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일기

동몽선습 부자유친(父子有親) 2

by 물음표

* 이 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또는 철학 및 인문학 유명인들의 주장이나 저서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是故로 敎之以義方하여 弗納於邪하며

시고 교지이의방 불납어사

柔聲以諫하여 不使得罪於鄕黨州閭하나니

유성이간 불사득죄어향당주려


'이 때문에 ‘부모’는 자식을 올바른 도리로 가르쳐서

부정한 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게 해야 하며,

‘자식’은 부모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려서

고을에서 죄를 얻지 않게 해야 하나니'



앞선 문장에서 '방법'을 제시했다면, 여기서는 그 방법을 행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가르치라는 것'은

(자식이)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고,

'효로 봉양하는 것'은

(부모가) 고을에서 죄를 얻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죠.


당연하다면 당연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저는 원문을 보며 살짝 의문이 들었습니다.

'부모와 자식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는데도 왜 해석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역할을 나눈 것일까?'


답은 한자에 있었습니다. 위 문장에서 사용된 '敎(가르칠 교)'는 말 그대로 '가르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이야 과학 문명의 발전 속도가 워낙 빨라서 변화가 자주 일어나니 자식이 부모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자식이 부모를 가르친다' 하면 후레자식 소리를 들었죠. 이런 인식이 조선시대에는 더더욱 심했을 테니 '敎(가르칠 교)'만 쓰더라도 부모가 하는 단어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겁니다.


'諫(간할 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새는 잘 쓰지 않는 단어지만 '간하다'는 ‘간언하다’라는 말의 뜻과 같습니다. ‘간언’은 웃어른이나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하는 말로, 애시당초 아랫사람이 하는 말이죠. 그러니 이 또한 '諫(간할 간)'만 쓰더라도 자식이 하는 단어로 생각했을 겁니다.


저는 여기서 유학에 대해 꽤나 크게 실망했습니다. 유학은 범용성이 높은 학문이라는 제 생각과는 다르게, 너무도 명확히 그 역할이 나눠져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과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죠.

그러나 전쟁에서 어린 아이의 용기로 부모가 살게 되는 경우도 있고, 현대처럼 자식이 부모보다 앞선 지식을 더 가지고 있기에 부모에게 가르쳐 주는 경우도 있었을 겁니다. 반대로 부모가 자식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리는 경우도 분명 존재하고요. 이외에도 많은 예시들이 존재할 테고, 이러한 사례들은 단순히 현대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존재해 왔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로 시작된 물음표는 ‘과연 정말 '부모'와 '자식'이라는 글자가 '敎(가르칠 교)' '諫(간할 간)'이라는 두 한자로 대체되는 게 맞는 건가?’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정말 부모와 자식의 역할을 나눈 거였다면 오히려 부모와 자식을 의미하는 한자를 직접적으로 썼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늘 하던대로 '敎(가르칠 교)'와 '諫(간할 간)'의 어원부터 해체, 분석하며 역으로 거슬러 올라와 봐야겠죠. 그럼 일단 '敎(가르칠 교)'의 어원부터 파헤쳐 보겠습니다.


'敎(가르칠 교)'는 '爻(사귈 효)' 자와 '子(아들 자)' 자, '攵(칠 복)' 자로 이루어진 한자입니다. 여기서 '爻(사귈 효)'에는 ‘배우다’는 뜻이 있고, '攵(칠 복)'에도 '때린다'는 뜻 외에 '가르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를 두고 단순히 직역을 한다면 이렇습니다.


’배우는 아이를 가르치다‘


이렇게만 본다면 가르치는 주체가 부모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틀린 거죠. '敎(교)'의 '가르친다'는 뜻만 놓고 본다면 현재에는 자식도 부모님께 가르쳐 드릴 수 있으니 자식으로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루고 있는 한자들을 바탕으로 해석하면 이마저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유학은 기원 전에 나온 만큼 고리타분하고 유연하지 못한 학문일까요?

'결국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는 것이 '가르치다'라는 행위의 본질인 건가?'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제가 실수한 부분을 찾았습니다.


한자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이기에, 글자의 생김새만 보더라도 의미를 직관적으로 유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이야 워낙 다양한 개념들이 많아 비효율적이게 됐지만, 글자가 생길 당시에는 효율적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爻(사귈 효), 子(아들 자), 攵(칠 복)'은 이 자체로만 봐야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귀는 아들을 때린다’가 ‘가르치다’를 뜻한다는 것은 너무 터무니 없는 말이죠. 그러니 이 시작이 어떤지를 한번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한자의 직계조상 문자인 갑골문자의 '敎(교)'를 보면, 우선 '爻(사귈 효)'는 ‘XX’가 세로로 놓여진 모양입니다. 그 아래에 '子(아들 자)'를 뜻하는 갑골문자로는 ‘’ 이것과 비슷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攵(칠 복)'이 있어야 할 위치에는 이전 글에서 말했던 '父(아비 부)'를 의미하는 갑골문자가 있었죠.


저는 갑골문자에서 '父(부)'를 손에 도끼들고 서 있는 사람의 ‘옆모습’을 표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전 글에도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설명을 했죠. 그러나 다시금 찾아보니 몽둥이를 든 ‘손’을 표현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제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왜 이것을 짚어서 얘기하는지, 저보다 뛰어난 학자들이 이미 결정내린 건데 제가 뭐라고 그것을 고치려 드는지 이해가 안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敎(교)'를 제대로, 온전하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대로 짚고 가야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한자는 표의문자입니다. 그리고 갑골문자는 한자의 원형입니다. 즉, 한자보다 더 직관적이었을 거라는 것이죠.

그러나 막상 '父(아비 부)'의 갑골문자 모양을 보고 있자면, 갑골문자로서의 '手(손 수)'에서 가져왔다기에는 손가락을 의미하는 부분이 너무 벌어져 있고, 더불어 손가락을 3개만 표현한 것이 이상합니다. 차라리 주먹을 쥐어 몽둥이를 잡고 있다면 모를까, 3개만 그린다는 것은 직관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또한 전에도 얘기했듯, 아버지의 역할은 가족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무기를 드는 이유도 사냥을 가서 식량을 구하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무리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단순히 몽둥이를 든 손으로 ‘힘과 권위’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버지’는 아니니 말이죠.

여기에 더해 '母(어미 모)'는 양육을 위한 젖이 중요하기에 이를 나타내고자 어머니의 ‘앞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父(아비 부)'는 몽둥이(돌도끼)를 들고 외부를 바라보며 경계하는 ‘옆모습’을 그리는 것이 보다 갑골문자스럽다는 뜻입니다.


위의 이유들로 저는 '아버지'를 뜻하는 갑골문자는, 막대기와 손으로 표현했다기보다는 '막대기'와 '사람'으로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맞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가 맞다는 생각은 '爻(사귈 효)'의 갑골문자인 ‘XX’를 해석하며 더 확고해졌습니다.

사실 '결국 자식을 때리는 것이 가르치는 행위의 본질이라는 건가?'라고 잠깐이나마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敎(교)'의 갑골문자에서 ‘XX’를 본 다음이었습니다.


'子(자)'를 나타내는 ‘’ 위에 ‘XX’가 세로로 놓여 있고, 그 옆에 父(부)가 그려져 있으니 사실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XX’를 ‘틀림’을 뜻하는 기호로 봤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동양에서는 'X'를 틀렸다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혹여 자식이 틀렸거나 잘못됨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1개만 쓰면 되지 굳이 2개를 쓸 이유는 없었겠죠.


먼저,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 X자를 기호로 쓸 때에는 일반적으로 두 선이 교차하는 형태를 나타냈으며 '관계'나 '교류'를 의미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관계나 교류란 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닌, 양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물론 '누군가는 일방적으로 교류할 수 있지 않느냐?'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조차도 ‘상대‘가 ‘존재’해야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무인도에 혼자 떨어졌다면 '관계'나 '교류'라는 단어는 쓸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관계'를 의미하는 'X'는 처음부터 한 개만 쓰이는 것이 아닌, XX로 쓰인 것이고, 이는 관계와 관계가 만나 이루어지는 ‘소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자 해석을 할 때에 '爻(효)'가 있으면 이를 ‘소통’이 아닌, '學(배울 학)'이나 '希(바랄 희)'의 의미로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敎(교)'에서는 '學(학)'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를 좀 이상하다 느꼈습니다. 소통의 의미가 있는데 굳이 '學(배울 학)'의 의미로 썼다고 얘기하는 이유가 뭘까 싶었던 것이죠.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이내 납득이 되었습니다.


일단, 말씀드렸듯 갑골문자 상에서 아버지를 뜻하는 그림은 아버지의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 '보호'를 의미하는 ‘아버지’ 그 자체를 그린 겁니다. 물론 '힘과 권위로 훈육을 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아버지를 쓸 이유가 있나? 어머니는 왜 안 쓰지?' 하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어머니께도 배울 것은 많죠.


그러나 문자가 생긴 시절을 생각한다면 자연에는 많은 위협들이 있었을 겁니다. 이때 ’보호‘하는 역할인 아버지의 판단을 따르는 것이 여러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확률이 가장 높았겠죠. 그리고 무리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 명의 의견으로 하는 것이 보다 빠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가정 내에서도 동일하죠. 그러니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규칙을 배우는 것이 맞았을 겁니다.

즉, '敎(교)'는 한 집안의 우두머리인 아버지가 세운 규칙을 배우는 자식의 모습을 통해 ’가르치다‘라는 의미의 문자로 만들어진 것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니 결국 아버지가 자식을 가르치는 것이다’가 아닙니다. 가정에서는 ’보호자‘가 집안의 약속을 정합니다. 이때 보호자가 약속을 정하는 건 단순히 경험이 많거나 힘이 세서가 아니라, 결정권이 한 곳에 집중될 때 위급 상황에서 빠르고 효율적인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식은 이러한 약속을 자라면서 배우게 되죠. 이는 누구나 경험할 일입니다.

즉, ‘가르치다’라는 개념을 문자로 나타내기 위해 가장 대표적인 모습으로 자식과 아버지를 그린 것이지, ’윗사람만이 가르칠 수 있다‘를 뜻하느라 그런 것은 아니란 뜻이죠.


저는 이 부분에서 너무도 당연하기에 놓치고 있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배워야' 가르칠 수 있습니다. 배움이 없다면 가르칠 수도 없죠. 그리고 배우는 것은 그 어디서도, 그 무엇에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르치고 배우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지식’입니다. 지식을 배우고 지식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배우고 가르친다는 것은 지식의 교류이며 새로운 사고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밑바탕에는 '소통'이 기본 전제로 깔려있죠.


그러니 이를 의미하는 한자들을 다시금 보면 더 명확히 이해가 가능합니다. '爻(효)'는 '사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갑골문자인 'XX‘는 '소통'을 의미한다고 했었죠. 소통을 하면 자연스레 그 대상과 사귈 수 있고, 사귀게 되면 배울 점(지식)이 보이게 돼죠. 또는 궁금함이 생기면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단계들을 거쳐야지 ’가르치다‘라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물론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배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깨 너머로 배운다' 같이 보거나 듣는 것만으로도 배우는 방식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가르치다'라는 행위의 본질이 교류를 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소통을 통해 배움이 있으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소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흔히들 부모님들이 말씀하시는 '자식을 키우면서 많이 배웠다'는 말 또한 이에 해당합니다.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만을 놓고 봤을 때에는 일방적인 가르침이 연상되지만, 실상은 가르치면서 배우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죠.

그러니 ‘가르침’이라는 것은 사실상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약속을 공유하는 과정인 ‘소통'의 한 부분이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위의 원 문장에 쓰인 '敎(교)'는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닌 '바른 도리를 알려준다’는 행위를 통해 '소통'을 하는 겁니다.

이러한 '소통'이라는 개념에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알려줄 수도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알려줄 수도 있는 것이죠.


'諫(간할 간)'은 '言(말씀 언)'과 '柬(가릴 간, 살필 간)'이 결합한 형태로 직역하면 ‘말을 가려서 하다, 살펴서 하다’입니다. 즉,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고른 말'이라는 뜻인 것이죠. 그런데 이게 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말로 쓰이게 됐을까요?

따지고 보면 '諫(간할 간)'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되는 말입니다. 단순 유학만 놓고보더라도 예의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諫(간할 간)'은 단순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만 하는 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諫(간할 간)'은 왜 이렇게 쓰이게 됐을까? 답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가장 많이 '諫(간할 간)'을 해야 하고 '諫(간할 간)'하지 않으면 죽는 게 확정인 관계가 주로 아랫사람과 윗사람 사이에서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신하가 가장 많이 임금에게 '諫(간할 간)'해야 하는 위치이기에 자연스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쓰는 말로 된 것이죠.

그러나 말했듯 '諫(간할 간)'은 그저 아랫사람이 자주 사용했을 뿐입니다. '敎(가르칠 교)'와 마찬가지로 '諫(간할 간)' 자체가 사람 사이의 위치관계를 확정시키는 단어가 아니라는 겁니다.

즉, 문장에서 쓰인 '諫(간할 간)'은 말 그대로 '조심스럽고 신중한 말을 사용하라'는 것이지, 아랫사람이니 윗사람이니 특정 대상을 뜻하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정리하면 '敎(가르칠 교)'는 ’소통을 통한 가르침‘을 의미하는 한자이고, '諫(간할 간)'은 ’신중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한자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제 나름대로 원문을 다시금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또는 자식이 부모에게) 올바른 도리를 알려주어 사악한 길에 들지 않게 하며,

(알려줄 때, 또는 이미 사악한 길에 들었더라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신중하게 말을 하여, 마을과 이웃에서 허물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게 바로 제가 생각하던 범용성 있는 유학스러움을 나타내는 해석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 문장은 부모와 자식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점을 납득할 수 있게 해주고, 이전 글에 쓰인 문장에서의 '부모는 자식을 사랑으로 가르치라는 것'과 '자식은 부모를 효로 봉양해야 한다'는 것에도 위배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누군가는 그럼에도 효와 봉양을 들이밀며 ‘어딜 감히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유학에서 효와 봉양의 의미를 정확히 아시게 된다면 제 해석을 납득하실 겁니다.


먼저 왜 이것이 유학에서 말하는 '효(孝)'에 있어서도 위배되지 않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효(孝)라고 하면 그저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 그대로 다 듣고, 따르는 복종을 뜻한다고 당연스레 생각이 드셨을 겁니다.

그러나 '효(孝)'는 노인을 뜻하는 '老(늙을 노)'와 자녀를 뜻하는 '子(아들 또는 자식 자)'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특히나 한자는 표의문자이기에 자녀가 노인을 업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식이 부모나 조부모를 업고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 복종하는 행위일까요? 아니면 자신을 보호하고 양육해 준 부모의 헌신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행위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효'는 부모를 위와 같은 마음으로 극진히 모시는 것이지 복종하는 것이 아닌 것이죠.


'봉양(奉養)'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양(奉養)'에서 사용된 ’받들다‘는 의미를 복종의 개념으로 알고 계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것도 잘못된 정보입니다.

일단 ‘받들다’는 공경하여 높이 모시고, 지지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공경하고 높이 모시는 것은 앞서 효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지지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그것에 찬성하여 뜻을 같이하고 말 그대로 소중이 여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봉양' 그 어디에도 복종을 의미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공경이란 앞서 말한 것처럼 존중과 배려를 포함하지만, 복종은 일방적인 지시와 따름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니 유학에서 '봉양'이 의미하는 바는 복종보다 '존중'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자식이 부모를 효로써 봉양한다는 것은 부모님의 헌신에 대한 깊은 감사와 사랑을 바탕으로 존중하며 모시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러한 정확한 '효(孝)'와 '봉양(奉養)'의 개념을 통해 자식은 부모에게 부드러운 말로 '간(諫)'을 할 수 있고, 또 '간(諫)'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올바른 도리를 알려드리며 '소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원문의 내용은 많이 알려진 해석처럼 일방적인 교육과 무조건적인 복종의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순수한 의미의 '敎(교)'와 '諫(간)'을 하는 '쌍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소통'을 하는 것이고, 이때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를 존중해, 신중하게 말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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