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뇌
감정을 습득하는 것이 프로파간다일 수 있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도 선동당했다.
대학은 스무 살에 들어갔으나,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한 것이 스물다섯 살이었다. 내가 지금까지도 존경하는 교수님의 수업을 처음 들었을 때, 그가 첫 수업에서 한 말은 꽤 충격적이었다.
"애국심은 국가의 세뇌이다."
이렇게만 보면 무슨 음모론 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맥락을 들어보면 납득이 갔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교육 체계, 교육 과정을 들여다보면 선별적으로 들어가 있는 내용들이 있다.
아주 단편적으로 국어 교과서에 실리는 근대 문학 작품들을 예로 들어보겠다.
한국에서 교육 과정을 거친 이들이라면 윤동주, 한용운, 이육사 등을 모를 리가 없다. 한용운과 이육사는 독립투사였고, 윤동주의 경우 독립투사냐 아니냐를 두고 평가가 갈린다만 확실한 것은 조선인, 망국의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본인이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반성하고 참회한다. 물론 이외에도 교육 과정에 등장하는 작품은 다양하고, 시인 역시 다양하지만 고정된 이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립을 떠올리게 하는 이들의 시를 필수적으로 넣어두는 이유가 무엇일까?
소설 또한 그렇다. 중고등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배우는 근대 소설은 대부분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며, 작품의 결 또한 유사하다. 1)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비참한 민중(조선인)의 삶, 2) 그와 대비하여 일제에 붙어 친일 하는 이들을 향한 비판.
과연 그 시대 속에 비참한 조선인, 친일파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만 존재했을까? 아닐 것이다. 왜 이러한 이야기를 위주로 담았을까?
현대시까지 연장을 가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비교적 근대에 비해 다양한 주제가 실리지만, 그럼에도 노동 시는 노동 시로써 해석되지 않는다. 한국 현대사의 민주 투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결 중 하나가 노동 투쟁이고, 그 속에서 나온 시를 다루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국가가 어떠한 프로파간다를 유도하는지 관측할 수 있다.
각설하고, 교수님의 의도는 우리가 '애국심'에 치우쳐 친일 문학을 '매국노의 것'으로만 치부하지 않도록 한 말씀이었다. 그 애국심이 어디에서 나왔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감정을 떼어놓고 작품을 평가하며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길 바란 것이다.
그의 의도는 읽었으나 나는 혼란스러웠다. 당연히 내가 가지는 감정인데도 그게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 교수님께 찾아가 여쭤보았다.
교수님, 오랫동안 고민한 결과 '의도된 애국심'을 떼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곳에 태어나 한국인으로 산 것이 순전히 우연임을 안다고 해도, 제가 살던 곳과 마주하던 것, 그런 모든 것이 우연히 한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 나라가 너무너무 싫다고 해도, 여전히 저는 제 나라를 사랑합니다. 그게 너무 이상하고요. 이건 왜 그런 걸까요?
오랫동안 고민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지.
부모님이 주었던 사랑은 꽤 많은 경우 상처와 폭력으로 다가왔다. 내가 생각한 진정한 사랑을 누군가에게 행할 때도 때때로 거대한 상흔이 되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을 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나는, 또 누군가는,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대체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세간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
몇 년이 지나고서 어느 날 교수님의 대답이 떠올랐다.
네가 사랑하는 이유는 너만 알 수 있어.
사랑하는 것에 이유가 있었나? 이유가 있으면 사랑인가? 이유가 있으면 사랑이 아닌가?
부모가 믿었던, 내가 믿었던, 사람들이 믿었던 진정한 사랑은 모두 프로파간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사람은 배경과 매체를 통해 사랑을 습득한다. 자신이 배운 것을 나와 타인에게 행하고, 다른 누군가는 사랑의 방식을 습득한다. 그러나 모든 프로파간다가 가짜일까? 그 사랑이 모두 가짜고 잘못된 것일까?
사실 모든 사랑은 진짜인 거 아닐까?
그럼 왜 사람들은 서로 사랑함에도 상처받는 걸까? 방법이 잘못되어서? 각자에게 맞는 방법이 달라서?
그리고 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아름다운 감정이라는 것도 결국 사람들의 말 아닌가?
사랑은 파괴적이고, 분노, 슬픔, 절망 등을 안겨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감정으로 포장된다.
흔한 말이지만,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나면 더 이상 흔하지 않다.
헤어지자는 말에 연인을 살해한 수많은 범죄자, 사랑한다는 말로 행해진 데이트 폭력, 신의 사랑을 믿는 사이비, 자식을 너무 사랑하고 걱정해서 학원을 열댓 개씩 돌리거나 패버리는 부모 등도 전부 진짜 사랑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저런 경우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 진정한 사랑은 누구도 해치지 않는 것일까? 누가 그 마음만이 진짜라고 판단하고 정의할 수 있을까?
결국 사람들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은 일반성, 대중, 법이 허용하는 '정상적인 사랑'만 해당되는 것이다. 해악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의 사랑 말이다.
해악을 끼치는 이들의 마음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딱히 그 마음을 이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세상에 그런 사랑도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해가 아닌 납득이었다. 세상에는 비틀리고 추악한 것도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그런 존재가 굉장히 많은 것이 세상이니까.
그러나 이해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불편한 렌즈를 낀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정상적이지 않는 사랑의 결과 따위를 보고 '저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분노하는 것이 어느 순간 힘겨워졌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쳐도,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알아보아야 되는 것은 필요하다. 해악적 사랑의 존재를 인정하자는 것이지 그것을 처벌하지 않거나 절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악인에게 서사가 필요없다'면, 악인이 생기는 구석을 예방할 수 없다.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도 없다. 악인의 서사를 연구하고 누군가 그 서사를 밟지 않도록 붙잡아야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우리는 더 이상 진정하지 않은 사랑에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게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