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것을 돌려받고 싶어요. ?

1. 탄식

by 시안

20대 후반에 들어섰다.

2년 대학 생활, 3년 휴학 생활, 다시 2년 반의 복학 생활을 마치고, 졸업도 전에 취직에 성공했다.

그렇게 겨울 무렵,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흔한 취미나 취향도, 정말 하다못해 좋아하는 음식이나 색깔조차도.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달려온 사람의 결말이었다.

세상을 인지하고 오로지 '1인분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온 결과.


상담 선생님은 나에게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투자하라고 말했다.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정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덕질'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적어도 시도해 본 것에 한해서는.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에 절망을 느꼈다.

삶의 원동력이 될 만한 것이 없다는 게 큰 수치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렸다.

내가 좋아했고, 사랑했고, 내 인생에서 뺄 수 없는 무언가를 꼽으라면 한국의 근대 문학작품과 (문학적) 글쓰기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대학 입시와 연관되면서부터는 그마저도 사랑할 수도 없었다.

'정답'이 존재하기 때문에 '오답'도 존재하고, 그래서 틀리면 혼나는 게 끔찍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들을 덮어두었고, 볼 수조차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돌아다녔던 한 프로그램의 캡처본이 떠올랐다.

인터뷰이(interviewee)는 한때 자신이 너무너무 사랑했고, 열정을 쏟았고, 자신의 삶 그 자체였던 일을 들춰보지 못한다는 말을 했다.

제작진이 여전히 좋아하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말했고, 그럼 취미로라도 괜찮지 않냐는 말에 들춰보면 아파서 그러지 못하겠다는 대답했다.

그는 울었다.

오래전에 본 것이라 그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고작 캡처 이미지 속에서도 그의 슬픔은 따갑게 전해진다.

따갑게 전해진 슬픔은-그것이 내가 되었다.


지독한 ADHD를 앓으며 조금이라도 긴 문장을 읽지 못했던, 난독증을 가졌던 시기가 있다.

약물 치료와 상담을 통해 ADHD가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 난독증은 비겁한 핑곗거리가 되었다.

국문과에 들어가 과제로 작품을 읽을 때, 근무하면서 업무로 작품을 읽을 때는 그냥 읽혔다.

누군가 시킨다면 묵묵히 읽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떤 서적도 들춰볼 수 없었다.

들췄을 때 또 글자가 둥둥 떠 보인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보면 아프고, 보면 욕심이 나서 덮고 또 덮었다.

사실은 너무도 사랑해서 보고 싶은데도.




핑계와 명분을 찾으려 애쓰는 삶의 연속을 살았다.

그래서 인생의 목표였던 대입에 성공했을 때,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것을 외면하지 않기 위한 핑계로 전공을 바꿨다.

취직은 어떻게 할 거냐, 상의는 하고 바꿨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어도 견딜 수 있었다.

사랑했던 것을 '또' 성적으로 매기면 적어도 외면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인생에 두고 싶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누구도 내게 성적을 매기지 않는다.

오로지 나만이 남아있다.

그것들은 나에게 온 적도 없었지만, 나를 떠난 적도 없었다.

지금껏 내가 써온 것, 내가 쓰는 이 글, 앞으로 쓸 모든 것들이 국문과로서도 작가로서도 썩 훌륭한 글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의로 독서라는 것을 한 것이 10년이 넘었다는 지점에서는 생각보다 괜찮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의로 단 한 글자로 읽지 않은 채 써온 시와 소설을 누군가는 좋아했고, 누군가는 칭송했고, 누군가는 재능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상투적이고 진부한 말을 뼛속까지 기억함에도, 나는 아주 어린 날의 나에게 묻는다.

너는 그것들을 왜 사랑했니, 너는 그것들을 왜 쓰고 싶니, 네가 말하고 싶은 건 뭐니,

그리고 너는 무엇을 하고 싶니, ...


오늘도 완결하지 못한 단말마가 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