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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kyo
Mar 08. 2024
29. 플래시 너머로 보이는 건 나를 겨눈 샷건이었다.
니카라과 | 이별의 순간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 1
"Oh Nonononono 살려주세요!!!"
"나는 여행자예요! 살려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사람이 위기에 놓이면 초능력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위기의 순간, 방언 터지듯 스페인어가 막힘 없이 나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 'Hola'와 'Gracias' 밖에 모르던 나였는데..
(사건발생 4시간 전)
우띨라에서 어드밴스드 오픈워터 다이버까지 딴 나는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나의 목적지는 코스타리카(CostaRica).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서 환승도시 리바스를 거쳐 국경을 넘어야 한다.
산페드로술라(San Pedro Sula)를 경유해 버스를 타고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리바스로 가는 버스는 새벽 4시부터.
해가 떨어지기 전에 코스타리카에 도착하기 위해선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첫차를 타기로 마음먹는다.
그건 그렇고..
해가 떨어지기 전에 코스타리카로 도착하겠다는 생각은 좋았으나,
왜 해가 떨어지기 전에 마나과에 도착할 생각은 못했던 걸까?
마나과에 도착하니 시간이 어느덧 밤 10시를 향해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전에 왔을 때와는 다른 터미널.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근처에 숙소라곤 없다.
전에도 한번 언급했었지만, 중앙아메리카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수도의 치안이 가장 좋지 않다.
이곳 마나과도 그중 한 곳이다.
전 재산을 들고 이동하는 여행자에게 밤 10시의 마나과(심지어 도시 외곽의 인적 드문 터미널)는 가혹한 환경이다.
더군다나 아직도 한국물(?)을 덜 빼서(??) 귀티(???)가 나는 나는 세렝게티 초원의 한 마리의 임팔라 같다. 그것도 다리를 다친 임팔라.
숙소를 잡기엔 틀린 것 같고, 플랜 B로 24시간 운영하는 가게를 찾기로 했다.
만만한 곳이 패스트푸드점이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패스트푸드점이 있다.
가게로 들어가 간단하게 요깃거리를 주문하며 물었다.
"여기 24시간인가요?"
다행이다. 그렇단다.
이곳에서 시간을 때우다 시간에 맞춰 터미널로 갈 생각이었다.
이미 패스트푸드점에서 시간을 때워본 경험이 있기에, 이제는 패스트푸드점의 불편한 의자도 리클라이너 소파인 듯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요령이 생겼다.
그렇게 매장 구석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장거리버스를 탈 때 화장실이 가고 싶어 지는 것만큼 곤란한 일이 없기에, 가급적 장거리 버스를 타기 전에는 공복 상태를 만들어둔다.
밤의 마나과는 이런 나의 공복조차 잊게 만드는 긴장감을 주는 곳이지만, 불 밝은 패스트푸드점의 안락함이 나의 긴장을 풀게 해 주었던 걸까? 미친 듯이 배가 고파졌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허겁지겁 입에 욱여넣었다.
허기를 채우고 나니 내 상태와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반바지 밑으로 보이는 맨다리는 무자비한 샌드플라이 덕분에 너덜너덜하다.
이 정도면 며칠 굶은 모기도 피 빨러 왔다가 '아이쿠 미안합니다. 이미 개털이시군요.' 하고 돌아갈 것이다.
그 밑으로 크록스의 라인에 맞춰 탄 발이 보인다.
화산에서 윗 가죽과 밑창이 분리된 워커와 이별하고 계속 크록스만 신고 다닌다.
(한국에서는 모양이 이상하다고 신지도 않았던 건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나 사서 들고 왔던 것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 몰랐다.)
배낭 속 어딘가에 양말이 몇 개 있지만, 빨래하기 귀찮아 양말을 안 신고 다닌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나마 다행인 건 크록스에 난 구멍 모양으로 발등이 타지 않은 것 정도?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에서 계절에 맞게 옷을 입어가며 적당히 기온에 맞춰, 적당히 햇볕을 가리며, 적당히 벌레를 피하며, 적당히 보호받아온 피부들이었는데, 멀리 이국의
가혹한
환경에
노출되어 방치된 피부들이 불쌍하다 느껴질 즈음. 매장 직원들이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11시 40분쯤.
24시간 운영하는 곳이니 그냥 당연히 손님이 한적한 시간대에 청소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를 바라보는 직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무언의 눈치를 주는 듯한 이 느낌.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내 낯짝은 철판보다 두꺼우니까.'
청소를 하던 직원 한 명이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뭐라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알아들을 수 없다.
하지만 이건 알겠다. 곧 문 닫으니 나가라는 것.
나는 내일의 나를 과대평가하고 어제의 나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 할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욕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때, 오늘의 나도 과대평가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 스페인어 며칠 조금 배웠다고, 직원의 말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24시간 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24시에 문 닫는다는 말이었다.
밤 10시 마나과의 뒷골목을 헤매고 다니다 겨우 보금자리를 찾았던 나는
밤 12시 다시 뒷골목을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테구시갈파에서 한번 경험을 해서였을까?
온두라스에서 마나과에 오는 버스를 타고 오는 중, 목적지에 점점 가까워짐과 동시에 해가 점점 지고 있음을 직감한 나는 급하게 하지만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었다.
플랜 A. 예약은 안 했지만 어쨌든, 마나과에 도착하자마자 재빠르게 숙소를 잡는다.
치밀한 계획이 '어쨌든'으로 시작한 게 뭔가 어디선가 본 것 같지만(기분 탓인가?) 전에 마나과에서 묵었던 숙소가 있었기에 대충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전과 다른 터미널에 도착하면서 실패.
괜찮다. 나는 치밀한 사람(?)이다. 플랜 B가 있으니.
플랜 B. 24시간 영업하는 가게를 찾아 죽치고 앉아있는다.
하지만 공용어의 부재의 한계를 이기지 못했다. 무지에서 온 오해로 다시 거리의 시인이 되었다.
이 방법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최후의 수단 플랜 C를 실행에 옮길 때이다.
플랜 C. 바로 적당한 곳(?)에 몸을 숨겨 노숙을 한다.
우리는
인적이
드문
곳은
위험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인적이 드물기에, 사건이 발생하기 쉽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과연 저것이 팩트인가를.
발상을
바꿔보았다.
'인적이 드물기에 사건이 발생하기 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적이 드물기에 나에게 사건을 일으킬(?) 사람도
적지 않을까?
'
그렇게 나는 더 으쓱한 곳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과거의 나는 생각보다 훨씬 미친놈이었던 것 같다.)
얼마나 걸었을까?
주택가가 나타났다. 그리고 어느 한 공간이 내 눈에 띄었다.
집과 집 사이에 있는 좁은 공간. 가까이서 보니 LPG가스통과 다른 물건들이 조금 쌓여있다.
가로등 불이 닿는 인도와 달리 저기 저 공간까지는 불빛이 닿지 않아 그 너머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저 뒤에 배낭을 내려놓고, 담요를 덮고 있으면 아무도 여기에 사람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멀리서 떨어져 있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래도 옆 집에 창문이 열려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안에서 자고 있는 사람이 코를 고는 듯했다.
그래서 최대한 조용히 지나가려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 플래시는 켜지 않았다.
그래서 바닥에 있는 물체를 발로 차버렸다.
우당탕
야심한 밤. 들려오는 소리라곤 아저씨 코 고는 소리 밖에 안 들렸던 시간.
그래서일까? 우당탕 소리는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나는 부디 집안에서 코 고는 아저씨가 깨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뻔한 이야기지만,
나의
간절한
바람은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
하늘에
닿지 못했다.
내가 낸 발 밑의 우당탕 소리에 대응하듯 맞은편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우당탕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코 고는 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고, 그 빈 사운드를 '어떤 소리'와 '어떤 외침'이 메워주고 있었다.
(그 당시의 긴급한 상황을 표현하기에 이 비속어보다 적절하고 와닿는 말이 과연 한국어에 뭐가 있을까 고민했지만, 결국 찾지 못해 이 표현을 쓰는 것에 미리 양해를 구한다.)
ㅈ됨을 느낀 나는 급히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플래시 너머로 보이는 건 나를 겨눈
샷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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