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 놀 때 일하기

by 이상


해외 출장을 다녀와서 일을 하다 회사 근처에서 근무하는 아는 분이 생각나서 식사나 할 겸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시죠?”


“네, 저희 회사 23일에 종무식 하고 24일부터 쉬고 있어요. 출근은 1월 5일 월요일이예요.”


‘12일…

거의 2주를 쉬는구나.

연말은 연말이네.

하긴 어떤 사람들은 연말연초 한 달 쉬기도 하니깐.‘


“아, 그럼 연초 지나서나 뵐 수 있겠네요.

잘 쉬시고 그때 다시 연락해서 약속 잡아요.“


“네, 수고하세요!”


‘수고…‘

늘상 하고 듣는 말인데,

갑자기 내가 정말 수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부터 나와서 일하고 실장님과 사장님께 인사 드리며 얼굴 도장 찍고,

출근 시간 맞춰서 나오는 팀원들과 인사하며 하루 시작.

낮에는 여기 저기 불려 다니고 회의 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고,

퇴근 시간 맞춰 집에 가는 팀원들과 인사하고 혼자서 집중해서 서류 보고 일처리하는 두 번째 하루의 시작.

저녁 먹고 일하고 가는 루틴이 연말에도 이어지고 있다 ㅎ


연초엔 다시 미국 장기 출장이 예정되어 있어,

빨라야 2월, 아니 설 연휴 지나서나 이 분을 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설 연휴가 2/14 토요일부터 18일 수요일까지이니,

2월 말 3월 초쯤 되겠군. ㅎㅎ


남들은 연말이기도 하지만 할 일이 없어서 장기 휴가를 회사에서도 장려한다고도 하는데, 내가 지금 몸 담고 있는 곳은 호황에, 연말에도 issue들이 계속 터져서 연일 야근 행진이다.


안하면 문제가 없지만 밥 벌이가 안된다.

뭘 하고 일을 벌리면 문제가 터진다.

그것 막으라고 직원들을 더 고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일복이라는 표현은 일단 맞는 것 같다.


갑자기 뉴욕 출장을 가게 되어 출장 전날엔,

출발 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야 했기에,

11시에 퇴근했다.


출장계획서 결재도 겨우 올리고,

말썽 많은 회사 mailing system과 VPN을 급하게 정리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11시가 넘었다.


회삿돈이라도 택시는 별로 타고 싶지 않아서, 지하철 끊기기 전에 바리바리 출장 짐을 싸서 겨우 가서 지하철을 탔다.


차를 놓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잠깐이나마 쉴 수 있다는 편안함

스르륵 눈이 감겼다.


서울 도심으로 출퇴근할 땐 거리가 멀어서 한 숨 자고 눈을 뜨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멀다라고 느꼈다.


지금 직장은 위치가 서울 외곽 신도시 단지이고 집에서 거리가 가까워서 선택한 이유도 있었다.


출퇴근 길이 도심지 방향과 반대다 보니 여유 있고 거리가 짧아 좋았는데, 피곤할 때 잠들면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버릴 수 있는 단점이 있다.


어렸을 땐 잘 때 귀를 막고 있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기 일쑤였는데, 나이가 먹으니 다행히 역을 지나치진 않고 직전에는 깨게 되었다.


인생에 대한 책임감이 더 커졌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그렇게 집에 와서 속옷과 양말 그리고 옷 등을 챙겼다.

코로나 전엔 정말 밥 먹듯이 해외 출장을 다녀서 사람들이 무슨 런던을 인천 가듯이 자주 가느냐고 했었다.


그래서, carrier를 다 풀지 않고 바로 짐 쌀 수 있게 늘 준비를 해두었다. 코로나 이후엔 다행히 해외 출장이 급격하게 줄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쌓이는 마일리지 만큼 건강은 악화되었으니까.


2019년 남미에서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복귀하면서 이제 한동안은 한국에 있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인생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

코로나가 터지고 3년 정도 장기화되며 거짓말처럼 그렇게 자주 타던 공항 버스를 한동안 잘 타지 않게 되었다.


대신 국내 출장이 많아지고 한국에 있다 보니 강의 요청이 많아서, 가깝게는 대전, 세종으로,

멀게는 포항, 울산, 경주, 부산 등 여기저기 참 많이 다녔다.


이번엔 KTX 마일리지가 쌓였다. ㅎㅎㅎ

이넘의 마일리지 인생.


짐을 다 싸고 정리하니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뉴욕행 비행기는 오전.


연말에 쉬는 사람들이 공항에 바글바글 할 테니,

Security Check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을 것이고,

immigration 까지 감안하면,

정말 항공사에서 말하는 3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해야 안전하다.


누가 그렇게 일찍 가느냐는 말을 듣고 2시간 전에 갔는데,

ticketing부터 너무 밀려서 비행기를 겨우 탄 적이 있어 공항엔 아예 일찍 간다.

일찍 가서 라운지에서 뷔페 먹고 한숨 자고 가는 게 휴식이다.


그럴 땐 가능하면 업무용 컴퓨터를 잘 켜지 않는다.


쪽잠을 자고 새벽 시간에 맞춰 공항버스를 타러 갔다.

누군가는 공항버스를 타면 설렘이라고 하는데,

내 경우엔 그나마 컴퓨터와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휴식시간이다.


지하철에서 쪽잠 자는 시간처럼 말이다.


전엔 자주 타던 집 근처 공항버스가 최단거리로 가양대교까지 가서,

바로 인천공항으로 쏴서 1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강서 지역이 개발이 많이 되며 여기저기 둘러서 가기 때문에 대한항공이 있는 2 터미널까지는 1시간 20분은 잡아야 한다.


일찍 나오길 잘했다.


그 와중에 급하게 잡힌 conference call에 참석해서 이동 중에도 듣기만 하란다.

참. 요즘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럴 때 실감한다.


듣기만 하라고 하면서도 또 말을 시킨다. 무슨 구원 투수도 아니고.

딱 필요한 말만 해주고 이제 탑승 수속해야 해서 잘 못 들을 수 있다고 정리했다.


계속 끌려 다니면 한도 끝도 없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만큼 배려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남의 사정보다 당장 나의 필요가 더 급한 것일 테니깐.

세상살이를 이해하는 이치 중 하나다.


그렇게 conference call을 마치고 로밍까지 마쳤다.

Best option이라고 권해서 6G인가 되는 것으로 3.9만 원에 결재했다.

한 달 사용 가능해서 장기 출장에 좋았다.

회사 출장이니 법카로 시원하게.

개인 여행이면 싼 e-Sim 등을 찾겠지만 이런 것이 그래도 회사 출장의 맛인 것 같다.


Security Check와 immigration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lounge를 찾았다.


전 회사에서 직원 복지용이라고 만들어준 카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VISA Platinum이라 priority pass가 같이 포함되어 있어 해외 다닐 때 lounge를 이용하기 편하다.


실적에 따라 연간 무료 사용 횟수가 정해져 있긴 한데, 나름 잘 쓰고 있다.


전엔 Priority Pass 실물 카드를 들고 다니면서 lounge 출입을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바뀌어서 The Lounge 라는 app을 깔고, 신용카드를 등록한 뒤 라운지 이용권을 다운 받아 사용해야 한다.


처음 썼을 땐 버벅거렸지만 지금은 편하게 잘 쓰고 있다.


그렇게 편하게 쓸 수 있는 마리나 라운지를 찾아 갔는데, 왠걸 속된 말로 "뺀찌"를 맞았다.

입뺀 (입구 뺀찌)을 당한 이유를 들어보니 거긴 마리나 "골드 Gold" 라운지란다.

내가 가진 카드와 앱 그리고 이용권으로는 이용할 수 없다고,


옆에 있는 그냥 마리나 라운지에 가라고 전혀 친절하지 않은 내용을,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그럴 때 붙이는 고객님이라는 표현이 낯설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분명 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class가 높은 골드 라운지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그냥 마리나 라운지엔 긴 줄이 서 있다.


'차라리 그냥 어디 식당 같은 데 가서 밥 먹고 앉아 있을까?'


이 긴 줄을 보며 지친 심신을 내려놓고 싶지만, 유리창 너머로 넓은 공간에서 여유 있게 앉아서 뷔페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조금만 더 참자하며 기다린다.

회사 카드로 밥을 먹어도 되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공짜로 더 잘 나오니깐.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


앞에 자녀와 같이 여행을 가는 부부가 티격태격하는 걸 보며,

아침부터 애 챙기고 나와서 줄 서 있으니 서로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저럴 때 이해심과 배려가 필요한 건데,

그게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다행히 라운지에 잘 입성해서 잘 먹고 한숨 자다,

비행기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맞춰 놓은 알람에 눈을 떴다.


power nap 이라며 잠깐 푹 자는 습관을 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다 보니,

이렇게 앉아서도 잠깐 잠깐 잘 잔다.


그렇게 오랜만에 라운지에서 잘 먹고 잘 자고 비행기에도 잘 탔다.

Air Plane Mode가 되기 전에 회사 직원들과 지인들과 잠시 통화를 했다.


요즘 나에게 이것 저것 묻고 해 달라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사람들이 찾을 때 행복한 줄 알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 하는데도,

왜 안 행복한지는 미지수다.


Take-off를 해서 날아가고 허기진 사람들을 위한 기내식이 나온다.

기내식은 비행기 안에서 속 안 좋아지면 비상사태이기 때문에 양도 적고 음식도 그냥 그렇다.


그래서, 출장을 모시고 간 상사 한분은 혹시 남는 거 없냐고 해서,

한판 더 때리기도 하셨다.


두 판 모두 깨끗이 비우시고 공짜 와인에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선하다.


“니도 시원~하게 한잔하고, 푹 자삐라.”


후에 임원까지 하시고 퇴임하셨는데 잘 살고 계신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판 더 달라고 말할 정도의 철판 깐 얼굴은 아니어서,

라운지에서 실컷 먹고 비행기에 탄다.


배가 꽤나 부르니 첫 번째 기내식은 간단히 먹고 남들 밥 먹을 동안 양치를 한다.

다 먹고 난 후엔 또 줄 서서 양치를 해야 한다.

그넘의 줄. 이제 그만!


일회용 칫솔과 치약이 있어 비행기에 치약을 들고 타야 하는 불편은 많이 줄었다.

액체라고 얼마나 단속이 심한지.

예전에 치약을 잘 주지 않았을 땐 일부러 집에서 쓰다 마지막 한두 번 양치할 치약을 남겨 놓기도 했었다.


건강 챙기고 치과 가서 고생 안 하려고 참 열심히 산다.


술 마시고 귀찮아서 양치도 안 하고 자고 하다 언젠가 회사 치과에서 몇 달 동안 대공사를 한 후 양치를 안 하고 잠을 자거나 하루에 두세 번의 양치를 하지 않은 적은 거의 없다.

1년에 한두 번은 스케일링을 받으니 이빨이 아픈 적은 없다.


그렇게 기내식을 먹고 양치까지 한 후 한숨 자다 보니,

뭘 나눠주길래 깨서 보니,

대한항공 핫도그였다.


여기도 참 열심히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업체를 쓰겠지만 이런 것까지 자기 상표를 붙이는 걸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 놀고 있는 연말 주말에 나와 일하다 보니,

한순간 울컥해서 쓰던 글이 길어졌다.


어느새 저녁을 먹을 때다.


밥 먹고 남은 일들을 하고 그래도 조금 일찍 들어가서 충분히 자려면 오늘은 여기까지 써야겠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들의 여유 있는 연말을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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