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존 로가 꿈꾼 금융 시스템

신용화폐의 탄생과 중앙은행의 그림자

by 이근엽

금과 은이 아니라, 신용(credit)이다


18세기 초 유럽에서 화폐란 곧 금과 은이었다.


경제가 침체하면 사람들은 금속 화폐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국가의 재정 문제 역시 결국 금과 은의 고갈로 설명되곤 했다.


존 로는 이 전제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그에게 경제의 문제는 금속의 부족이 아니라 신용의 부족이었다.

거래를 가능하게 하고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금속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의 약속을 믿고 교환을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신용이라는 인식이었다.


화폐는 금속이 아니라 신용이다.
국가가 신용을 발행해 부채를 상환할 수 있다.
- John Law


오늘날 중앙은행이 금본위를 떠나 신용화폐 체계를 통해 유동성을 조절하는 모습은 익숙하다. 그러나 금속 화폐가 절대적 기준으로 여겨지던 당시, 이러한 발상은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은 급진적인 사상이였다.


하지만 이 사상은 단순한 이론에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존 로가 구축하려 했던 금융 시스템—방크 제네랄레에서 미시시피 회사, 그리고 방크 로열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은 바로 이 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정치권력과 금융 실험 — 방크 제네랄레의 탄생


존 로의 금융 실험은 방크 제네랄레(Banque Générale)의 설립으로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1716년 파리에 설립된 이 은행은 화폐의 기준을 금속에서 신용으로 이동시키려는 시도였다. 금과 은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 신용을 기반으로 화폐를 공급함으로써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다는 존 로의 사상이 처음으로 제도적 형태를 갖춘 순간이었다.


방크 제네랄레를 위해 존 로가 서명한 지폐, 1718.
"은행은 소지자에게 요구 시, 오늘 날짜의 중량과 순도에 따른 은화(espèces) 50에쿠를 지급할 것을 약속한다. 1718년 6월 10일 파리에서 가치를 수령함"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당연히 이러한 급진적인 실험은 개인의 아이디어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루이 14세 사후 프랑스는 전쟁과 궁정 지출, 그리고 과도한 국채 발행으로 인해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기존 방식으로는 국가 채무를 해결할 수 없었고,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오를레앙 공(Philippe II, Duke of Orléans)은 이러한 상황에서 존 로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의 정치적 승인과 보호 아래 방크 제네랄레는 설립될 수 있었다.


Lettres_patentes_portant_privil_e_en_...Louis_XV_bd6t54204102p.JPEG?type=w773 방크 제네랄레 설립 특허장


즉, 존 로의 실험은 단순한 금융 혁신이 아니라, 재정 위기를 돌파하려는 정치 권력의 필요와 결합된 프로젝트였다.



미시시피 회사 — 국가 부채를 금융 구조로 전환하다


1717년 설립된 미시시피 회사는 겉으로는 루이지애나 개발을 내세운 식민지 기업이었다. 그러나 존 로에게 이 회사는 단순한 개발 프로젝트가 아니라, 국가 부채를 새로운 금융 구조로 재편하기 위한 핵심 장치였다.


H%C3%B4tel_Tubeuf_-_Paris_II_%28FR75%29_-_2023-05-07_-_1.jpg?type=w773 1720년 미시시피 회사가 입주했던 건물


투자자들이 보유하던 프랑스 국채를 회사에 넘기고 그 대가로 회사 주식을 받은 순간, 그들은 더 이상 국가의 채권자가 아니라 미지의 황금 땅에서 나오는 미래의 수익을 약속받은 기업의 주주가 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무역 독점권과 조세 징수 권한, 식민지 개발 권리 등 다양한 특권의 대가로, 미시시피회사가 취득한 국채의 상환이나 이자지급 채무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점은,

단순히 국가 채무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국가의 재정 부담(국채)이 이제는, 미시시피 회사라는 창을 통해 직접적 채무 관계에서 벗어나 신용을 창출하는 기초자산으로 변모하여 금융 구조 속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방크 로열 — 신용과 국가의 결합


1718년 방크 제네랄레는 국유화되어 방크 루아얄(Banque Royale)로 전환된다. 존 로의 금융 실험은 이 단계에서 비로소 국가 권력과 직접 결합하게 된다.


Declaration_du_Roy_pour_convertir_...Louis_XV_btv1b86076906.JPEG?type=w773 방크 제네랄레를 방크 루아얄로 전환하라는 왕의 선언문, 1978. 12. 4.


이 변화는 단순한 명칭 변경이나 소유 구조의 변동이 아니었다.


이 순간부터 방크 루아얄이 발행하는 지폐는 민간 금융기관의 약속이 아니라 왕실의 신용을 배경으로 하는 사실상의 '국가 화폐'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10_livres_tournois_banknote_issued_by_Banque_Royale,_France,_1720._On_displa.jpg?type=w773 1720년 방크 루아얄이 발행한 10루브 투르누아 지폐


방크 루아얄이 사실상 중앙은행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지폐 발행 '권한'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가 지폐 유통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시행한 정책 패키지였다.


우선, 프랑스 정부는 방크 루아얄 지폐로 세금을 납부하게 함으로써 지폐에 대한 실질적 수요를 창출했다.

이는 지폐를 단순한 선택적 지급수단이 아니라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반드시 사용 가능한 화폐로 만드는 결정적 조치였다.


동시에 일정 금액을 넘는 금·은 거래를 규제하거나 금속 화폐 보유를 억제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전통적인 금속 화폐 중심 질서를 약화시키고, 방크 루아얄 지폐가 주요 통화 수단으로 자리 잡도록 유도하려는 목적에서 였다.


또한 방크 루아얄 지폐에는 나중에 금·은 화폐와 동등한 가치로의 교환을 담보한다는 왕실의 보증(guarantee)이 붙었다.

이 보증은 지폐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실질적 교환력을 가진 화폐로 받아들여지도록 만드는데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하였다.


왕실이 행한 일련의 정책들로 인해, 사람들은 원하지는 않았지만 점차 지폐를 금속 화폐의 대체물이 아니라, 국가가 보증하는 새로운 형태의 화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방크 루아얄은 단순한 상업은행을 넘어 통화 공급과 금융 흐름을 좌우하는 핵심 기관으로서 위치를 굳혀갔다.


한편 재무장관에까지 오른 존 로는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사려는 투자자들에게 방크 루아얄 지폐로 주식대금을 납입하도록 하는 조치를 더함으로써 자신의 구상을 완성시켰다.


미시시피 회사 방크 루아얄은 마치 하나의 기관처럼 작동하며 국채-주식-지폐가 서로를 강화하는 신용 루프 구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정부의 채무(국채)가 식민지 땅(루이지애나)에서 나오는 미래 수익에 대한 기대와 함께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으로 전환되고, 그 주식은 다시 정부가 보증하는 방크 루아얄 지폐로 교환되는, 현대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구조였다.


이 처럼 존 로는 단계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된 계획 아래,

궁극적으로 화폐가 지닌 가치(value)의 근거 자체를 금과 은에서 미래 수익에 대한 기대와 '국가가 보증하는 신용(credit)'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그 결과 지폐의 신용(credit)는 겉으로는 왕실이 교환을 보증한 금속 화폐에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루이지애나 개발 사업과 그곳에서 창출될 미래의 경제적 이익으로 치환되었다.


그러나 미시시피 버블의 붕괴와 함께 존 로의 혁신적인 금융 실험은 실패로 끝이나고 만다.


960px-L%27_effondrement_du_systeme_de_Law.jpg?type=w773 존 로의 종이 지폐 시스템이 결국 '악마의 유혹'처럼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었음을 상징하는 풍자. 『은화의 악마(LE DLABLE D'ARGENT)』, 1720


민간 은행의 등장 — 장부 속으로 이동한 화폐


존 로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고 해서 그의 문제의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해상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경제가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 금속 화폐에 기반한 질서는 점차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고, 화폐를 금속이 아니라 신용으로 이해하려는 변화가 역사 속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존 로 이후에 진행된, 금속에서 신용으로의 전환은 어느 날 갑자기 시행된 정부의 결단이나 사전에 준비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변화가 아니었다.


중앙은행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 유럽의 금세공업자(Gold Smiths) 겸 초기 은행업자들은 고객의 금과 은을 보관하는 과정에서 보관증(goldsmith’s receipt/notes)을 발행했다.


goldsmiths's receipt(notes)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고객이 동시에 금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착안한 금세공업자들은 보관증을 활용해 대출과 장부상 신용거래에 조심스럽게 나서기 시작했다.


관행이 한 번 시작되자 보관증은 곧 점차 실제 금속을 대신해 유통되기 시작했고, 화폐는 금속에서 종이(보관증)로, 그리고 신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훗날 이는 은행권(banknote)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미 이 시점에서 화폐의 본질은 금속이 아니라 신뢰(trust)와 신용(credit)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간 신용이 만들어낸 새로운 금융 세계는 동시에 반복적인 공황과 붕괴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민간 신용의 불안정성 — 반복되는 공황과 시스템 위기


민간 은행이 창출한 신용은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켰지만, 동시에 새로운 종류의 불안정성을 낳았다.


개별 은행업자의 신뢰에 기반을 둔 화폐는 이들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순간 급격히 붕괴될 수 있었고, 뱅크런과 금융 공황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이러한 위기는 단순히 몇몇 은행의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상업 거래와 결제 시스템이 마비되면서 실물 경제까지 영향을 받았고, 금융 공황은 곧 경제 위기로 이어졌다.


실제로, 1763년에는 '7년 전쟁' 이후 과열된 금융시장이 붕괴로 암스테르담 대형 금융회사 Neufville이 파산하자 영국에서 어음시장이 붕괴되며 뱅크런이 발생하였다.


그 이후에도 1772년 Ayr Bank 붕괴로 촉발된 스코틀랜드 금융 공황, 1793년 프랑스 혁명전쟁 발 금융 패닉(Napoleonic War Credit Crisis), 그리고 1825년 해외 광산투기가 불러온 60개 이상의 대규모 은행 파산 사태(First Modern Financial Crisis in UK) 등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Midas_Transmuting_all_into_Gold_Paper_James_Gillray.jpg?type=w773 『미다스가 모든 것을 (금) 종이로 변환하다』, 제임스 길레이 1797. 나폴레옹 전쟁 이후 부채해결을 위해 영국정부가 지폐와 금 교환을 거부한 조치를 풍자


신용이 팽창하는 시기에는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지만 기대가 꺾이는 순간 뱅크런과 연쇄 파산이 이어지며 금융 질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실증한 것이다.


이처럼 금속 화폐의 물리적 제약에서 벗어난 민간 신용 체계는 이전보다 훨씬 큰 성장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규모의 시스템 리스크를 낳았다.


그러나 시스템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 속에서, 민간 은행의 자정 능력에 기대기 보다는 금융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한 새로운 제도적 장치에 대한 필요성이 점차 제기되기 시작한다.



중앙은행에 이르는 길고도 험난한 길


18세기와 19세기 유럽 금융 시장에 주기적으로 찾아온 시스템 위기는, 통화 관리에 전권을 갖고 위기시 개별 은행들에 대한 '최종 대부자 역할(lender of last resort)'을 하는 중앙은행의 제도화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거기로 가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고, 완전한 형태로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지도 않았다.

그 보다는 금융사에서 중요한 고비마다 문제해결을 위한 타협과 시행착오를 경험해가며 그 궤적을 따라 천천히 모습을 갖추어갔다.


이미 17세기 말(1694년) 설립된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은 국가 재정과 금융 시장을 연결하는 기관으로서 부분적으로 은행 시스템에 대한 안정 기능을 수행했지만, 현대적 의미의 중앙은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이후로 반복되는 금융위기 속에서 통화 공급과 지폐 발행을 일정 부분 중앙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큰 이견 없이 비교적 빠르게 받아들여졌다.


그 주장은 1844년, 현대 중앙은행법의 효시로도 불리며, 개별 민간 은행의 무분별한 신용 확장을 제한하려는 시도를 담은 '은행법(Bank Charter Act 1844)'을 통해 제도적으로 구체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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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법은 당시 총리인 Robert Peel이 주도했다고 하여 Peel's Act로도 불리는데,

주요 내용은 ① 개별 지역 은행의 발권(banknotes)을 제한하고, 영국은행이 신규 지폐 발행 권한 독점한다는 것과 영국은행의 지폐 발행을 보유하는 금 보유량에 연동한다는 조항이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또 다른 핵심 기능인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역할에 대해서는 상황이 달랐다.


위기 시 민간 금융기관을 구제하는 것은 시장 규율을 약화시키고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초래할 수 있다는 반대의견이 상당했다.


은행법 역시 영국은행이 금·은 보유량을 기준으로 통화 공급을 제한(☞ 금융위기시 통화를 '재량에 따라 발행'하여 유동성 위기에 빠진 은행을 구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는 방식으로 그 우려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현실의 금융위기는 이론적 논쟁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847년 철도 투기 붕괴와 신용 수축 (Railway Mania Credit Crisis), 1857년 대서양을 따라 전염된 최초의 글로벌 금융 패닉(Global Trade Panic & Atlantic Credit Shock), 1866년 Overend Gurney 붕괴와 런던 금융 패닉(Overend Gurney Collapse & London Panic) 등,

반복된 금융위기마다 영국은행은 법적 제약을 사실상 넘어서며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했고,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최종 대부자 역할을 수행했다.


법은 개입을 제한했지만 현실은 개입을 요구했고, 중앙은행은 규칙과 필요 사이의 긴장 속에서 기능을 확장해 나간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점차 하나의 사실상의 규범으로 자리 잡아 갔고,

이후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은 『롬바르드 스트리트(Lombard Street: A Description of the Money Market)』에서, 위기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건전한 담보를 가진 기관에 충분한 유동성을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며 최종 대부자 역할에 관한 긴 논쟁을 사실상 종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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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를 분기점으로 하여 중앙은행은 단순한 화폐 발행 기관이 아니라, 금융 시스템 전체의 안정성을 지탱하는 구조적 장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처럼 중앙은행은 특정한 사상이나 정책에 따라 계획적으로 설계된 기관이라기보다, 반복된 위기 가운데 점차 자신의 역할을 발견해 간 존재였던 셈이다.



중앙은행의 운영 원리


이제는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을 조절하고, 위기 상황에서는 최종대부자로서 유동성을 공급함으로써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을 본질적 사명으로 한다는 점이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 진다.

중앙은행이 가진 권위의 원천은 국가의 신용에서 나온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국가의 신용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답의 중심에는 바로 '국채(sovereign bond)'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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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는 단순히 국가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을 넘어, 금융 시스템 전체의 기준 자산(anchor asset)으로 기능한다.


국채 금리는 시장 금리 구조의 기준점이 되며, 은행과 금융기관들은 이를 핵심 담보(collateral)로 활용해 신용을 확장한다.


중앙은행의 공개시장조작 역시 국채를 매개로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통화정책은 금융 시스템 전반으로 전달된다.


결국 국채는 국가가 발행한 채권인 동시에 중앙은행의 역할이 금융 시장 속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구조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처럼 국채를 발행하는 국가의 신용도는 단순한 재정 문제를 넘어, 중앙은행이 행사할 수 있는 통화 정책의 범위와 신뢰의 한계를 결정하는 근본 조건이 된다.



현대 금융 시스템 vs 존 로의 금융 실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앙은행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거나 금융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힘은 결국 국가가 발행한 채권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며, 국채는 곧 국가 신용이 금융 세계에서 작동하는 구체적 매개체다.


그런데 이 구조를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그 작동 방식이 낯설기보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진다.


국채를 기반으로 신용이 창출되고, 그 신용이 다시 금융 시장과 자산 가격을 움직이며, 국가의 보증 아래 화폐가 유통되는 구조


존 로가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실험적으로 구축하려 했던 금융 시스템의 핵심 구조와 놀랍도록 비슷하다.


당시 프랑스에서도,

국채가 미시시피 회사 주식으로 전환되고, 대가로 왕실이 보증한 방크 루아얄 지폐가 미시시피 회사로 흘러들어가 주식 가격을 부양하며 구조적으로 신용을 확장했다.


“존 로는 실패한 케인즈였고, 케인즈는 성공한 존 로였다.”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그렇다면 존 로의 시스템은 왜 실패했고, 현대 중앙은행 시스템은 왜 살아남았는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달랐는가


존 로의 시스템이 붕괴한 이유는 단순한 투기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방크 루아얄과 미시시피 회사, 그리고 국가 재정이 사실상 하나로 결합되면서 화폐 발행과 자산 가격 상승, 재정 문제 해결이 동일한 구조 안에서 동시에 추진되었고, 이를 견제하거나 분리할 장치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용은 지폐 발행에서 주식(자산) 매수로, 다시 자산 가격 상승과 추가 신용으로 이어지는 자기증폭 루프 속에서 제약 없이 가속되었다.


무엇보다 방크 루아얄 지폐의 신뢰(trust/credit)는, 루이지애나라는 미래 서사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고, 왕실의 보증은 무책임한 '군주 개인의 신용'에 전적으로 맡겨져 있었다.


%ED%99%94%EB%A9%B4_%EC%BA%A1%EC%B2%98_2026-02-20_150701.jpg?type=w773 오를레앙공이 섭정할 당시 루이15세(Louis XV, 재위 1715~1774)


반면 현대 금융 시스템에서 국가 신용은 삼권분립과 법치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적 통치 구조 안에서 법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담보된다.


국채는 더 이상 특정 군주의 약속이 아니라 의회의 승인과 재정 규율 속에서 발행되며,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국제 신용평가기관, 국제 금융규범, 외교적 신뢰, 국제법적 책임이라는 다층적 구조 속에서 냉정하게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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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신용은 이제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제도와 시장, 국제관계가 동시에 감시하는 공적 계약이 되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존 로의 실험


금융경제학의 발전과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중앙은행과 금융 시스템에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가 더해졌다. 자본시장과 은행에 대한 규제와 감독, 통화정책 도구 등은 신용 팽창의 속도를 조절하고 시스템 리스크를 분산시키기 위해 고안된 장치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에도 불구하고 금융위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신용이 확장되고 자산 가격이 상승하며 기대가 과열되는 순간, 즉 버블이 발생하면 시스템은 여전히 취약점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첨단 금융공학과 정교한 제도적 장치가 존재하는 현대 금융 시스템조차 신용 팽창의 자기증폭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음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위기 이후 중앙은행들은 대규모 양적완화(QE)를 통해 전례 없는 유동성을 공급했다.


Balance-Sheet.png?type=w773 연준 대차대조표


비록 금융 시스템 붕괴는 막았지만, 유동성은 자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며 투기적 수요와 자산 가격 상승을 가속화했고, 그 결과 자산 양극화 통화 가치에 대한 불안이 동시에 확대되었다.


그 반작용으로 탈중앙화를 내세운 암호화폐 실험이 등장했고, 전 세계적으로 누적된 막대한 국가 부채와 이를 유지하기 위한 대규모 국채 발행화폐의 장기적 신뢰에 대한 의문을 불러왔다.


최근 금에 대한 높은 수요 역시 이러한 긴장의 또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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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중앙은행은, 금융 시스템을 보호하는 '최종 대부자'를 넘어 자산 시장이 휘청일때마다 구원투수로 나서며 '자산 시장의 최종 구원자'라는 오명을 듣기도 한다.



존 로를 위한 변명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전례 없는 규모의 QE가 시행되는 장면을 보며, 어떤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평했다.


“존 로는 죽었지만, 그의 유령은 21세기 중앙은행에 산다.”
-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연준의 QE는 존 로 시스템의 완벽한 제도화 버전이다.”
- 허버트 스타이너(H. Steiner)


존 로는 억울할지 모른다.


존 로가 설계한 프랑스의 금융 시스템과 현대의 금융 시스템은 보완하는 제도적 장치가 추가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본질적 구조 면에서 놀랍도록 닮아 있다.


본질적 차이는 다른데 있지 않다.


국가의 신뢰변덕스러운 군주 개인의 신용에 의존하는가, 아니면 법치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적 통치질서와 국제적 책임 구조 위에 서 있는가에 있다.


우리 시대에도, 시스템의 안정을 볼모로 금융소득에 대한 무절제한 투기가 만연화되고, 정부가 정치적 이익에 매몰되어 부채 확대라는 손 쉬운 선택만을 반복한다면, 국가 신용은 언제든 균열을 맞을 수 있다.


국가의 신뢰가 흔들리고 투기적 기대가 신용을 대체하는 순간,

존 로의 망령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정말 우리는 존 로의 시대와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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