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제갈량 공명
184년 2월 20일, 작은 기와집. 학창의를 입고, 백우선을 들고 백우건을 쓴 한 서생이 앉아있었다. 서생의 방에는 차가운 불빛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불빛에 의존하며 아직은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는 서생. 그의 평소 성품을 알 수 있는 단출한 집. 그렇게 몇 권의 서책을 읽어 내려가던 서생은 눈의 피로함을 느끼며 책을 덮었다.
"오늘은 이만할까."
눈이 비비며 서생은 잠시 벽에 몸을 기대었다.
"천하는 어찌 되는 것인가."
낭사, 서주에 속한 군으로 그중에서도 작은 마을의 서생이었다. 작은 마을이라고 할지라도 황건적으로 천하가 뒤숭숭하다는 소식을 듣지 못할 리 없었을 터. 서생은 혼란스러운 천하를 걱정했다. 또한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창천, 오행에 따라 토를 의미하는 구호다. 이는 불의 기운을 가진 한의 운명이 다했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그 맥락이 끊어졌다고 하지만 400년 동안 이어온 통일 왕조다. 이번 황건적의 봉기로 그 운명이 다하지는 않겠지만, 이로서 난세가 들이닥칠 것이라는 것을 서생은 직감했다.
난세는 피와 혼란을 가져오고, 이를 수습할 새로운 영웅을 갈구한다. 지난 춘추전국시대 속에서 등장한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이 그러했으며, 초한대 전으로 유명한 항우와 유방이 그러했다. 왕망에 잠시 나라를 잃었으나 광무제가 출현하여 새로운 한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이제 그 한의 시대가 점차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천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깊은 혼돈에 빠질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그가 눈을 감고 사색에 잠기고 있을 때, 서주에서 문서일을 맡던 낭관이 서생을 찾았다.
"공명선생, 안에 계십니까."
그랬다. 서생의 이름은 제갈량, 자는 공명. 전한 시대의 제갈풍의 후예로, 아버지 제갈규는 군승을 지냈으나, 제갈량이 어렸을 적 사망하고 그는 동생 제갈균과 함께 이곳 낭사에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그런 제갈량을 오래 알고 지냈던 낭관 장범이 찾았다.
"문규가 아니신가. 어서 들어오시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장범, 자를 문규로 쓰는 이. 오랫동안 제갈량의 친우로 있던 이였다. 나이는 제갈량이 두어 살 위였고, 장범이 낭사 태수에게 제갈량을 추천했으나 제갈량이 매번 고사하고 있던 차였다.
"공명선생님, 태수께서 찾으십니다."
"혹 황건적이 들이닥쳤는가?"
평소 제갈량이 자신의 권유를 매번 무시하던 것으로 앙심을 품고 있던 낭사태수였다. 그런 태수가 자신을 찾는 것을 보고서 제갈량은 황건적이 코앞에 와있음을 직감했다.
"... 그렇습니다 선생. 이번에는 함께 해주셔야겠습니다."
"자네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바 아닐터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곳 낭사의 백성은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범의 말에 제갈량이 침묵했다. 아니, 반박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옳으리라. 낭사태수의 인물됨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매번 그의 요청을 거부해 왔으나 황건적의 침략은 제갈량을 이 청을 거절할 수 없게 했다.
"가세. 백성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내 거절하지 않겠네."
제갈량의 말에 장범의 표정은 밝으면서도 어두웠다. 그렇게 장범과 함께 낭사태수를 찾은 제갈량. 태수는 다짜고짜 그에게 막대한 권한을 약속했다.
"공명, 자네가 급히 종사를 맡아주어야겠네."
생각보다 더한 권한에 제갈량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는 병략에 어두우니 그대가 병권을 맡게."
"하오나...."
"진다면 관리들은 다 죽네. 그리고 백성들도 도륙당할 것이 아닌가. 나는 두렵네. 시간이 없으니 내 공명을 별가종사로 임명하여 전권을 위임하겠네."
제갈량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이를 물릴 수도 없었다. 침묵으로 긍정을 표시하니, 낭사태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외면할 수도 없었다. 제갈량은 급하게 낭사의 상황을 확인했다. 낭사에는 장교 25명, 병사 1천여 명이 고작이었다. 군기 또한 잡혀있지 않았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 역시 직접적으로 병력을 지휘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자신은 그저 풋내기 서생에 불과했다. 과연 제대로 된 지휘를 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제갈량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갈량의 명성이 서주에서는 제법 널리 알려져 있던 까닭에 그의 지휘에 반발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곧 적도들이 성에 당도할 것이오. 성문을 닫고, 조교를 올리고 방비를 빈틈없이 하셔야겠소. 외각의 백성들도 모조리 청아하여 성으로 들이시오."
제갈량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수를 냈다. 장교들과 병사들이 급하게 움직였다. 한나절이 지냈으나 아직 제대로 된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만큼 숙련도와 통제력이 처참했다. 공명이 백우선으로 머리를 짚으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때 -
수평선 너머로 황색 깃발이 나부꼈다. 준비가 채 되지 않은 상태로 황건 군이 성 앞 40리 밖에 접근한 것이었다. 적어도 족히 2만은 돼 보이는 군세였다. 장범이 급하게 민병 200명을 모았으나 전력에 큰 보탬이 되지 못하는데, 군세 차이마저 20배에 가까웠다. 비록 반군이고 민군(民軍)이라 하지만, 전국 각지의 관군을 격파하고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황건 군을 이 작은 성에서 막아낼 수 있을지 장담조차 할 수 없었다.
제갈량은 일단 장교들을 소집했다.
"군량과 비축된 무기, 거기에 병사들의 사기마저 저하되어 있소."
"........."
제갈량의 첫마디에 장교진들이 침묵했다. 평소 나름 병법에 밝다고 자부하는 장범마저도 이를 해결할 묘수가 없었다.
"우리는 개전의 승리가 필요하오. 그래야만 원병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소."
"최근에 받은 연통 중 연주에서 온 연통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별도의 독립부대가 창읍으로 온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연통은 넣었소?"
"우선 급한 대로 연통을 보내긴 했습니다만, 도착하는 시간과 그들의 진군속도를 감안했을 때, 여기까지 도착하는데 최소 닷새는 걸릴 것 같습니다."
이미 누군가의 지시를 받기 전에 독자적으로 의용군들의 정보를 파악하고 연통을 보내놓은 것을 보면 장범은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 그러나 장범은 희망을 이야기하면서도 끝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원군이 올 것인지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설사 원군이 온다고 하더라도 닷새라는 시간을 낭사군 단독으로 막아내야만 했다. 사실상 전력의 차이를 살펴보았을 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의용군의 숫자라고 해봐야 2천을 넘기기 힘들 것이다. 그들이 이곳에 함께 주둔한다 하더라도 이틀을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단독으로 닷새를 버티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억지로 맡았다고 하더라도 제갈량은 이곳을 지휘하는 지휘관이자 최종 결정권자였다. 최선을 수를 찾아야만 했다.
"낭사는 옹성이 있소. 이곳을 이용합시다."
"옹성...입니까"
"적이 몰려오면 옹성 안으로 유인하여 좁은 곳에서 대파해야만 하오. 성문 세 곳에 깃발을 무수히 꽂아 두시오. 이곳 옹성 서문에만 수를 적게 하여 적들을 유인해야 하오. 이후 매복한 군사로 하여금 궁시로 저들을 격파한다면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오."
옹성을 이용한 전략. 제갈량이 세울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었다. 이에 맞는 대비를 위해 장교들이 흩어졌을 때, 마보수 한 명이 급히 군영으로 뛰어들었다.
"태수님이 성문 밖을 빠져나갔습니다."
소식을 들은 제갈량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