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4] 버블(Bubble)의 시작

미시시피 회사 vs 남해회사

by 이근엽

초기 자본주의 역사에서 유명한 버블하면 흔히 '튤립 투기'가 언급된다.


그러나 그것은 금융 시스템 자체를 뒤흔든 사건이라기보다 후대에 과장된 해프닝에 가까웠다.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 금융 구조와 맞닿아 있는 최초의 거대한 버블은 1720년, 파리와 런던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존 로의 미시시피 회사와 영국의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


Arms_of_the_South_Sea_Company.svg.png?type=w773 남해회사 문장


찰스 킨들버거 『광기, 패닉, 붕괴(Manias, Panics, and Crashes)』를 비롯해 금융 시스템의 내재적 변동성과 버블 메커니즘을 연구해온 금융경제사학자들에게, 이 두 사건은 단순한 투기 에피소드가 아니라 사유의 보고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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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의 팽창, 자산 가격 상승, 기대의 자기증폭, 그리고 신뢰 붕괴라는 흐름은 이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현대적 버블의 원형을 처음으로 ‘보여준’ 사례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사건들은 드라마적 요소 또한 갖추고 있다. 파리는 광기에 휩싸였고, 런던에서는 세계 최고의 지성 중 하나였던 아이작 뉴턴조차 거대한 투기 열기 속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실험과 인간의 욕망이 충돌한 이 이야기는,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생한 긴장감을 지닌 채 반복해서 소환된다.



파리 — 신용이 만들어낸 상승과 붕괴


북미 루이지애나가 거대한 부를 잉태한 기회의 땅이라는 존 로의 비전에 호응한 투자자들이 보인 열기는 점차 광기로 치달아 갔다.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 가격은 1719년 초 약 500리브르 수준에서 시작해 불과 몇 달 사이 수천 리브르로 치솟았고, 결국 약 10,000리브르에 이르는 정점까지 상승했다.


신용을 이용한 투자와 루이지애나 식민지에서 창출될 막대한 부에 대한 기대가 결합되면서, 가격 상승은 다시 새로운 참여자를 끌어들이는 자기증폭적 흐름을 만들어냈다.


루이지애나는 금과 은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신대륙으로 선전되었고, 광대한 농업 개발과 무역 독점권이 가져올 미래 수익이 반복적으로 강조되었다.


실제 정보는 제한적이었지만, 기대는 점점 더 구체적인 확신처럼 받아들여졌다.


JohnLawCamp-Biloxi-1720.jpg?type=w773 존 로 당시 루이지애나 정착촌


파리는 투기의 중심지가 되었고, 주식은 현재의 수익이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의 이익을 선취하는 수단으로 거래되었다.


그러나 기대가 현실을 앞질러 달리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일부 투자자들이 지폐를 금속 화폐로 되돌리기 시작하자 시장 분위기는 급격히 변했고, 가격은 상승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무너졌다. 단기간에 축적된 부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열광은 패닉으로 바뀌었다.


미시시피 버블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같은 시기, 해협 건너 런던에서도 파리와 닮은 구조 속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버블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런던 — 국가 부채와 투기가 만나는 순간


파리에서 미시시피 버블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바로 그 시기, 런던에서도 또 하나의 거대한 금융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


1711년 영국 정치가(재무장관) 로버트 할리(Robert Harley)의 주도로 설립된 이 회사는 남미 식민지와의 무역을 목표로 한 주식회사(joint-stock company)였다.


남해회사는 ‘기획의 시대’라 불릴 수 있는 당시의 흐름 속에서, 스페인령 아메리카와의 교역을 통해 큰 상업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영국 정부로부터 남미 식민지 무역 독점권노예공급권(Asiento)을 확보하고자 했다.


%EB%82%A8%ED%95%B4_%ED%9A%8C%EC%82%AC_%EC%82%AC%EC%97%85_%EB%B2%94%EC%9C%84.jpg?type=w773 남해회사의 무역범위에 관한 지도. Herman Moll, 1711


회사는 이 특권을 얻어내기 위한 전략으로, 과도한 국채 발행으로 인해 누적된 영국 정부의 재정 부담을 완화해 주겠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지속적인 재정 지출로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던 영국 정부(앤 여왕)는 이를 받아들였다.


1713_Asiento_contract.png?type=w773 스페인령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노예공급권(Asiento) 계약 표지


이후 남해회사는 유력 정치인과 금융 엘리트, 그리고 언론을 적극 활용하며 남미 식민지 무역을 통해 높은 수익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시장에 퍼뜨렸고, 사람들은 그 비전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은 자신들이 보유하던 영국 국채를 남해회사 주식과 교환하였다.

이렇게 확보된 국채에 대해 남해회사는 영국 정부로부터 채권에 대한 이자 지급과 함께 남미와의 식민지 무역 특권이라는 권리를 손에 넣었다.


그 과정에서 채권자들은 더 이상 고정된 이자를 받는 채권자가 아니라, 모험적 회사의 미래 성장에 기대를 거는 투자자로 점차 위치를 바꾸어 갔다.



남해회사 버블 — 상승에서 광기로


파리에서 미시시피 버블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바로 그 시기, 런던에서도 남해회사 주식의 상승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앞서 보여주었듯, 막대한 수익이 남는 식민지 무역에 대한 기대는 투자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약속하는 듯 보였다.


초기 상승은 비교적 조용하게 시작되었지만,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자 시장의 분위기는 빠르게 변했다.

투자 참여자는 급격히 확대되었고, 귀족과 정치인, 금융 엘리트뿐 아니라 상인과 전문직 종사자, 일반 시민들까지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곧 런던의 커피하우스와 거리에서는 주식 이야기가 일상이 되었고, 상승 자체가 투자 이유가 되기 시작했다.


%EB%82%A8%ED%95%B4%ED%9A%8C%EC%82%AC_%EA%B4%80%EB%A0%A8.jpg?type=w773 국채를 주식과 바꾸려는 사람들을 묘사한 『Change Alley in 1720』, 애드워드 매튜


투자 열기가 확산되면서, 투자자들은 주식을 매수하기 위해 민간 은행과 금융업자들로부터 자금을 빌렸고, 은행들은 남해회사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제공하며 이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가격 상승은 새로운 매수자를 불러왔고, 그 매수는 다시 신용을 확대시키며 상승을 가속시켰다.


버블이 커지자 대출 관행은 점점 공격적으로 변했다.

일부 금융업자들은 주금의 일부만 납입된 상태의 주식 인수권(subscription shares)까지 담보로 인정하며 자금을 빌려주었고, 상승 기대는 점점 더 많은 레버리지를 끌어들였다.


남해회사 외에도 '기획의 시대'에 한 몫 잡고자 수많은 신규 회사들이 등장했고, 이른바 bubble companies라 불린 투기적 사업들이 난립했다.


심지어 당대 기록에는 투자자 모집을 위한 이런 신문 광고도 등장한다.

- "아직 공개할 수 없는 어떤 사업을 위한 회사"


정치권과 유명 인사들의 참여는 시장의 기대를 더욱 자극했다.

아이작 뉴턴 역시 이 흐름 속에서 투자에 참여했다.


1720년에는 무분별한 신규 회사 설립을 제한하기 위한 Bubble Act가 의회를 통해 통과되는 일이 일어났지만 시장의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가격은 계속 상승했다.

어느 순간부터 시장은 현실의 수익이 아니라,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거래하기 시작했다.



붕괴 — 기대가 신뢰를 앞지르는 순간


1720년 여름, 남해회사 주가는 정점에 도달했다.


연초 약 100파운드 수준이던 주가는 몇 달 사이 급등해 1,000파운드에 가까운 가격까지 치솟았다. 상승 속도는 시장 참여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더 이상 실질적인 사업 성과보다 가격 상승 자체가 투자 논리가 되었다.


그러나 상승이 가속될수록 균열도 함께 커지고 있었다.


새로운 매수자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일부 내부 인사와 초기 투자자들은 조용히 이익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기대에 기반한 가격은 작은 충격에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화면 캡처 2026-03-13 164847.jpg 남해회사 주가 변동 추이


어느 순간, 상승은 멈췄다.

그리고 시장은 방향을 바꿨다.


매도는 매도를 불렀고, 신뢰는 빠르게 사라졌다.


상승기에 서로를 밀어 올리던 투자자들은 이번에는 동시에 출구를 향해 움직였다. 가격은 급격히 무너졌고, 불과 몇 달 만에 시장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아이작 뉴턴 역시 이 흐름 속에서 초기 수익을 얻었지만, 이후 다시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붕괴 속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고 전해지며 인구에 회자되는 '그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


아이작 뉴턴


1720년 가을, 남해회사 버블은 사실상 붕괴했다.


수많은 투자자들이 파산했고, 정치적 스캔들과 책임 공방이 이어졌다.

충격은 금융 시장을 넘어 영국 사회 전체로 확산되었고, 결국 의회는 새로운 주식회사 설립을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Bubble.folly.jpg?type=w773 남해회사 버블 당시의 주식 브로커를 풍자한 판화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주식회사 설립은 원칙상 금지되고 의회의 승인이 있는 경우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영역으로 남게 되었을 만큼, 버블이 남긴 충격은 깊고 오래 지속되었다.



두 버블을 만든 조건 — 왜 같은 시기에 등장했는가


현대 금융경제사 연구에 따르면, 거대한 버블은 몇 가지 공통된 조건 속에서 등장한다.


바로, 자산이 용이하게 거래되는 유통 시장의 존재, 투기적 기대의 형성, 그리고 신용과 유동성의 급격한 증가라는 3가지 조건이다.


윌리엄 퀸과 존 터너 - 『Boom and Bust』 - 를 비롯한 연구자들은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할 때 자산 가격이 현실의 수익보다 서사와 기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지적한다.



흥미로운 점은, 1720년을 전후해 파리와 런던에서 발생한 두 버블이 동시에 이러한 조건을 모두 보여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파리에서는 존 로의 시스템 아래 방크 로열이 발행한 지폐가 급격히 확대되며 신용(유동성)이 빠르게 공급되었고, 투자자들이 국채와 지폐로 매수한 미시시피 회사 주식은 전문 브로커들의 등장과 함께 시장에서 쉽게 거래되었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개발과 식민지 무역이라는 미래 서사는 투자 열기를 자극하며 투기적 기대를 증폭시켰다.


한편 런던에서는, 국채와 교환된 대규모의 남해회사 주식이 시장에 풀렸고 가격이 오르자 곧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주식을 사고파는 활발한 거래 시장이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간 은행과 금융업자들은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제공하며 주식 거래에 필요한 유동성을 공급했다. 동시에 남미 식민지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시장 전반에 퍼지면서, 투기적 열기는 빠르게 증폭되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이 등장한다.


왜 하필 같은 시기, 서로 다른 두 도시에서 이처럼 유사한 조건들이 동시에 형성되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두 버블의 흥망을 넘어, 18세기 초 유럽 금융 질서 자체가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게 만든다. 이 문제는 학계에서도 주요하게 다뤄지는 주제이지만 여전히 여러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

당시 유럽 전체가 거대한 전환의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항해 시대 이후 항해와 선박 기술의 발전은 세계 교역을 급격히 확장시켰고, 신대륙 발견으로 활짝 열려진 국제(식민지) 무역은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부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pool-of-london-painting-by-john-wilson-carmichael.jpg?type=w773 Pool of London, John Wilson Carmichael


한편으론 중세 경제 질서가 해체되면서 잉여 자본이 축적되기 시작했고, 현대적 의미의 자본시장이 막 형태를 시작하며, 모험적 사업을 떠받칠 기반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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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국가의 재정 운영 방식은 여전히 전쟁과 궁정 지출에 의존하는 구체제의 연장선에 있었고, 정부 부채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결국 재정 위기를 해결하려는 국가의 필요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움직이던 투자 자본의 욕망이 맞물리면서, 금융 실험과 투기적 기대가 동시에 확대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영국과 프랑스라는 당시 유럽 최대 경제권에서, 국가 부채와 신용 확대, 그리고 신대륙이라는 미래 서사가 결합되며 버블이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이 동시에 무르익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라기보다, 시대적 전환 속에서 거의 필연처럼 나타난 결과였다.



두 버블의 차이 — 겉으로는 유사했지만 구조는 달랐다


표면적으로 보면 미시시피 회사와 남해회사 버블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국가 부채가 주식으로 전환되고, 식민지 무역이라는 미래 서사가 투자 열기를 자극했으며, 신용 확대가 자산 가격 상승을 가속시켰다.


그러나 붕괴 이후 남겨진 결과는 전혀 달랐다.


프랑스에서는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 자체가 무너졌고,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자본시장 발전이 제한되었다.


반면 영국에서는 충격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금융 구조는 살아남았고, 국채 시장과 금융 네트워크는 오히려 더 제도화된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두 사건을 가른 것은 시장의 열기나 투기의 강도가 아니라, 애초에 무엇을 위해 설계되었는가라는 출발점이었다.


존 로는 당시로서는 혁명에 가까운 금융 사상가였다.

그는 경제의 핵심 문제가 금과 은의 부족이 아니라 신용의 부족이라고 보았고, 화폐를 금속이 아니라 신뢰와 유동성의 문제로 이해했다.

그리고 막대한 국채 발행으로 재정 위기에 빠져 있던 프랑스에서 자신의 금융 사상을 현실로 구현할 기회를 발견하고 이를 실행했다.


그런 그에게 미시시피 회사는 식민지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일개 영리 기업이 아니라 주식을 통해 국채를 흡수하고 새로운 금융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첫 번째 장치였다.


이어 방크 제네랄레를 왕실 은행인 방크 루아얄로 전환하고, 금속 화폐 중심 질서를 은행 발행 지폐로 대체하며, 그 지폐가 다시 미시시피 회사 주식 인수에 사용되도록 설계한 일련의 조치들은 하나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한 단계들이었다.


존 로의 시각에서 보면, 미시시피 회사와 방크 로열은 별개의 기관이라기보다 애초부터 하나의 통합된 구조였다.


그 구조 안에서 방크 로열은 사실상 중앙은행처럼 기능하며 주식 인수에 필요한 신용과 유동성을 직접 공급하고,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은 단순한 기업의 지분을 넘어 국채와 연결된 일종의 국가 기초 자산으로 기능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미시시피 회사는 단순한 주식회사가 아니었다.

중앙은행, 재무부, 그리고 국가 펀드의 성격이 한데 결합된 하나의 통합된 국가 금융 기관에 가까웠다.


반면 남해회사는 출발점 자체가 달랐다.


미시시피 회사와 국채 인가 국가 금융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통화 실험의 일부였다면, 남해회사는 상업적(또는 투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었고, 국채 인수는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적 수단이었다.


즉, 미시시피 회사가 국가적으로 새로운 금융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도구였다면, 남해회사는 기존 금융 환경 속에서 사업 기회를 확대하려는 기업이었다. 남미 식민지와의 해상무역이 가져올 거대한 부라는 비전 속에서, 투자자들은 자신들이 보유하던 국채를 주식과 맞바꾸었다.


주가가 상승하기 시작하자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해졌고, 투자자들은 주식 매수를 위한 신용(money)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런던에는 방크 로열과 같은 중앙 발권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신용(money)은 중앙에서 ‘발행’되지 않았고, 금세공업자 출신의 개별 은행업자들이 제공하는 대출을 통해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은행업자들이 공급할 수 있는 자금은 결국 보유한 현금과 예금, 지급능력, 그리고 담보로 잡은 주식의 가치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 묶여 있었다.


버블이 확대될수록 대출 관행은 점점 공격적으로 변했고, 담보 평가 기준도 완화되었지만, 신용의 확장은 어디까지나 민간 은행의 한정된 대차대조표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파리에서 미시시피 회사와 방크 로열이 하나의 통합된 국가 금융 기관처럼 작동하며 자산시장에 유동성을 직접 공급했다면, 런던에서는 개별 은행업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신용이 분산된 채 확장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차이는 거품이 붕괴된 이후 양국의 금융 경로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파리에서는 버블의 붕괴가 단순한 시장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미시시피 회사와 방크 로열이 사실상 하나의 통합된 국가 금융 기관처럼 작동하고 있었던 만큼, 주식 가격의 붕괴는 곧 화폐(통화) 체계 자체에 대한 신뢰 붕괴로 이어졌다.


지폐의 가치와 국가 신용이 동시에 흔들리면서 금융 시스템 전체가 깊은 충격을 받았고, 이후 프랑스 사회에는 종이 화폐와 자본주의, 금융 혁신에 대한 불신이 오랫동안 남게 된다. 심지어 프랑스 대혁명의 숨은 원인이라고 지목되기도 한다.


reflection_of_the_mercenary_world_at_the_beginning_of_stock_trading.jpg?type=w773 익명, 1720년, 에칭 및 판화
이 판화의 중앙 이미지는 존 로우의 초상 옆모습이 동전에 그려져 있으며, 긴 성인 예복을 입은 수염 난 남성의 몸과 함께 있다. 십자가 모양의 구슬 위에 앉아 있는데, 이는 권위와 지위를 넘는 위험을 상징하는 이 복합 인물—금속 화폐이자 성상—는 거짓된 돈의 신을 숭배하는 위험성을 경고한다


반면 런던에서는 버블 붕괴가 가져온 직접적 충격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사회에 남긴 후속 결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남해회사 버블은 수많은 투자자와 금융업자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남겼지만, 신용이 중앙에서 공급된 것이 아니라 개별 은행업자들의 대차대조표 위에서 분산되어 생성되었던 만큼, 붕괴는 통화 질서 자체를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당시 많은 지역 은행들이 파산하고 시장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지만,

국채 시장과 금융 네트워크는 유지되었고 이후 제도적 정비를 거치며 오히려 더 견고한 구조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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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회의 남해회사 거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설치된 비밀위원회(Committee of Secrecy)의 보고서와 찰스 스넬(Charles Snell)의 회계감사 보고서는 현대 회계감사 제도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결국 남해회사 버블은 단순한 실패로 끝난 사건이 아니었다.

신용이 확장된 시대에 금융 시스템을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남겼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중앙은행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먼저 실험했던 프랑스는 그 실패 이후 금융에 대한 집단적 불신 속에서 금융 제도가 퇴행했다.


반면 아직 중앙은행을 갖지 못했던 영국은 같은 충격 속에서 중앙은행을 향한 제도적 진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여전히 한 인물이 남아 있다.

존 로.


그는 단지 지폐를 발행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금과 은이라는 금속을 넘어, 토지와 생산적 자산을 기반으로 새로운 신용 질서를 구축하려 했다.


미시시피 회사와 루이지애나라는 서사는 단순한 식민지 투기 이야기가 아니라, 토지를 기초로 화폐와 금융 체계를 재구성하려는 거대한 실험의 일부였다.


결국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신용은 무엇 위에 세워지는가.


그리고 그 답은, 금융의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해 온 하나의 기초 자산 — 토지 — 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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