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일기

동몽선습 부자유친(父子有親) 1

by 물음표

* 이 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또는 철학 및 인문학 유명인들의 주장이나 저서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父子有親

부자유친


너무 오랜만에 보는 '오륜(五倫)'이라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앞선 '수편(首篇)'을 거치면서, 같은 글자임에도 예전 학교에서 배울 때와는 꽤 다르게 다가와지는 걸 느낍니다.


저는 어렸을 때 꽤나 불평불만을 달고 툴툴거리는, 전형적인 말 안듣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제 내면에는 전통적인 체계가 자리잡고 있었기에 크게 선을 넘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제 기억이니 가족에게 상처를 줬을 수도 있겠죠. 그럼에도 어떤 위계질서에 복종하는 심리는 있었기에 '부자유친'에 대해 알게 됐을 때 '당연한 거잖아?'라며 별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맞습니다. 아주 당연한 것이죠. 부모와 자식이 친한 관계인 것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짧은 삶이나마 살아오며 보니 저희 집은 상당히 화목한 편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10대 때에는 아니라고 생각했었지만 말이죠.


어쨌든 2천 년 전에 비해 매우 풍족해진 현재에도 사람 사이의 불화는 여전히 존재하니, 예전 시절에는 훨씬 더 심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기에 유학에서는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족'부터 바로잡으려 했나 봅니다. 그러니 이를 알려주기 위해 '동몽선습' 같은 글까지 쓴 것이겠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볼 때, 예전의 제가 '오륜'을 그저 철학자의 명언 정도로만 바라봤다면, 지금의 제게 있어서 '오륜'은 상당히 친절하고 세세한 방법을 적은 자기계발서로 보입니다.


과연 그 시절에는 부모와 자식을 어떤 식으로 정의내렸고, 화목해지기 위해 알려준 방법들은 무엇이었는지 차근차근 알아가보도록 하죠.



父子는 天性之親이라

부자 천성지친

生而育之하고 愛而敎之하며

생이육지 애이교지

奉而承之하고 孝而養之하나니

봉이승지 효이양지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정한 타고난 친밀한 관계이니,

부모는 낳아 기르고, 사랑으로 가르치며,

자식은 공경하여 섬기고, 효로써 봉양하는 것이나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서로에 대해 어떻게 임해야 되는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설명한 것입니다. 또는 유학에서 내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한 정의'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죠. 그러나 저는 이 문장을 보자마자 물음표가 생겼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경우, 또는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부모의 경우, 그리고 양부모인 경우에도 이 문장이 동일하게 적용될까?'


순간, 너무 감정에 치우쳐 '부자유친'을 바라보며 부정적인 부분만 꼬집게 된 건 아닐까 싶었지만, 사색을 통해 나온 답은 ‘이런 경우에 유학은 어떻게 대응하고 답변할까?’ 같은 순수한 궁금증때문이었기에 계속 이 질문을 따라가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유학에서는 자식을 버린 부모를 어떤 식으로 바라볼지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접한 '동몽선습'의 유학적인 관점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버린 시점에서 이미 그 부모는 짐승과 같다'고 말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인간은 무리를 이뤄야만 강해질 수 있기에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입장에서는 스스로의 강점을 버린 것이니 매우 어리석은 일을 한 거겠죠.

그러나 반대로 버림 받은 자식은 다릅니다. 자식이 부모를 버린 것이 아니기에 지금까지의 '동몽선습' 내용으로 볼 때 크게 어긋나는 점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하늘이 정해준 것이라 했으니, 자식이 부모를 그리워하고 찾아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 것이죠.


그렇다면 이 문장만으로는 자식을 버린 부모와 버림받은 자식은 해석할 수 없을까요?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유학에서 '오상(五常, 다섯 가지 도덕적 원칙)'과 '오륜(五倫)'은 사람으로 살기 위한 전제 조건이자 필수 조건입니다. 그렇기에 부모가 자식을 기르는 것과 같이 선행되는 것이 없으면, 자식이 부모를 효로 봉양하는 것도 의미를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금 첫 문장을 보면, 마지막 구절에 해당하는 자식이 공경하고 섬기며 효로 봉양하는 대상은 '부모'입니다. 하지만 이에 있어 우선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부모가 먼저 낳아 기르고, 사랑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행해야지만 자식도 그에 따라 자신이 할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부모가 할 일을 하지 않은, 기르고 사랑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은 부모라면 어떻게 될까요? 지속적으로 얘기하는 '사람'에 해당되는 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즉, 사람이 되기 위한 기본에서도 그 첫번째인 부모로서의 일을 수행하지 않았으므로 짐승과도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제 얘기가 상당히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각자마다의 사정이 있고, 부모와 자식 모두 죽을 수도 있기에 버리는 경우도 있겠죠.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잠시 동안 누군가에게 위탁하는 것과 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하지만 전 위탁하고 다시 자식을 찾는 것보다, 단순히 버린 것을 더 많이 보고 들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 또한 그럴 수 있지.'라며 넘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기에 이 부분에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저는 각 개인의 자유를 매우 존중합니다. 그렇기에 자식을 가질지 말지, 낙태를 할지 말지, 심지어 자식을 버릴지 말지도 오롯이 개개인이 선택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유를 존중받기에 얻을 수 있는 자신의 선택권을 행사했다면, 그에 따르는 책임 또한 져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제 의견과는 별개로, 적어도 유학에서는 자식을 버리는 행위가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수 없는 일이기에, 인간의 도리를 버린 짐승과도 같은 짓을 한 거라는 걸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유학은 인간이 만물 중 가장 존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한 번의 선택으로 영원히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했듯이,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식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그리워하고 찾아가려 노력하는 것은 인간이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미 버림받았기에 부모의 도리가 지켜지지 않은 상황임으로, 자식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인간의 도리와 무관하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자식을 버린 기점으로부터 부모와 자식의 연을 이어갈지에 대한 여부는 부모가 아닌 자식에게 선택권이 넘어갑니다. 즉 자식을 버린 순간, 유학 기준에서 그 부모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역으로 '자식에게 선택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을 찾아온 자식을 그들이 이용 한다든가 또는 다시 버린다는 표현도 맞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단군신화에서 호랑이가 쑥과 마늘만 먹는 것을 못 버텨 사람되기를 포기하고 도망간 일화를 두고, 그 누구도 호랑이가 환웅을 이용하고 버렸다고 표현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 말 그대로 자식덕분에 겨우 찾아온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기회를, 그 부모는 못 버티고 도망가 놓쳐버린 것에 불과한 겁니다.


선택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짐승은 본능대로 살 뿐이죠. 그렇기에 짐승을 다시금 거두어 사람으로 만들지, 그대로 짐승으로 살게 둘지를 정하는 것은 '사람'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첫 번째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자신을 버렸음에도 그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겠다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부모가 자식에게 선택받기 위해 곰이 인간이 될 정도로의 많은 인내와 노력을 쏟아야 하는 것이죠. 여기에 있어 자식은 자식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로 제가 해석한 유학에서의 '고아'는, 단순 버림받은 자식이 아니라 자신을 태어나게 해준 부모를 짐승에서 해방시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이에 대한 '선택권을 가진 유일한 존재'라고 봅니다.


다음 경우인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부모에 대해서는 '동몽선습'의 다음 문장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이 문장으로만 보기에는 낳아 기르고, 사랑으로 가르친다는 부분에서 잘못된 해석을 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입양아의 경우입니다.

자신의 부모가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통 받았다는 이야기를 간혹 접했습니다. 당연히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큰 충격이긴 할 겁니다. 물론 마음으로 낳았다는 얘기를 주고받고 이해하고, 그럼에도 다시 부모와 자식으로 행복하게 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안그런 경우도 많죠. 친부모가 궁금하기도 하고 날 왜 버렸나 생각이 들기도 하기 때문에 멀어지기도 하며, 또 그간에 쌓인 오해가 부풀려지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친부모를 뜻할 때 사용되는 '親(친할 친)'은 '亲(친)' 자와 '보다'라는 뜻을 가진 '見(견)' 자로 이루어진 형성자입니다.

여기서 '亲(친)' 자는 '立(설 립)'과 '木(나무 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立(설 립)'은 서다, 세우다 외에도 '독립적인 존재'를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木(나무 목)'은 나무 외에도 '성장'과 '계보'를 의미하는 상징적 요소로 사용되기도 했죠.

그러니 여기서 '亲(친)'은 '성장하여 독립된 존재'를 뜻하는 용도로 사용됐을 거라고 봅니다.

여기서 독립된 존재가 성장하는 것을 보기(見) 위해서는 가까이서 자주 교류해야 했을 테고, 그러다 보면 친밀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죠.


즉, '親(친할 친)'부모는 아이가 성장하여 독립할 때까지 가까이서 지켜보며, 교류하고, 친밀한 관계의 부모를 뜻하는 것이죠.

그리고 어원 어디에도 피를 의미하는 한자가 없다는 점을 놓고 봐도, 사실상 친부모는 ‘피가 이어진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정서적 친밀함을 가질 수 있는 가까이 있는 부모’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양부모나 양아들, 수양딸에서 쓰이는 양은 '養(기를 양)'입니다. 이 한자는 '羊(양)' 자와 '食(식)' 자가 사용됐습니다. 단순히 보면 양고기를 먹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확히는 '양고기를 먹여 기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은 고대 시절 귀한 동물이었습니다. 털과 가죽, 고기, 젖까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죠. 그러니 이러한 양을 먹여 기른다는 것은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도 '혈연'이라는 얘기는 전혀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친부모란 단순히 혈연상의 부모가 아니라 '직접 보고, 가까이하며, 함께 생활하는 부모'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입양 부모도 충분히 친부모가 될 수 있으며 '양육하는 부모'가 진정한 부모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금 첫 문장을 살펴보면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에도 혈연이어야 한다거나, ‘몸으로 직접’ 낳았다는 글자가 없다는 것을 말이죠.

그러니 유학적 관점으로도, 입양의 경우 역시 '부모와 자식'이라는 '하늘이 정해준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입양이냐 혈연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부모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여기에 도달하면서 하나의 물음표가 생겨났습니다. 부모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표가 말이죠. 저에게 부모란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 쓰인 하늘이 정해준 관계라는 부분에서도, 친부모와 양부모의 어원 설명에서도 그 어디에도 혈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한자의 어원을 통해 부모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아야겠죠.


부모(父母)


'父(아비 부)'는 상형자로, 손에 막대기를 든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대 학자들은 이 막대기를 '돌도끼'라고 해석을 한다더군요. 그래서 '父 아비 부'의 원 뜻은 '도끼를 들고 일하는 남자'라고 합니다.

'母(어미 모)' 또한 상형자로,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본뜬 한자라고 합니다.


일단,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원 그 어디에도 '혈연'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물론 대부분 어원에 나온 역할을 하는 이들이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일 확률이 높기에 자연스럽게 '부모=혈연'이라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가 의사소통을 하는 언중들간의 사회적 약속이라는 점을 놓고 본다면 이상합니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다면, '父 아비 부'는 도끼가 아니라 남성의 성기를 보다 강조했을 것이고, '母 어미 모'는 젖을 먹이는 것보다는 임신 상태를 강조했을 겁니다. 그러나 '아비'는 무기를 들고 일을 하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보호'의 의미가 더 큰 것이고, '어미'는 자식에게 젖을 먹이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양육'의 의미가 더 큰 것입니다.

즉, 부모란 혈연으로 이루어진 대상이 아니라 앞서 말한 '親친'과 '養양'을 모두 만족한, '가까이에서 나를 보호해주고 양육해준' 이들이 '부모'라는 겁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보면, 자식을 버린 이는 인간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애시당초 부모라는 단어를 쓸 수도 없다는 겁니다. 가까이 있지도 않고, 보호해 주지도 않았으며, 양육 또한 하지 않았으니 말이죠. 그러니 자식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뜻은, 그들은 애시당초 부모가 아니기에 효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 부모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면 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정리하자면, 부모는 피로 이어진 직접적으로 나를 낳아준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이 누가 되었든 외부로부터 나를 보호해주고, 먹여주며, 가까이에서 키워준 이들이 부모라는 것이죠.

그러니 친부모니 양부모니 하며 나눌 필요도 없습니다. 부모는 그저 부모일 뿐이니까요.


이 내용을 쓰다가 문득 '편부모는 어떻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답은 바로 나왔습니다. 편부모의 편은 '치우칠 편(偏)'으로 '부모 둘 중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뜻입니다. 느낌적으로 보자면 둘 중 한 명 밖에 없다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앞서 설명한 부모의 정의로 본다면, '둘이서 해야 될 보호하고 양육하는 일이 한 명에게 치우쳐졌다'는 뜻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편부모는 혼자서 2인분의 일을 하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말이 편부모일 뿐이지 부모가 모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보니, 현재 편부모 대신 쓰고 있는 '한부모'라는 단어가 상당히 편협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해석한 부모로 '한부모'를 보자면, 보호하거나 양육하거나 둘 중 하나 밖에 못하는 부모를 뜻하게 되니 말입니다. 실제로는 한 명이서 두 명의 역할을 다 수행하는 건데 말이죠.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한'이냐 '편'이냐가 아닌, 부모라는 두 명의 역할을 '혼자서' 다 해내는 '대단한 존재'라는 겁니다.


고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고아에 사용된 '孤'는 '외로울 고'입니다. 직역하면 외로운 아이라는 뜻입니다. 부모가 없기에, 보호하고 양육해주는 존재가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고아란 보호받거나 양육받지 못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고아는 결국 '스스로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존재'라고도 칭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옛날 중국에서 제후(諸侯)들이 자신을 외롭고 부족한 존재라는 겸양의 의미로 부를 때 사용한 1인칭 표현이 ‘고(孤)’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외롭고 부족하다는 의미는 실상 우두머리이기에 외롭고, 더 많은 영토에 대한 욕심으로 늘 부족함을 내포하고 있죠. 즉, 스스로 강한 존재로 정의했기에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고아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아이 아(兒)'가 아니기에 '고(孤)'가 될 수 있습니다.

즉, 고아는 단순히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보호하고 성장한 강한 존재'로서 제후처럼 '고(孤)'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존재라고도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죠.

여기에 자신을 버린 부모를 찾아 인간의 도리를 다 할 수 있는 기회까지 준다는 것은 가히 '성인(聖人)'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모는 피로 맺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부모란 '자식 가까이에서 보호하며, 양육하는 이들'을 뜻하는 것이죠. 그러니 그 도리를 저버린 이는 더 이상 부모라 불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고아는 단순히 부모가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보호하고 길러낸 강한 존재이며, 책임감으로부터 도망간 약한 이들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결국 '부자유친'에서 말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하늘이 정해준 필연적인 것이지만, 그 관계를 어찌할지는 오롯이 '사람'으로서의 부모, 자식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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