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10]여호사밧의 수상한 '오빌' 항해

Bottomry와 고대 해상금융

by 이근엽

여호사밧의 오빌 항해와 예언자의 경고


다윗으로부터 통일 왕국을 물려받은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었다.


이후 아시리아에 의해 북왕국이 멸망하기 전까지의 시기를 일반적으로 남북국 시대라고 부른다. 성경은 이 시기의 역사를 열왕기와 역대기를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각 왕의 정치적 행보와 종교적 평가가 교차하며 서술된다.


그 기록들 가운데 성경의 흐름 속에서 다소 의외로 보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에시온게벨에서 선박을 건조하고, 오빌과 금을 거래하기 위한 장거리 해상 무역 프로젝트를 추진했다는 이야기다.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배들을 만들어 오빌로 금을 얻으러 보내려 하였으나, 그 배들이 에시온게벨에서 파선되었으므로 가지 못하였다.

그때 아하시야가 여호사밧에게 말하기를 ‘내 종들을 왕의 종들과 함께 배에 태워 보내게 하라’ 하였으나, 여호사밧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열왕기상 22:48–49)


“그 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더불어 동맹하였으니…
두 왕이 함께 다시스로 갈 배들을 만들었는데, 에시온게벨에서 만들었더니…
엘리에셀이 예언하여 말하기를 ‘왕이 아하시야와 연합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일을 무너뜨리셨다’ 하니, 이에 그 배들이 파선하여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
(역대하 20:35–37)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남유다의 왕 여호사밧은 처음에 북이스라엘의 아하시야 왕과 함께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건조한 후 오빌과 금을 거래하는 해상 무역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배가 파선하여 첫 프로젝트가 실패했고, 다시 추진하는 과정에서 예언자 엘리에셀의 경고를 받아들여 이번에는 남유다 단독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에시온게벨과 오빌이 어느 지역인지 궁금해지다가도, 곧 남유다의 해상 무역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기에 성경이 이를 기록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또한 예언자가 종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무역 거래에 대해 신의 뜻을 내세우며 비판까지 했다는 점 역시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이번 글은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고대 세계의 원거리 항해


홍해 북단, 오늘날 아카바 만 인근에 위치한 항구로 추정되는 에시온게벨은 단순한 항구가 아니라 솔로몬 시대부터 내려온 '국가 전략 물류 기지'였다.


내륙에 자리한 유다 왕국이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통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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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항구에서 배를 띄우면 홍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아라비아 남부, 동아프리카 연안, 그리고 더 먼 바다로 이어지는 항로에 닿는다.


성경이 말하는 오빌은 바로 그러한 원거리 항해의 목적지로 등장한다.


오빌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 지역, 특히 오늘날 소말리아와 인근 연안이나 건너편 오늘날의 남예멘 등이 유력한 후보로 언급된다.


SE-ebd1f26b-88c6-49ee-8144-98d0cc7d2965.png?type=w773 오늘날 남예맨의 남서부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빌의 위치


이 지역은 고대부터 아라비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인도양 세계를 연결하는 교역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향료, 금, 상아와 같은 물품이 이 일대를 통해 이동했고, 항해자들은 계절풍을 이용해 홍해와 인도양을 오갔다.


이와 유사한 장면은 고대 세계 여러 지역에서 확인된다.


이집트의 경우, 홍해 연안의 와디 가와시스(Wadi Gawasis)는 중왕국 시기 이집트가 바다로 나가기 위해 사용했던 항만 기지였다.

SE-b7c2d866-13a4-11f1-9776-0748697d2b0d.jpg?type=w773 가와시스 위치


이곳에서는 선박 부재, 닻돌, 로프 조각, 저장 시설 흔적이 발견되었다. 항해가 끝난 뒤 선박을 해체해 보관하거나 재조립했던 흔적도 확인된다.


이는 원정이 일회적 모험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운영된 국가 프로젝트였음을 보여준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라가시의 통치자 구데아(Gudea)의 원통(cylinder) 비문에 외부 지역에서 목재가 배에 실려 도착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니푸르(Nippur)와 우르(Ur)에서 발견된 토판 문서에도 딜문(Dilmun)과 멜루하에서 온 배가 언급된다. 특정 지역과 배가 함께 반복 등장한다는 것은 이미 고정된 해상 경로가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지중해 세계에서도 이러한 항로는 더욱 분명하다.


레반트 연안의 티레(Tyre, 성경의 두로)와 시돈(Sidon) 같은 도시들은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동지중해를 건너 키프로스, 아나톨리아, 이집트, 에게해 지역과 연결되었다.

키프로스는 구리 산지였고, 아나톨리아에서는 주석이 공급되었다.

이 두 금속은 청동 제작에 필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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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루부룬(Uluburun) 난파선은 이러한 항로의 단면을 보여준다.

터키 남부 해안 인근에서 발견된 이 선박에는 키프로스산 구리 잉곳 수백 개와 주석, 유리 원료, 상아 등이 실려 있었다.

900%EF%BC%BFKW1194.jpg?type=w773 난파선의 유물들
900%EF%BC%BF11a413b57411b72b75bcf37bfe49cbf0%EF%BC%8D1.png?type=w773 울루부룬 난파선 발견 지점(X자 표시)


동지중해 여러 지역의 물자가 한 번의 항해에 묶여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해, 자본 그리고 신뢰


홍해든 지중해든, 조선과 항해 기술이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의 원거리 항해는 현대의 항해와는 사뭇 달랐다.


동력을 돛에 의존하는 배는 계절풍이 부는 시기에 맞춰 출항 시기가 정해졌고, 그 시기를 놓치면 항해 자체가 중단되거나 항구에 발이 묶였다.


물리적 위험도 상수였다. 암초와 폭풍, 항해 도중의 보급 문제는 물론 해로에서는 해적의 약탈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폭풍우로 배가 파선하면 단순히 물건이 파손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 실려 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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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장기간 항해를 준비하고 선박을 유지하며 먼 지역과 연결되는 항로를 운영하려면 상당한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항해와 교역은 점차 전문화된 영역으로 자리 잡았고, 실제 항해에 나서는 상인과 선원들은 특정 항로와 계절풍의 변화, 먼 지역의 관습과 시장 상황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한편, 항해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배와 선원을 확보하는 어려움과 별도로, 해상 무역의 물품과 규모를 고려하면 거래 물품 자체를 마련하는 데에도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이는 개인 차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였기 때문에, 왕이나 국가가 직접 자원을 투입하기도 했고, 민간에서는 여러 사람이 은이나 물자를 모아 전문 상인을 고용하거나 상인이 주도하는 교역 사업에 자금을 빌려주기도 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중요한 문제가 떠올랐다.


항해 교역에 필요한 자금이나 물자를 제공하는 쪽과 항해와 교역에 전문 기술을 가진 상인 사이에서, 성공과 실패에 따라 손실과 이익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실제로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토판 기록에는, 자금(예컨대 1미나*)을 제공한 자와 항해 수행자인 상인 사이에서 무역 후 이익을 나누는 비율을 정한 내용이 등장한다.


※ ‘미나(mina, 아카드어 manû)’는 고대 근동에서 사용된 무게 및 화폐 단위로, 일반적으로 1미나는 60세겔(shekel)에 해당하며 은 약 0.5kg 전후의 무게로 이해된다. 메소포타미아 상업 토판 문서에서는 자금 단위로 자주 등장한다. 참고로 고전기 아테네에서는 1미나가 100드라크마에 해당했으며, 이를 기준으로 보면 상당한 규모의 자금 단위였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강도나 해상 재난과 같은 불가항력적 사고로 실패했을 경우에는 자금 제공자가 손실을 감수하지만, 고의나 과실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상인이 책임을 부담한다는 조항도 확인된다.


아시리아 상거래 식민지인 카룸(Karum) 가운데 대표적 도시인 카니시(Kanesh)에서 발견된 토판 편지에는, 육상(caravan)이나 해상 무역을 위해 여러 사람이 자금을 모아 상인에게 맡기는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f11647%EF%BC%BFc91d54f83d8c424fb53a914e6c37b6dbmv2.png?type=w773 카니시에서 발견된 토판


이러한 거래를 'bag'이라는 뜻의 나루꾸움(naruqqum)이라 하며, 투자 비율과 수익 배분 비율이 계약 문서에 기록되어 있고 손실이 입증되면 상인의 책임이 면제된다는 내용이 생생하게 등장한다.


우가릿(Ugarit)에서 발견된 토판에는 ‘바다와 연결된 대출(Maritime Loan)’ 이야기가 등장한다.


Ugarit%EF%BC%8DHittite%EF%BC%8DKing%EF%BC%8DLetter%EF%BC%8DLegal%EF%BC%8DText%EF%BC%8DCombo.jpg?type=w773 해상대출 이야기가 기록된 우가릿 토판


특히 항해 중 화물이 일부 손실된 경우, 손실 규모를 계량하여 대출자와 상인 사이의 책임을 비례적으로 조정하는 사례가 눈에 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다.


교역을 위해 상인을 고용하거나 자금을 맡긴 이후, 바다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확인(audit)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역사 기록은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아시리아의 카니시에서 발견된 상업 문서들(토판)에는 가족과 동업자 사이에 오간 편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놀랄 만큼 현실적이다.


“왜 아직 정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맡겼는가”,

“지금 그 자금은 어디에 묶여 있는가


항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보 비대칭은 인간관계의 긴장으로 드러난다.


항해를 떠난 상인(agent)은 도난이나 사고를 언급하고, 자금을 제공한 쪽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항해 동행자, 현지 상인, 운송 경로에서 접촉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상인의 보고 내용을 확인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에서 발견된 문서, 즉 함무라비 법전에는 항해 중 강도나 난파로 손실이 발생했다는 대리인(상인) 보고에 대해, 그 사실에 대한 입증 의무를 정한 조항이 등장한다.


"만약 대리인이 길을 가던 중 적(강도)이 그가 소지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면, 그 대리인은 신의 이름으로 맹세(입증)해야 하며, 그러면 그는 모든 책임에서 면제된다."


마지막으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해상 교역을 위한 대출(nautikon daneion, 해상대출)이 일반 대출과 다른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계약은 보통 ‘지정된 항해가 무사히 끝나 특정 항구에 도착할 것’을 상환 조건(Risicum Pretium)으로 하되, 2~3개월의 항해 기간 동안 20~30%의 높은 이자를 약정했다. 그리고 보통 배 자체(Hull)나 적재된 화물(Cargo)이 담보가 되었다


항해가 실패하면 채권자가 원리금 상환을 청구하지 못하는 그리스의 거래 관행은, 데모스테네스의 상사 재판 변론문 『라크리토스 고발(Against Lacritus)』에 잘 드러나 있다.


900%EF%BC%BFDemosthenesDemosthenousLogoiEklektoi1755%EF%BC%BFTitle.jpg?type=w773 데모스테네스의 변론문

Bottomry — 항해의 성패에 묶인 계약


앞서 살펴본,

손실 원인에 따라 책임을 달리 정한 메소포타미아의 토판 기록, 카니쉬의 나루꾸움 공동 투자 기록, 우가릿과 고대 그리스의 해상 대출 계약은 서로 다른 지역의 기록이지만 모두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규모 원거리 교역에서 '실패의 책임을 누구에게 귀속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이 흐름은 로마 시대에도 이어지며, 항해의 성패에 따라 채무의 운명이 달라지는 거래 형태인 파에누스 나우티쿰(foenus nauticum 또는 pecunia traiecticia)로 더욱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거래 관행은 후대에 '모험대차(Bottomry)'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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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ttomry는 채권자가 배의 '선체(Bottom)'를 담보로 잡고, 파선 등 항해 실패의 경우 채무가 면제되는 대신 성공하면 고율의 이자를 받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항해가 성공하면 채권자는 높은 수익을 얻었지만, 난파나 약탈로 화물이 사라지면 손실 역시 그대로 떠안아야 했다


대표적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딴 북아프리카의 위대한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곡물을 운송하기 위한 항해가 주로 거론된다. 제국의 식량 공급과 직결된 거대한 사업으로, 매 항해 때마다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했다.


폭풍과 해적의 위험을 뚫고 지중해를 왕복하는 이 장거리 교역에 대하여 자금을 대출한 자들은, 항해가 무사히 끝났을 때만 원금과 함께 높은 이자를 실제 상환을 받을 수 있었다.


yU86GZCeOysi2dN-NbYgXe_2KUQ5XbUOMZ__EIlaahU.jpg?type=w773 배에 곡물을 싣는 장면이 새겨진 벽화


한편, 『유스티니아누스 법전(그 중 학설휘찬Digest)』은, 돈을 빌려준 자가 항해의 위험을 대신 부담하는 해상 대금(Pecunia Traiecticia)에 관하여 규정하면서,

일반적 대출에 적용되던 이자 제한(연 6%)의 예외를 인정하여 연 12%까지 이자를 받는 것을 허용하였다.


3_Justinian_CorpusIurisCivilis_Digest__ca1325__page02_.jpg?type=w773 Justinian, Corpus iuris civilis (“Digest”)


실례로, 원로원 멤버였던 키케로(Cicero)는 친구 아티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출을 주된 수익원으로 삼았던 로마의 상류층 인사들이 일반 대출보다 해상 대출에서 높은 이자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항해의 위험이 곧 금융 조건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처럼 Bottomry는 형식상으로는 대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 계약의 핵심은 항해라는 불확실한 사업에서 실패 위험을 어떻게 나누어 부담할 것인가에 있었다.


항해가 실패하면 채권자는 손실을 그대로 떠안게 되고, 항해가 성공했을 때에만 높은 이자를 통해 보상을 받는다. 반대로 실제 항해를 수행하는 상인은 특정 해상 위험이 현실화되었을 경우 무제한적인 채무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한 채권 이전이라기보다, 사업 실패 위험을 계약 구조 속에서 분담하도록 만든 방식이었다.


이러한 구조는 오늘날의 금융에서도 낯설지 않다.


현대의 비소구(non-recourse) 금융이나 프로젝트 파이낸스에서는 특정 사업을 중심으로 책임 범위를 제한하고, 사업 실패 시 위험이 참여자 전체의 재산으로 무제한 확장되지 않도록 설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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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보험, option, 책임 제한 구조, 구조화 금융 등 다양한 현대 금융 장치 역시 불확실한 사업에서 위험을 분할하고 관리하려는 시도 속에서 발전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bottomry는 단순히 오래된 금융 기법이라기보다, 모험적이고 불확실한 사업에서 책임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이미 고대 세계가 진지하게 다루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나아가 항해의 위험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는, 단지 상인과 채권자 사이의 계약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국가가 직접 나서는 해상 사업에서도, 그 위험을 누구와 함께 감당할 것인가 하는 선택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여호사밧의 선택 — 공동 위험인가, 단독 부담인가


이제 다시 여호사밧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열왕기상과 역대하의 기록을 다시 읽어보면, 여호사밧이 처음에 아하시야와 함께 진행한 오빌 향 항해 무역 사업은, 홍해를 따라 남하하여 오빌로 향하는 짧은 연안 운송이 아니었다.


먼 곳에서 선박을 건조하고, 선원을 조직하며, 화물을 준비하고, 적절한 계절을 기다려야 하는, 그 자체로 상당한 돈과 자원, 시간이 투입되는 국가차원의 대규모 벤처사업이었다.


두 왕이 함께 배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위험과 투입 자원을 나누는 공동 프로젝트였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배는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한다. 이 실패가 단순한 사고였는지, 준비 부족이었는지, 정치적 불안과 연관되었는지는 기록이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역대기는 예언자 엘리에셀의 말을 덧붙인다.

“왕이 아하시야와 연합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의 일을 무너뜨리셨다.”


아하시야가 다시 한 번 “내 종들을 왕의 종들과 함께 배에 태워 보내게 하라”고 요청하지만, 예언자의 경고를 받은 여호사밧은 이를 거부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먼저, 장거리 항해 교역은 국가의 막대한 자원과 위험이 투입되는 사업이었기에, 성경은 이를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에 남긴 것이다.


다음으로, 역사적 사례들이 선명하게 보여주듯 해상 교역은 큰 수익만큼이나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이 상존하는 모험 사업이었고, 늘 공동 사업자 사이에 신뢰와 검증의 문제가 따라다녔다.


여호사밧의 배에 아하시야의 종들을 태우는 것은 단순한 인력 충원이 아니라, 남유다의 국가 프로젝트에 북이스라엘의 ‘지분’이 들어오는 것으로 ‘지배권(governance)의 변화’를 의미했다.


예언자의 말은 신학적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긴박한 국제 정세를 함께 놓고 보면,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훈계로만 남지 않는다.


잔인하기로 소문난 잠재 패권국, 아시리아의 부상으로 주변 강대국들의 정치적 완충지대였던 레반트의 여러 중소국들은 정치 셈법이 복잡해진다.


이 와중에 북이스라엘은 반(anti)아시리아 연합의 선봉이라는 극도로 위험(extremely high risk)한 선택을 감행했고, 결국 국가의 패망으로 이어진다.

A relief of Sargon II (right) and dignitary from the wall of his palace at Dûr-Sharrukin in Assyria


The Nimrud Prism (“D”) of Sargon II contains his claim of conquering Samaria and deporting those fro


이러한 배경에서, 국가의 부(wealth)가 걸린 대규모 장기 프로젝트를 아하시야와 함께 추진한다는 것은 단순한 경제 협력을 넘어서는 문제였다.


전시 경제’ 상태에 놓일 아하시야는 ‘부도 위험이 높은(high default risk)’ 사업파트너였을 뿐만 아니라, 공동 프로젝트 자체가 아시리아를 자극할 위험도 높았다.


Part24142.jpg?type=w773 The Prophet Eliezer. Giorgio Vasari


‘북방에서 오는 말밥굽 소리를 들은’ 예언자 엘리에셀의 경고는, 북이스라엘이 대규모 프로젝트에 도사린 리스크를 함께 분담할만한 파트너가 아니라는 냉엄한 현실 인식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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