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별희> 후기

첫 번째 영화후기

by 시안


천카이거





1. 시작

왕가위의 <해피투게더>를 보았던 것이 3년 전 설날 무렵이었다. 왜인지 그 시기 장국영의 작품을 한 번쯤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찾아보다가 넷플릭스에 올라온 것을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뭐지?'의 연속이다가, 마침내 아휘가 떠나고 보영이 혼자 남아 울 때, 그제야 모든 것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사실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도 잘 보지 못한다. 특히 사색과 감정이 실린 영화라면 상흔이 커서 오래도록 곱씹는데, 곱씹을 때마다 새로운 염증-감정이 생기는 기분이랄까. 예민도가 높은 사람이라 그런지 꽤 고통스럽다. 그것이 나를 아주 많이 무너뜨리기 때문에 일상을 영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서는 불미스러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독서'와 '영화 감상'이라는 불미스러운 행위는 한때 사랑했으나 생존을 위해 버린 것들인데, 운명의 장난처럼 지금의 애인은 취미부자 작가이다.

<패왕별희> 역시 그의 꼬드김(?)에 넘어가 본 영화이다.








2. 감독

영화를 다 보고서 '천카이거 감독은 이 뒤로 모든 영화를 말아먹었겠군.'이라는 감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후에 찾아보면서 그 직감이 적중했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원래 어떤 스타일의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든, <패왕별희>의 원작을 얼마나 재구성했든 원작 스토리의 재현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훌륭한 스토리에 자신의 역량 이상을 보여줬다면 그 뒤는 암만해도 뻔할 것 같았다.








3. 주인공, 뎨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패왕별희>는 많은 퀴어에게도 사랑받은 작품이다. 작중 '뎨이'가 오랜 시간 우희를 연기하며 성정체성 및 지향성이 일반적이지 않은 순간들이 연출되고, 이것이 트랜스젠더 여성 혹은 남성 동성애자(게이)의 서사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혼란스러웠던'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자신에게 당연한 것, 확신하는 것을 혼란스러워할까? 그렇게 믿어온 것이 흔들리고 깨졌을 때 혼란스러워하지 않는가? '뎨이가 자신의 정체성과 지향성을 혼란스러워한다'는 해석은 어디까지나 비퀴어 혹은 외부의 시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퀴어물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직접 트랜스젠더 여성이라든지 게이라든지 하는 정체성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나는 그가 혼란스러워한 적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작중에서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경극에 미친 사람', '자신이 진심으로 우희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기에, 그것이 당연했기에 그는 자신의 감정을 확신하고 혼란스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오히려 뎨이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그의 정체성 혹은 지향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샬로를 향한 감정과 그를 둘러싼 상황이었을 것 같았다. 당연히 계속 샬로와 경극을 할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 연속되니 혼란스럽고 힘겨워하지 않았을까.







4. 어떠,한 사람, 샬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샬로가 좀 밉상인 것 이상으로 미워진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감정을 느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그가 경극에 재능이 없었는가? 아니다. 단순히 뎨이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는 충분히 재능도 있고 스타의 자질도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사랑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온전히 사랑하고 경극에 미칠 자신을 보이지 않는 그가 미웠다.

뎨이라는 인물 옆에서 샬로의 재능과 경극을 향한 애정은 모호해 보였다. 뎨이와 쥬산 사이에서의 관계 또한 모호했다. 관계라는 것이 결코 무를 썰 듯 정확히 나뉘는 것은 아니다만, 둘 사이에서 고민하고 휘둘리는 샬로는 결단이라고 내리는 행위들이 시원찮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시원찮은 그가 미웠다.

재능이 있는 것, 사랑하는 것, 사람과의 관계에서 모두 애매하게 굴던 그는 후반부로 갈수록 현실 그 자체에서조차 어중간한 줄다리기를 이어갔다. 본인이 후회할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뎨이와 쥬산을 동시에 버린다. 자신이 살기 위해 사랑하는 이들을 희생하는 그가 미웠다.


그러나 우리는 끝끝내 그를 미워할 수 없다. 그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가장 평범한 사람의 모습과 가까운 인물로 묘사된다. 사랑하는 것을 망설이고,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선택하고, 뒤늦게 후회도 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 우리는 과연 그보다 고결할까? 타협하기와 핑계대기를 더 많이 하는 순간도 있지 않을까? 나라고 그 순간에 그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세상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모든 사람, 어떤 사람, 한 사람을 그린 것이 샬로 아니었을까.






5. 사랑하는 쥬산

그녀를 생각하며 3일을 앓았다.

사실상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 진짜 주인공이라는 평가를 받아도 무방한 인물이다.

뎨이의 연적이자 샬로의 아내가 되는 여성.

으레 감상자는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기 때문에 쥬산의 등장이 얄밉게 느껴지는 이들도 많았을 것 같았다. 나 역시 순간적으로 그렇게 느끼기도 했으나, 그녀의 등장을 보자마자 느꼈다.


"저 사람이 뎨이에게 남을 유일한 이겠구나."


어쩌면 당연했다. '패왕(샬로)'의 곁에 있는 '우희(뎨이)', '샬로(패왕)'의 곁에 있는 '쥬산(우희)'. 위치가 동일하지 않은가? 패왕-샬로는 하나였고 우희의 위치는 둘이었기 때문에 연적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들의 위치와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서로뿐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뎨이와 쥬산은 지속적으로 애증 관계로 묘사된다. 주류 해석에서도 쥬산이 뎨이에게 모성을 느꼈고, 그래서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처럼 묘사된다고 하는 데 깊게 동의했다.


뎨이의 어머니와 쥬산 모두 창녀로 등장했다는 지점에서 그 해석이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창녀를 싫어하면서도 사랑한다. 그들을 천하게 여기지만, 그 하나하나의 서사를 서글프고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은 좋아하고, 그 서사를 비춰주면 안타깝게 여기며 연민한다. 한편으로는 창녀가 아주 당연한 욕망-안정적인 삶, 금전적인 풍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삶을 원한다면 속물적이라고 손가락질한다. 쥬산은 그려놓은 듯한 "전형적인 창녀"였다. 욕망을 가지고 샬로와 결혼했지만, 쥬산만의 서사를 쌓아가며 서글프고 아름답고 비참해진다.


뎨이 역시 이 '창녀 쥬산'을 싫어했으나, 결국 본인도 창녀의 삶을 살았다. 경극으로 성공하기 위해, 경극을 지키기 위해, 경극을 부흥시키기 위해 자신을 팔았다. 본질적으로 쥬산과 다를 바가 없었다. "창녀가 창녀를 혐오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서사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설득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반대 또한 명확히 제시한다. '창녀 연대는 실존하는가?'

문화 대혁명이 닥치고 자아 비판 중 샬로는 뎨이의 행적을 '폭로'한다. 뎨이가 창녀의 삶을 산 이유는 스스로를 위해서도 있었지만 샬로 때문도 있었다. 희생을 수치로 만드는 최악의 상처를 주는 순간, 샬로를 막은 것은 극단의 동료들도, 뎨이 자신도 아닌 쥬산뿐이었다. ...

초반의 예상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우희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은 패왕이 아니라 또 다른 우희였다.






6. 결말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초패왕의 해하가에 우희는 답가를 부르고 자결했다. (초한지 기준)


大王義氣 대왕의 의기가 다 했으니

賤妾何生! 천첩이 어찌 살겠습니까!


무너진 샬로를 보고 쥬산은 '목'을 매어 자살한다. 경극에서 칼춤을 추던 우희가 칼로 '목'을 베어 자결한 점과 결말에서 뎨이가 자살한 듯한 묘사를 비교한다면 연결점이 있다.


자살을 낭만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죽음이 과연 비극인가? 정말 이 영화가 새드 엔딩인가?

자신의 무언가가 끝나는 순간을 직접 결정하는 것이 그들에게 불행이었을까.

쥬산은 더 이상 불행하고 싶지 않아 자살했다면, 뎨이는 이 이상 행복을 꿈꿀 수 없어서 자살한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샬로는 편안한 표정으로 도즈(뎨이의 아명)를 부른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그 결말을 슬프게만 보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마침표를 찍은 셈이었으니.








7. <패왕별희> 한 줄 평

:

효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