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가장한 핑계

4. 상흔

by 시안

9년 만에 대학교 학부를 졸업했다.


학부는 고작 4년 과정이지만 그에 배가 되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며칠 전 학교 사이트에 뜬 ‘졸업이 승인되었습니다.’ 열 글자를 보고 눈물부터 비집고 나왔다.


집안에는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닌 친척이 있었다. 직계 친척도 아닐뿐더러 나와 세대도, 학과도 달랐기 때문에 비교 대상으로 삼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분은 조기졸업을 했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들어왔다. 사람은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지만 나의 속도는 너무나 느렸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도 느려터진 속도였다. 자책까지 할 만큼.




사람이란 어느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이다. 누군가는 인간이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인간들 중에서도 이타심을 발휘한다고 한다. 이기심과 이타심. 전자는 부정적으로, 후자는 긍정적으로 해석하지만 어디까지나 상황과 맥락에 따른 것이지 단어의 가치는 중립적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들이다. 이전 글에서 '사랑'이 그랬던 것처럼.

빠른 것과 느린 것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내가 겪었던 세상은 이타적이면 바보가 되는 거고 느리면 도태되는 곳이었다. 그 세상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단연코 부모였다. 어느 순간 그들의 지분은 점점 작아졌지만, 나의 뿌리, 성향, 가치관, 습관, 취향(사실 취향이라고 할 것이 없지만 이걸 없애버린 장본인이 그들이라 넣었다)은 모두 그들과 연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의 가장 큰 아픔이자 콤플렉스, 딜레마는 모두 그들이었다.

그렇게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으나 나는 그닥 좋은 자식이 되지는 못했다. 엇나가는 마음 때문에 남들보다 더 길고 큰 방황을 했고, 남들보다 더 깊은 상처를 주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은 그렇게까지 낭만적이지도, 이상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그들을 통해 배웠다.



나의 사랑이 끔찍했던 것처럼 그들의 사랑도 내게는 너무나 끔찍했다. 내가 사회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하게 키워준 이들이었지만 동시에 삶을 황폐하게 박살 낸 이들이었다. 거울을 보면 그들의 얼굴이 묻어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사람들. 아주 오래전부터, 아주 어릴 때부터 원래 있었던 것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이사를 한 후로는 내가 알던 ‘부모님’은 사라졌다. 물리적으로는 나를 떠난 적이 없었지만 그들이 나를 위해 학원을 보내고, 야단을 치고, 잔소리를 할 때마다 나는 아주 멀리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세상 밖으로 던져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인생은 부모가 없어져도 살아지지만 고통스러웠다. 인간의 본질적인 공허함과 외로움을 꽤 빨리 알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돌고 돌아 모든 것이 서로에게 기대어 기생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가장 편안하게, 한순간이라도 마음 놓고 기생할 수 있는 것이 핏줄이라고들 하는데. 그들이 얼마나 훌륭한 어른들이었는가 와는 별개로 나는 그들이 편안하지 않았다. 가족과 있는 시간이 가시방석 같았고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그들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장식품도 아닌, 구석에 있는 작은 먼지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9년 만에 졸업을 승인받았을 때, 너무나도 느리고 돌아왔지만 그것을 완주했을 때, 가장 축하받고 싶지만 유일하게 연락을 돌리지 않은 것이 가족이었다. 승인이 나기 불과 몇 주 전 그들이 ‘걔는 졸업을 언제 하려고 그러는지’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느려터진 자식을 걱정하는 그들의 말에 또 나는 아주 같잖은 것으로 기분이 나쁘고 상처받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예민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들이 하는 말에 상처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는 그게 너무 어려웠다. 그들을 너무 사랑했기에 그게 생각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관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이들. 그냥 났으니 가족이라는 말을 의식조차 해보지 않고 던지는 이들. 그들이 질색했던 것들에서 그들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을까. 결국 뒤돌면 있는 내가 가진 무언가를 질색하며 혐오했던 적도 많았다.


사회에 나오고 나서 말을 잘하고 겸손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들이 나에게 보여준 모습이었다. 내게 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뿐.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임에도 밖에서는 밖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는 모습이 화가 났다. 그래서 더 엇나갔을지도 모른다. 때때로는 알면서도 모진 말을 뱉어야 했던 그들을 이제는 이해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내게 내던진 말들은 죽어도 이해하지 못했기에 항상 머리에 힘을 주고 계산해서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소심하고 치졸하지만 그들이 내게 보여줬던 모습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센스 있는, 기분 좋은 말을 그들에게 들려주지 않았다. 내가 받았던 것에 반의 반도 안 되는 말들로 그들을 벅벅 긁었다. 그렇게 해서 긁혔으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한낱 사람이 다치고 죽어도 돌아가지만, 고작 사람 하나가 그 세상에 복수를 한다고 펄펄 뛰고 난리를 쳐도 세상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겉치레는 중요하지 않지만 체면은 중요한 것 같았다. 본인이 떳떳하면 그만이라는 말에서도 떳떳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아킬레스건과 딜레마가 핏줄인 것처럼, 언젠가는 그들에게 있어 가장 숨기고 싶어 한 판도라의 상자 속 카산드라가 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장 수치스러웠다. 어쩌면 때때로, 어쩌면 자주. 그들은 나를 아무 생각 없이 사랑했다. 나를 사랑하는 데 이유가 없었고, 생각도 없었다. 그에 반해 나는 당신들을 사랑해서 수도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붙였다. 언젠간 그들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사랑이란 ‘왜냐하면’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비록 내가 미운오리새끼여도, 저것이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했다. 겉돌아도 꼬박꼬박 그곳에 갔다. 소외되어도 꼬박꼬박 그곳에 갔다. 그럼에도 내 자리는 항상 투명했다. 있으나마나 비슷한. 어쩌면 내가 만든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나를 만든 것은 세상이었다. 아주아주 아쉬울 때만 내 자리가 있었고, 그마저도 내가 뛰쳐나가니 다른 용도로 쓰곤 했다.


그렇게 나는 카산드라도 되지 못한 채, 평범하지도 평범하지 않지도 않은 경계에 선 사람이 되었다. 부모라는 세상을 떠나고 나니 내 삶은 오롯이 황폐했다. 황폐해진 세상에 이것저것 끼워 넣어봤다. 자연은 타버린 들과 산에도 새 생명을 품지만, 나는 불안정한 인간이라 생명을 품지도 못했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증명했지만 내 세상에 더 이상 생존 이외의 무언가는 남지도 않았을뿐더러, 끊임없이 현재를 넘기기에 급급했기에 미래를 꿈꾸며 설계하는 것에 실패한 인간이 되었다.



끝끝내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많은 것을 인정했다. 내가 사회에서 한 사람 몫을 할 수는 있어도 나는 내 삶에 사람 구실을 못한다는 것을. 그래서 미래를 설계하고 나를 보호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어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 타인을 사랑하고 그를 인내하는 것을 잘 해내고 있지만, 부모라는 존재에게는 그 시도가 번번이 실패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한때 내 세상이었던 그들을 사랑하지만 떼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가장 기쁜 소식과 가장 나쁜 소식을, 그들은 가장 나중에 접하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라는 것을.


나는 나를 용서하는 것만큼 그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나의 졸업보다 훨씬 오랜 세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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