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확성기
우울증은 왜 우울증일까?
우울증은 대개 우울한 감정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병세가 악화된다.
우울한 감정은 누구나 느낀다. 한국에서 가장 흔한 위로 중 하나가 '다들 그러고 살아'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병으로 안고 살고 누군가는 단기적 시기 정도로 치부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울증을 가진 사람에게는 꽤 단순한 프로세스가 찾아오고, 곧 그것이 자리 잡는다.
나는 20대 후반이지만 우울증을 진단받은 지는 14년 정도 되었다.
우울증 말고도 다른 정신 질환이 있지만, 현재 내가 가진 질환의 증상 중 대부분이 만성적인 우울과 연결되어 있다.
이따금씩 만성적인 우울의 시기를 겪었지만 근 몇 년 간은 꽤 명랑하게 살고 있다.
기독교 용어이기는 하다만, 이번 글에서는 간증을 하고 싶다.
자기 암시에 대한 간증이다.
누구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온다.
그러나 이 고통의 끝이 어딘지 모른다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절망할 수밖에 없다.
절망한 사람은 서서히 죽어간다. 원동력을 빼앗기고, 다양한 면에서 조금씩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망가뜨린다.
그리고 그것이 장기간 지속되면 위에서 말했던 '단순한 프로세스'가 찾아온다. 바로 모든 결론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내가 실수를 했을 때 가장 이상적인 프로세스는 무엇일까?
실수를 인정하고, 원인을 분석하고, 상황에 맞게 수습하고, 반복을 막는 것이다.
그러나 절망한 사람에게 이 모든 프로세스를 행할 수 있는 힘이 있을까?
한 번이라도 우울증 근처에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알 수도 있다.
저 한 줄로 정리되는 프로세스가 죽을 만큼 힘들다.
그렇기에 아주 빠르고 간단한 결론을 내린다.
'죽을 만큼 힘드니 그냥 죽는 게 낫겠군.'
꽤 섬뜩한 결론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나 나약해진 사람은 세상에 꽤 많이 존재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간의 생존 본능은 굉장히 강력하기 때문에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음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프로세스는 그들 입장에서 꽤 그럴듯하고, 어떨 때는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문제가 왜 생겼는가?'를 따지고 본다면, 문제를 만든 주체인 '나' 때문이다.
그럼 '나'가 이런 문제를 더 이상 만들지 않기 위해 원초적으로 '나'의 존재를 모든 것에서 차단하는 것이다.
'나'를 세상으로부터 차단하려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우울증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저딴 생각을 왜 하냐고 할 수도 있다.
어떻게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는지, 밖에 나가서 운동도 하고 햇빛도 보면 좀 나아지는데 왜 그걸 못하는지,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애석하게도 저딴 생각과 저딴 프로세스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외부 자극에 취약한 사람, 스트레스 관리가 미숙한 사람, 선천적으로 예민한 사람 등등
억울하지만 우울증에 취약하게 태어나는 이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애초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신화를 창조하는 생물이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고난이 연속되는 경험을 해보았다.
그들은 고난이 왜 연속되어 일어나는지 이해하려다가 결국 본인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따지면 어떠한 인과도 없는데도. (종교적인 관점도 있겠지만 지금은 제외한다)
굳이 설명하자면, 좌절로 자신감이 결여된 사람에게 실수가 잦아질 것이다.
그러나 자기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에게는 아주아주 작은 실수도 확대되어 비춰진다.
난 왜 이렇게 실수를 많이 할까. 왜 이렇게 무능할까. 내가 등신이라 그렇지. 내가 죽어야 되지. 내가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나겠지.
이런 생각의 연속이다.
만약 남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은 정말 기분 나쁘고 고통스럽지 않을까?
우울의 뫼비우스에 빠진 이들은 이것이 시도 때도 없이 매일매일 재생되는 셈이다.
당연히 이러한 프로세스는 힘들더라도 훈련으로 바꿀 수 있다.
글의 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말의 힘 또한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장시간 약물 치료만 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고, 그러던 차에 개인 상담을 병행했다.
벌써 4년 전 일이다.
그 당시 이미 하루에 먹는 약만 두 자릿수가 넘어갔다.
그럼에도 만성적인 우울감을 동반한 다양한 충동과 불면증 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상담사를 얼마나 자주 만났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1-2주에 1회 정도였던 것 같다.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에 따라 조금씩 말이 달라지긴 했어도 그는 만날 때마다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했다.
별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너는 똑똑한 사람이야. 그러니 네가 할 일을 잘 알고 있을 거고, 그대로만 하면 돼."
대충 이런 식이었다. 나는 잘 해낼 거라는 어마무시하게 낙관적인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웃게 되는 양가감정을 가졌다.
그렇게 몇 달간 암시가 반복됐다.
나는 그 해 내가 초, 중, 고, 대학을 통틀어 가장 훌륭한 성적을 받았다.
이전에는 F가 하나씩 껴있어서 휴학 전에 학사경고까지 받았던 사람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두 자릿수를 넘어가던 약은 한 자릿수로, 서너 개로 줄어들었다.
지금은 아예 정신과 약을 졸업했다.
글을 배우고 쓰면서도 말의 힘을 과소평가하다가 크게 혼쭐났던 경험이었다.
물론 상담사의 역할도 크고, 약을 꾸준히 복용한 것도 있지만,
사고의 결론에서 '죽음'을 빼놓고 생각하자 힘들고 하기 싫어도 해내게 되었다.
이 뫼비우스의 띠는 삼박자가 잘 갖춰졌을 때 비로소 달라졌다.
비록 힘든 시기가 몇 달간 지속된다면 프로세스가 회귀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시기를 버티면 곧잘 정상적으로 사고하게 됐다.
혹여 이 글을 보고 있을 세상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얘기해주고 싶다.
우리는 생각보다 엉망이 아니다.
아, 그래, 엉망일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그냥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했으면 좋겠다.
아주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하루에 꼬박꼬박 자기 자신에게 잘 잤어? 수고했다. 잘 자. 정도의 인사를 해준다든지.
일어나자마자 세수를 하고 물을 마시러 간다든지. (이거 진짜 힘들다. 기상 후 핸드폰만 몇 시간 붙잡고 있는 거 안다.)
주변인들에게 효율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말들 위주로 귀 기울이고,
스스로를 많이 칭찬해주었으면 한다.
낯간지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가장 오랜 전우는 당신이니까, 그런 당신을 너무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누구나 충분히 변할 수 있으니까,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세상 어딘가의 누군가가 아주아주 작은 응원을 보낸다.
-시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