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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 Jun 14. 2024

37. 그는 여전히 유쾌하고, 긍정적이고, 철이 없다.

콜롬비아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정(情)이란 단어를 영어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많은 일을 대신한다고 한다.

요즘 나는 부쩍 인공지능, gpt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는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엣지에 있는 인공지능에게 물어봤다.



써보니까 느낀 건데, 질문을 잘해야 답변도 잘 나온다.



쟤도 외국인 친구들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과연 정말로 정이란 것은 한국인만의 감정일까?

그들에게는 저런 감정이 없을까?


나는 표현의 차이일 뿐 다른 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외국에 사는 삼촌 집에 놀러 갔을 때 이런 기분일까?

일주일간 Henry네 집에 머물며 Sandra, Sara와 또 다른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많은 곳을 둘러보았다.


이 일주일은 내 3년 여행 안에서도 손꼽히게 좋았던 순간들 중 하나로 추억하고 있다.


메데진에는 메데진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케이블카가 있다.

다 같이 케이블카를 타고 전경을 둘러보고, 시내를 구경했다.

길거리나 여러 사진을 찍으려 카메라를 꺼냈더니 그때마다 Henry는 어서 카메라 넣으라고, 여기서 카메라 꺼내고 다니면 빼앗기거나 도둑맞을 것이라고 계속 주의를 주곤 했다.


여행 초반에는 작은 카메라 전용 배낭을 앞에 메고 다니며 카메라를 넣고 다니다 필요할 때마다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고 다시 넣어두고 했었는데, 카메라 전용 배낭이라는 것이 앞으로 메고 다니기에 편한 디자인이나 크기가 아니었다.

그 후부턴 힙색을 메고 다니며 그 안에 카메라를 넣어두었다 필요할 때 잠깐 꺼내 사진을 찍고 다시 넣어두곤 했다. 물론 힙색을 멘 위에 외투를 항상 하나 걸쳐 입었다.

겉옷으로 힙색조차 잘 보이지 않게 가리고, 버스나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날 땐 겉옷을 여매어 다닌다.

이렇게 다니는 것이 가장 간편하면서, 소매치기를 예방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메데진에선 저렴하게 패러글라이딩도 할 수 있다.

(한화로 한 3만 원 정도밖에 안 했던 것 같다.)

그걸 어찌 알게 되어 Henry에게 이야기했고, 그날은 나와 Henry 그리고 어째선지 Henry의 동생까지 어디선가 나타나서 함께 패러글라이딩을 했다.


콜롬비아는 커피가 유명하다 하여 길거리에서 커피를 마셨다.


 "위스키? 보드카?"

라는 물음에 뭔지도 모르고 '위스키'라 대답을 했다.

그리고 아저씨는 그대로 커피에 위스키를 넣어주셨다.


(?)


모든 콜롬비아 커피에는 술이 들어가나?

나중에 Henry한테 물어보니 모든 곳이 그렇지는 않단다.

아주 잠깐, 편견이 생길 뻔했다.




위스키? 보드카?




Henry네 집에서 머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Henry의 딸 Sara가 만들어 주었다.

당시 만 2살 아기였던 Sara는 처음 보는 외국인이 신기했는지, 한참을 엄마나 아빠 뒤에 숨어 나를 관찰하곤 했다.

내가 어디를 가도 항상 Sara는 엄마나 아빠, 또 어떤 날은 할머니나 할아버지, 그들마저 없을 땐 벽이나 사물뒤에 숨어 나를 관찰했다.

눈이 마주쳐 인사를 하거나, 가까이 오라 부르면 그대로 숨어버렸다. (귀여워)

그 모습이 귀여워 Henry와 Sandra는 자꾸만 나에게 가보라고 Sara의 등을 밀었고, 그럴수록 Sara는 더욱더 그들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Sara도 내가 조금 친숙해졌는지, 거리감을 줄여왔다.

인사를 하면 도망치기 바빴던 아이가 같이 인사를 해주었다.

밥 먹을 땐 항상 나와 가장 먼 곳에 앉아있더니 어느 순간부턴 옆에 앉아서 먹었다.


Sara 덕분에 가장 크게 웃은 건 축제 때의 일이다.



마침 어떤 축제와도 일정이 겹쳐 밤에 구경도 갔다.



마을 곳곳에 수많은 조명으로 가득 채워 노점이나 행렬 등으로 인파가 많이 몰린 축제였다.

우리도 축제를 구경하러 밖으로 나갔고,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Sara도 신이 났는지 기분이 좋았고, 그 텐션을 억누르지 못하고 뛰어다녔다.


'저러다 넘어질 텐데..'라고 걱정을 하던 찰나.

아니나 다를까 Sara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졌을 때의 아픔보단 놀람이 컸을 것이다. 그 놀람을 아이들은 울음으로 표출한다.

넘어지고 서럽게 울던 Sara에게 Sandra가 다가갔다.

그런데 Sara는 그런 엄마 Sandra를 스쳐지나 나에게로 달려와 안겼다.


그날 이후로 Sara는 껌딱지처럼 나에게 붙어 있었다.

옆에 앉아서 밥 먹던 아이가 이제는 무릎 위에 올라와서 먹기 시작했고,

어딜 가도 항상 내 손을 잡고 걸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는데, Henry와 Sandra도 그게 신기하고 웃겼다고 했다.




시간이란 건 참 신기하다.

회사에 출근을 하면 그렇게 시간이 안 간다. 그래서 월화수목금요일은 몹시 길다.

회사에서 퇴근하고 난 저녁시간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시간이 참 빨리 간다.

집 와서 밥 먹고 정리만 했는데 10시가 넘어있다.

토일요일은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간다.


오랜만에 느낀 가족의 정이 따뜻해서였을까?

Henry네 가족과 지낸 일주일이란 시간은 나에게 퇴근한 이후의 저녁시간, 주말과 같은 시간이었다.

정말 너무도 빠르게 지나갔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낙화. 이형기作)

마음 같아선 한 달이고 머무르고 싶었지만, 나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이들에게 남고 싶었다.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행복했던 시간과 기억이 많은 만큼 헤어지는 일은 어려웠다.

무엇보다 Sara가 마음에 쓰여, 우리는 Sara가 자고 있을 때 떠나기로 정했다.

잠든 Sara를 품에 안고 배웅해 주던 Henry와 Sandra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

그들은 내 남은 여행의 안녕을 빌어주었고, 다음에 또 꼭! 반드시! 놀러 오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글을 쓰다 문뜩 Henry와 그의 가족들의 안부가 궁금해져, 오랜만에 메시지를 보내보았다.



그는 여전히 나를 기억해주고 있었다.



최근 Henry는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죽다 살아났다고 했다.

그의 사고는 신문 기사에 나올 정도로 큰 사고였고, 그는 오랜 기간 입원을 했다 얼마 전에 퇴원을 했단다.



진짜로.. 살아있는게 신기할 정도지만 정말 너무 다행이다 ㅠㅠ
죽다 살아나도 여전히 Henry는 해맑고 긍정적이었다.



사고 난 사진과 기사를 함께 보내주었다. 지금 자신은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으며, 이렇게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이야기하는 Henry의 말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이어서 최근에는 Sara가 운전 연습을 시작했다면서 동영상을 보내줬다.


'Sara가 벌써 운전을 배울 만큼 컸나!?'

라며 격세지감을 느끼며 영상을 보는데...

Sara는 여전히 어렸다.(휴 다행이다. 내가 많이 늙은 게 아니구먼.)


..?


너무 놀라 Sara가 몇 살이냐 물어보니 12살이란다.

그리고 본인은 9살에 시작해서 15살에 라이선스를 땄단다.(익스트림 콜롬비아)


..ㅎ

이젠 웃음 밖에 안 나온다.

큰 사고가 났었지만 다행히 그는 잘 회복했고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



그는 여전히 유쾌했고, 긍정적이었고, 살짝 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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