한데도 자식이 납득하지 못했다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미 부모의 변덕으로 인해 신뢰를 잃은 상태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죠.

물론 변덕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긴 합니다. 예전과 다르게 이제는 집안의 법도나 가훈도 많이 사라진 상태이며, 어쩌면 아예 이런 것이 존재하고 있지 않은 집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겁니다. 앞서 말한대로 가르침은 배운 것이 있어야 할 수 있는데, 배운 적이 없으니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칠 게 없으니 배울 수 있는 것도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이 모든 것에 앞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집안의 약속을 부부끼리 확실히 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그 약속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며 말한다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보고 배울 것이기 때문이죠.


이는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라는 속담으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속담의 뜻은 ‘어린아이들은 신기하거나 부러워서, 아무리 사소한 것도 직접 보고 들은 대로 쉽게 따라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 앞에서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식을 가르치기 전에 부모가 먼저 바른 도리를 보여 주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른 도리는 각 집안마다 다르며, 이것은 앞에 얘기한 집안마다의 고유한 규율이라고도 할 수 있죠.

물론 예외의 상황에서는 자식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신중하게 말을 골라 납득시키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물론 이는 아이를 키우기 전부터 부부끼리 약속을 정했을 경우에 대한 얘기이고, 보통은 약속을 정한 적도 없고 이미 변덕을 부린 시점일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해 줄께’ 같은 말이 있습니다. 보통은 아이가 잘못을 했기에 그대로 혼을 내겠죠. 물론 화가 나기에 혼을 낸다거나 아이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다그치는 경우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자식이 솔직하게 말했고, 용서해 주겠다고 했으면 용서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 다음, 이후 상황에 대해 설명하거나 또는 자식으로 인해 현재 내가 어떤지를 얘기하여 그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미 변덕을 부린 경우에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요? 방법은 많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먼저 배우자와 같이 약속을 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부모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거죠.


’나는 왜 이 규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나는 이 규율을 어떻게 납득해 왔지?‘


이런 걸 고민하는 과정을 거쳐 스스로가 납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때 배우자와 의견을 나누는 방식은, 예전에 쓴 글인 ‘건설적인 대화’에 나온 방식을 따르되 부드러운 목소리로 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즉 부모가 배우고, 고민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자식이 보는 것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죠.


이렇게 정했다면 이제 먼저 자식에게 ’사과’를 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규칙을 세우지 않았음에도 부모 멋대로 상황마다 강제하고, 변경한 것에 대해 자식에게 사과해야 하는 겁니다.

또한 부모가 자신의 실수를 인식하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보여 주는 것도 동반되어야 하겠죠.


예를 들면, 이렇게 먼저 얘기해야 하는 겁니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용서해 준다고 하고선 혼내서 미안해. 엄마(또는 아빠)가 잘못했어."


그런 뒤에 이처럼 얘기하는 겁니다.


"다음에는 한 말은 꼭 지킬 테니 솔직하게 얘기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믿어 줄래?"


그 후 비슷한 일이 발생하면 부모가 한 말 그대로 하는 것이죠.


사실 자식에게 ’사과‘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부모로서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죠.

나중에 제대로 다루겠지만, 부모의 '권위'라는 것은 부모가 앞장서 외부와 싸워 자식을 보호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식의 부모에 대한 믿음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겁니다.


그렇기에 부모가 자식에게 사과를 하여 무너져 내린 자식의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고, 그 상태를 유지하며 외부로부터 자식을 보호하다 보면 생기는 것이 부모의 진정한 '권위'인 겁니다.

여기서 외부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은 학교에서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부모가 나서서 해결해 준다거나 사회적 불평등이나 위험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자식에게 사과한다고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짓을 일삼고 일관되지 못하게 행동하면서 믿음직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권위를 떨어트리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부모의 사과에 대해 자식이 반응하는 속도는 각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자식은 부모가 처음으로 진심 어린 대화를 시도했을 때 바로 그 변화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어떤 자식은 그 변화가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기도 하죠.


이렇게 부모가 아무리 진심으로 다가간다 해도, 자식이 단번에 부모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내 말을 들어라'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네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싶다'라는 태도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모가 스스로 사고하고, 납득의 과정을 거쳐 솔직한 태도로 다가갔을 때, 자식은 결국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말한 방식으로 저 또한 직접 해봤습니다.

아직 결혼을 하진 않아서 자식은 없지만 형제나 사촌들, 부모님을 상대로 이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사고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며, 태도를 바꿨을 때 상대는 즉각 반응했습니다.


물론 어른이냐 아이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솔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모든 자식이 같은 속도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기에 부모는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결국 반응이 올 때까지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부모가 꾸준히 같은 태도를 유지하며 신뢰를 쌓아간다면, 자식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아니,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변덕으로 인해 무너진 신뢰는 다시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닌 부모 스스로가 고민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나는 왜 이 규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나는 어떻게 납득해 왔는가?'


부모가 먼저 배우고, 고민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일 때, 자식 역시 부모의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동몽선습 부자유친'에 쓰인 첫 문장과 이번 문장을 통해 보면, 폭력은 결코 가르침이 되지 못합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은 ‘단절’되며, 가르침이 아닌 ‘강압’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사랑도, 존중도, 효도, 봉양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부모 또한 부모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단지, 이런 자신들을 그래도 ‘부모’라고 여겨 주는 자식이 있을 뿐인 것이죠.


그러니 혹여라도 가정폭력을 경험한 분들이 ‘나도 부모가 되면 같은 실수를 저지를까 봐’ 두려워하며, 자식을 가질지 말지 고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경험한 것은 폭력을 통한 '복종'일뿐,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훈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통 자신의 부모처럼 폭력을 저지르는 이유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나는 그렇게 배웠다’고 믿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경험'일뿐, 배운 것이 아닙니다. 가르침이라는 미명 아래 저질러진 행동을 겪은 것뿐이죠.

설령 그것이 가르침이었다 해도, 내가 그대로 받아들일지는 결국 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자식을 가르치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데 어떡하나?'

걱정할 필요 역시 없습니다.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 시절, 각자 마음속에는 스스로 원했던 배움의 방식이 있었을 겁니다. 이제는 그때의 자신이 원했던 ‘그 배움’을 자식에게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혹시 원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어떤 방식이 맞을지 모르겠다면, 자식과 함께 ‘敎(교)'와 '諫(간)'을 통해 배워가면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시절의 부모에게 복종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작가의 이전글유학?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