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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 Nov 02. 2022

아버지 원망했어요

가족

트로트 가수 영탁의 노래 중 유명한 곡이 있다.

막걸리 한잔.


거기 나온 가사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이해가 막걸리에 잘 배어있다.


나 또한 아버지를 원망해본 적이 있고 막걸리를 좋아하다 보니 이 노래에 많이 공감했던 것 같다.


난 소위 말하는 흙수저다.

흙수저라는 작명을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적에 주로 흙밭에서 놀면서 흙먼지도 많이 먹어서다.


할아버지가 큰 할아버지의 빚보증을 들어줬다가 집안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나는 보증을 절대 들어주지 않는다. 빚도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를 빼고는 무척 싫어한다. 레버리지 효과라는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적 내가 흙수저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다 겨우 오토바이를 타고 일하러 다니시는 아버지.


친한 친구를 아버지가 그 유명한 각 그랜저를 타고 학교로 와서 집으로 데려갈 때 부러웠다.


그래서 나의 두 번째 차는 그랜저였다.

아반떼를 타고 다니다 좋은 기회에 그랜저를 타게 되었을 때 어찌나 행복하던지. 가난이라는 한을 푼다는 것은 그런 것 같다.


재미있게도 아버지의 자전거나 오토바이 뒤에 탈 때 시원했던 것이, 친구 아버지의 각 그랜저를 보고 나서는 창피함으로 변했다.


내가 다가구 주택에 살 때, 친구 생일에 초대를 받아 가 본 친구 집은 아파트였다. 우리 집과 너무 비교되는 깨끗한 집.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죽어라 노력해서 어린 나이에 무리해서라도 아파트를 샀는지 모르겠다.


학교에서 집이 자가인지, 전세나 월세인지. 살림살이 세간은 무엇이 있는지 조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난이란 상대적으로 느낄 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하나.


그리고 동네 친한 친구들이 학원을 다닐 때 집안 사정 때문에 학원을 같이 다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눈물이 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아,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내가 공부하지 않으면 내 인생 x 되는 거구나. 중학교 때 이미 세상살이에 대해 많이 깨닫게 되었다.


헌책방에서 책을 사고, 선배들이 물려준 책. 그리고 선생님들이 협찬으로 받은 책을 선물해줄 때가 참 좋았다.

학원도 안 다니면서 열심히 하는 게 불쌍해 보이면서도 기특해 보였나 보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냥 죽어라 책 본다. 아침부터 밤까지. 누구보다 학교 도서관에서 늦게 자리를 떠났다.

집에 돌아와서도 새벽까지 공부했다. 그리고 주말에도.


그렇게 책들을 10번을 반복했다. 공부는 결국 예습, 복습인데 그게 너무 귀찮고 지겹기 때문에 다들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나는 그걸 다 참고 도저히 지겨워서 못 볼 때까지 보고, 너무 지겨우면 처음부터 보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부터 보았다.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이해가 될 때까지 고민했다. 정말 몇 날 며칠을 고민해도 안되면 공부 잘하는 친구나 선생님에게 물어보며 해결해 나갔다.


그러다 덜컥 반에서 1등을 해버렸다. 그때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다. 그때는 각 과목 점수를 발표했고, 종합 성적을 공개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100점인 내 성적이 공개되면 모두들 우와했다.

그러다 보니 시험이 끝나면 정답이 공개되기 전에 나에게 정답이 뭐냐고 물어보러 오는 지경이 되었다.


집이 다가구 월세다. 세간살이 있는 게 없다고 손 들 때의 창피함과는 완전 반대. 이래서 공부 잘하고 성공해서 돈 많이 벌어야 행복하다고 하는 건가.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새벽에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와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힘든 세상살이에 자식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셨을 거다.


하지만 그때는 학원도 못 보내주고 책도 제대로 못 사주시면서 공부까지 방해해? 누구도 내 인생을 방해하지 못해 하면서 아버지에게 반항했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들 거니까 제발 방해만 하지 마시라고.


그렇게 대학에 진학하고 집에서 나와 홀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놀기도 바쁘고, 공부도 하고, 알바도 하고, 미래도 걱정하다 보니 집에 연락조차 자주 하지 않았다.


하루는 삐삐에 아버지가 연락을 남기셨다.

공부하느라 고생 많고, 없는 부모 밑에서도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고 밥 잘 챙겨 먹으라고.


그때 처음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던 것 같다. 본인도 어려워진 집안 사정에 얼마나 힘드셨겠나. 자식들 공부도 제대로 시켜주지 못해 마음고생이 많으셨을 거다.




가난이 준 선물(?)은 악착같은 지구력과 고생을 해봐서 웬만한 여건은 잘 견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해도, 전 세계 오지 어디를 가도 살아남았고 좋지 않은 숙소를 가도 어릴 적 내가 살던 곳보다는 낫네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적응하며 할 일들을 해나갔다.


어머니가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해외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지만, 슬퍼할 겨를 없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만 생각했다.


어머니는 집안이 어렵다 보니 식당일, 학교 급식소 일도 하고 그러셨다. 그래서 무릎도 안 좋으시고 건강이 전체적으로 좋지 않으셨다. 뉴스를 통해 보는 급식소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들의 이야기가 나에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다.


해외에서도 정밀검사 및 수술을 빨리,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수소문했다. 그때도 공부 열심히 해서 괜찮은 대학 나와서 의사 친구들도 있고, 괜찮은 회사에서 돈도 벌고 도움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참 고맙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일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복귀할 수 없어서 결국 수술일에 곁을 지키지 못했고 동생이 어머니를 보살폈다.

이래서 애는 둘은 낳아야 하나.


다행히 수술이 잘 끝나고 병원비도 보험을 들어놓은 덕에 큰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옛날 말로 집안에 암환자가 있으면 아파트 한 채가 날아간다고 걱정하고 적금도 해약하나 하고 여러모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건 그야말로 옛날 얘기였다.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들어가셔서 회복을 하셨고, 나도 복귀해서 어머니를 뵙고 요양병원에서 나오실 때 모시러 갔다.


그때 어머니가 혹시 몰라 남겨 두셨던 유서를 읽어보고 마음이 찡했다.

집이 가난해서 잘 챙겨주지 못해 자식들에게 미안하다, 아버지에게는 없이도 서로 의지하며 같이 살아줘서 고맙다.

그런 얘기였는데 어머니도 힘들게 사시고 큰 병까지 얻으셔서 얼마나 사는 게 어려웠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머니도 다행히 관리를 잘하셔서 수술 후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잘 관리만 하면 괜찮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안도했다.

열심히 살아서 빚도 청산하고 깨끗한 아파트에서 좋은 차를 몰면서 큰 걱정 없이 살고 있어 다행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집에서 생선을 주문해서 회를 먹고 매운탕을 끓여 먹으며 역시 집에서 해 먹는 게 맛있다며 별 것 아닌 이야기를 갖고 즐겁게 웃으며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보며, 저렇게 앞으로 행복하게 건강하게 사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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