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yo Dec 04. 2023

16. 사인(死因)으로는 조금 부끄럽단 생각이 들었다.

과테말라 | 후회라는 감정에 대하여 1

살면서 후회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아주 많다.

어쩌면 하루에도 수차례,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했던 결정 대부분을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이지만, 의외로 후회의 종류는 딱 두 가지뿐이었다.


 '왜 (그때) 그걸 했을까?' 혹은

 '왜 (그때) 그걸 하지 않았을까?'


공통점은 어쨌든 후회했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전자(왜 그걸 했을까?)의 경우, 그 행위로 인한 실패의 경험이 쌓인다는 것. 그것을 토대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생긴다는 것.(하지만 실패는 언제나 뼈아프다. 그 고통을 감내하는 건 언제나 나의 몫.)

반대로 후자(왜 그걸 하지 않았을까?)의 경우, 내가 그 행위를 했을 때 일어날 일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어차피 할 후회라면 전자의 후회를 하기로 했다.

아프니까 청춘인지는 모르겠만, 아직까지 어느 정도의 아픔은 견뎌낼 수 있기에.


세계일주를 떠나기로 결심한 그 순간 또한 '떠날 것이냐', '떠나지 않을 것이냐'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어쨌든, 미래에 대해선 보수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생각했기에, '후회한다'는 전제가 이미 깔려있다.)

세계일주를 다녀온 후 후회한다면 취업이 잘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등의 이유일 텐데, 그 후회는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내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세계일주를 하지 않는다면 '세계일주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평생을 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평생의 숙제처럼, 마음의 짐처럼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세계일주를 해보고 후회하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주간의 안티구아 어학원 라이프는 나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스페인어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6개월간 2개의 문장(이라고 해도 되나 여전히 의문이다.) 밖에 몰랐던 내가 고작 2주 만에 꽤나 많은 단어와 문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숫자를 익힐 수 있었던 시간이었고 스페인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개념은 잡을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돈을 주고 배워야 빨리 배운다.


상대가 이해하건 말건 아예 그냥 영어로 말을 걸어보던 수준에서 이제는 일.단. 스페인어로 뱉고 볼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이제는 화장실이 어디냐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답은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아주 조금 화장실을 빨리 찾을 수 있게 됐다.)

이제는 버스정류장이 어디냐 물을 수 있다. (여전히 대답은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손짓해 주는 대로 가서 또 물어볼 뿐. 이 과정을 2~3번 거치면 버스정류장이 나왔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대답은 이해할 수 없다. 대화의 일방통행. 아주 조금 이기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것! 이제는 영어를 할 줄 아냐고 스페인어로 물어볼 수 있게 됐다.(하지만 여전히 영어도 잘 못한다.ㅎ)


스페인어에 대한 자신감을 조금 얻고, 나는 랑킨(Lanquin)으로 향했다. 그곳에 세묵참페이(Semuc Champey)라는 산속에 숨겨진 석회암층의 쪽빛 계곡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숙소에서 보이는 세묵참페이의 모습이 장관이다. 그리고 그만큼 숙소는 습했다. 아주 많이.



몇 시간이나 버스를 탔을까? 랑킨에 도착했다. 세묵참페이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숙소에 도착했더니, 리셉션에 다양한 투어 안내가 적혀있다.

랑킨에는 세묵참페이뿐만 아니라 동굴 투어가 유명하단다. 유명한 건 해보고 싶다. 동굴 투어를 신청했다.

동굴 투어를 신청하면서 안내 종이를 받았는데, 준비물에 수영복이 적혀있었다. (?)

그냥 동굴 탐사를 하는 건데 왜 수영복이 필요할까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동굴 투어를 떠나는 다음날 비치팬츠를 입고 동굴행 트럭에 올라탔다.



출발 전 기념사진 한컷. 신나 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 채.



일행은 독일인 Tim과 미국인 커플, 친구사이라는 두 명의 캐나다인 누나들.



동굴투어 가는 길. 쟤들도 나보다 스페인어 잘하겠지?



꼬불꼬불 산길을 지나고 숲을 지나고 정글을 지나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왜 준비물에 수영복이 있는지 알게 되었다.

동굴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다행히 작은 개울 수준이라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함께 트럭을 타고 온 우리 6명 외에도 몇 명이 더 투어에 합류했다. 파티 멤버가 꽤 많아졌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한 줄로 따라 동굴 투어를 시작했다.

작은 개울이었던 초입과 달리 더 들어가니 어떤 곳에선 발목까지, 또 어떤 곳에선 무릎까지 오기도 했다. 아주 조금 물이 점점 깊어지는 것 같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개울을 따라 동굴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꽤나 오랜 시간을 나아갔을까? 폭이 7~8m 쯤 되어 보이는 웅덩이(?)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깊이가 3m가 넘는단다. 염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아주 잠깐 나의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대학생 때 수영을 배웠었다.

문제가 있다면 기간이 고작 2개월이었다는 것. 그리고 수영을 배우고자 등록했던 시기에 개설된 수업이 한정되어 있어 자유형도 할 줄 모르는데 배영을 먼저 배우게 되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하나의 영법을 마스터하기엔 충분하지 못한 시간이었다. 배영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기는커녕 이제 막 물에 떠서 보노보노처럼 발장구를 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자유형을 배우게 되었다.(음파음파)

두 달간 수영에 대해 맛만 봤지 수영은 할 줄 모른다는 말이다.


가이드는 당연하단 듯이 헤엄쳐서 그곳을 지나갔다. 나와 함께한 다른 파티원들도 하나둘 헤엄쳐 그 웅덩이를 건너갔다. 외국에선 어릴 때부터 수영을 다들 배우는지, 나를 제외한 모두가 수영을 할 수 있는 듯했다.


 '아. 수경만 있었어도 숨 안 쉬고 5m 정도는 가는데.'


괜히 준비물에 수경은 적어주지 않은 여행사가 미웠다.(어차피 적혀있어도 없어서 들고 갈 순 없었지만.)

앞서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헤엄쳐 건너편으로 건너가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나는 마지못해 일행들에게 고백했다.


 "미안, 나 수영 못해."


동굴 속이 어두워 내 이야기를 들은 일행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수영을 아예 못하는 것이냐는 질문, 폭이 얼마 되지 않는데 저 정도는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격려, 저 정돈 충분히 갈 수 있다는 응원.

서늘한 동굴과 달리 격려와 응원이 따뜻했던 걸까? 나는 아주 조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그래! 저 정도는 그냥 눈 딱! 감고 쭉! 들어가서 발장구만 몇 번 쓱! 차면 도착할 수 있을 거야! 해보자!'


용기를 가지고 호기롭게 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무모한 용기는 객기라는 걸.

세상엔 용기로 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단 걸.

그리고 그 대표적인 게 수영이란 걸.


멋진 스타트로 물살을 갈라 건너편에 도착해 박수와 격려를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물에 들어가는 순간 들려오는 물소리와 차가운 감촉에 놀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발장구를 쳐도,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물 위로 떠오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물에 빠졌다.


 '아, 허무하네 인생. 한 100살까지 살려고 했는데.. 고작 3m 조금 넘는 수심에서.. 동굴에서 익사라니..!?'



사인(死因)으로는 조금 부끄럽단 생각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