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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 Mar 12. 2024

30.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니카라과 | 이별의 순간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 2

지구를 한 바퀴 혹은 그 이상 여행한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지만 적지 않은 돈이 든다.

어떤 이는 여행 전에 일을 해서 여행 경비를 마련한 후 여행을 하고, 또 어떤 이는 일단 떠난 다음에 현지에서 일을 하면서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도 한다.

나는 여행 전에 일을 해서 여행 경비를 마련한 후, 여행을 하던 도중에 현지에서 일을 하며 추가로 경비를 마련했다.

어찌 됐건, 세계일주 여행자라는 건 생각보다 넉넉한 사람들은 드물다는 말을 하고 싶다.

당장 가지고 있는 현금이 부족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나아가 여행의 끝에 대한 기약이 없는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선 항상 아끼는 생활이 몸에 베이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나는 보다 현지인의 삶과 비슷한 삶을 체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가급적 로컬버스를 이용하고,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식당이 아닌 현지인들이 주로 가는 식당을 가고, 그들이 이용하는 시장에서 장을 보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저렴한 것 =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란 공식은 성립되지 않지만,

'돈을 아끼는 것 =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어쩌면 일부 맞는 말일 수 있다.

비싸고 좋은 숙소를 두고, 저렴한 숙소를 잡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숙소를 잡느냐 잡지 않느냐의 수준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때에 따라 목숨을 담보로 잡아두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물론 이번의 경우 금전적인 문제로 숙소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내 목숨을 담보로 잡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ㅈ됨을 느낀 나는 급히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플래시 너머로 보이는 건 나를 겨눈 샷건이었다.


군대를 나온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총기는 익숙한 무기이다.

그리고 군대에서 사격을 할 때면 가장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 총기를 사람에게 겨누지 말라는 것이다.

총기는 군생활을 하는 동안 지겹도록 봐왔다.

하지만 그 총기가 누군가를 겨눈 것은 나에게 익숙지 못한 장면이었다.

하물며 그 누군가가 나라니!


이 익숙지 못한 장면에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그렇다고 이 위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더불어 총알도 받아들일 만큼의 대인배가 나는 아니었다.

아직 이 생에 남은 미련이 많다.


 "Oh Nonononono 살려주세요!!!"

 "나는 여행자예요! 살려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사람이 위기에 놓이면 초능력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위기의 순간, 방언 터지듯 스페인어가 막힘 없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끊임없이 나오는 스페인어에 스스로도 놀랐지만, 그렇다고 터져 나온 방언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샷건을 비췄던 핸드폰 플래시의 방향을 나로 틀었다.

나의 모습을 상대에게 보여 줌으로써,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며, 위해를 가할 사람이 아님을.

어떠한 흉기나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음을.

그냥 한 명의 불쌍하고 가난한 여행자임을 강력하게 어필했다.


얼마나 난폭한 대치 상태가 지속되었을까?

지난 내 20여 년의 삶을 돌이켜 볼 수 있을 만큼의 긴 시간이 흘렀다(이게 바로 주마등이라는 건가?)고 느껴졌지만 사실은 몇 초 정도려나? 

간절했던 나의 바람은 하늘에 닿지 못했지만, 다행히 나의 진심은 상대에게 닿은 듯하다.

샷건을 들고 있던 아저씨는 조심스레 총을 내려놓았다.


 '오해가 풀렸나?'


나는 건물 안에서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아저씨가 왜 저기서 나오는지,

그리고 왜 나에게 샷건을 겨누고 있는지 상황 파악조차 못했지만, 우선 아저씨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조금 더 부연설명을 했다.


 "새벽 4시에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야 해요. 그래서 그때까지 좀 쉬려고 왔었어요."

 "혹시 괜찮다면 저기서 버스 타기 전까지만 시간을 보내다 가도 될까요?"


...

아저씨는 아무 말이 없다.

아주 살짝 앞으로 나아가 보았다.

여전히 아저씨는 어떠한 말도, 어떠한 반응도 없다.

그러더니 아저씨는 건물 앞 쪽으로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아저씨의 무언을 긍정으로 이해했다.(?)


에어컨 실외기 뒤에 자리를 잡고 담요를 덮어 앉았다.

내일을 생각한다면 지금 조금이라도 잠을 자두는 것이 좋지만, 아무래도 아까 있었던 소동 때문에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과묵한 아저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눈치가 보였다.


저벅저벅


아저씨가 나에게로 온다. 그리곤 나오라고 손짓을 한다.

아저씨 곁으로 갔더니 아저씨가 어떤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한다.


CCTV


다시 건물을 찬찬히 살펴보니 아무래도 여기는 은행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 건물인 듯했다.

그리고 이 아저씨는 이곳의 경비를 담당하는 사람. 아무래도 아까 내가 들어갔던 곳이 경비아저씨의 쉼 터였나보다.

아저씨는 CCTV가 돌아가고 있으니, 여기선 머무를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어쩔 수 없지..'


아무래도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건 무리인 듯하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소동까지 벌어졌는데도 몇 시간 몸 뉘 일 공간 하나 마련하지 못함에 조금 속이 상했다.

다시 다른 곳을 알아봐야지 뭐.

짐을 주섬주섬 챙겨 떠나려고 하니, 이번에도 아저씨가 손짓을 한다.

이번엔 따라오라는 듯하다.


 '뭐지? 왜 나보고 따라오라는 거지?'

조금 경계했지만 이미 총구가 한번 겨눠졌었기에 그보다 더 무서운 경험은 없다는 생각에 아주 조금, 용감해졌다.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여차하면 도망쳐 볼 생각이었다.) 아저씨를 따라갔다.

길을 건넜다. 그러더니 자물쇠가 걸린 나무로 된 조잡한 문을 연다.

건물과 건물사이에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앞에 문을 달아 만든 간이 창고 같은 장소였다.

바닥엔 내 키 만한 박스가 깔려있다.

아까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던 건 여기에 박스를 깔러 왔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저씨는 나에게 밖에는 위험하니, 여기서 쉬라고 말한다.

혹시 모르니 문은 잠가뒀다가 아침에 깨우러 와줄 테니, 그리고 자기가 밖에서 봐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한다.

내가 아직도 긴장한 채로 창고 안에 서 있으니, 나를 배려해서 문을 닫고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여전히 의심의 마음을 거두지 못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기에 박스 위에 자리를 잡았다.

담요를 덮고 누웠으나, 도무지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 그래도 일단? 몸 누일 곳이 생겼으니 다행인 건가..? ㅎ




문 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잠들 수 없을 것 같던 우려가 무색하게 어느샌가 잠이 들었었나 보다.

얕게 잠든 탓인지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왔던 아저씨는 물 하나를 내 옆에 두고 다시 나가셨다.

물 한잔 마시니 정신이 조금씩 맑아진다.

(사실 이 물에 혹시 뭘 탄 건 아닐까 의심했다.)

시간을 보니 딱 4시였다.

어제 말씀하신 대로 시간 맞춰 나를 깨워주셨다.


밖으로 나갔더니 아저씨가 잘 잤냐고 물어보신다.

덕분에 잘 잤다고, 감사하다고, 이제 버스시간이 됐으니 가보겠다고 말을 했다.

아저씨가 나를 다시 잡는다.

아직은 길가를 걸어 다니기에 위험한 시간이란다.

자기랑 여기 좀 더 있다가 해가 뜨기 시작하면 출발하라고 하신다.

아저씨의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는데, 무리해서 떠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에 법을 따라야 하듯, 현지인이 하는 충고는 따르는 것이 좋다.

그렇게 도로 옆 보도블록에 우리 둘은 앉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거의 단어의 나열뿐인 서툰 언어 실력이었지만, 아저씨는 천천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내가 리바스로 간다는 말에 아저씨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는 집이 거기라고, 그곳에 가족들이 있다고 말해주셨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던 아저씨의 얼굴 윤곽이 점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표정에 무서울 거라 생각했던 아저씨의 얼굴은 생각보다 푸근하고 정이 많아 보인다.

마나과의 지난밤은 어찌 그리 차갑나 싶을 정도로 삭막했는데, 해가 떠올라 붉은빛이 퍼져 나오는 아침의 마나과는 포근하다.

떠날 때가 되었다.

이젠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인사를 하자 조용히 나를 안아주셨다. 여행 잘하라는 말도 빠트리지 않으신다.


건물 경비를 하시는 아저씨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내가 아저씨에게 위협을 가한 거수자임이 분명하다. 나로 인해 아저씨도 많이 놀랐을 것이고, 그래서 화가 났을 법도 한데 이렇게까지 나를 걱정해 주시고 생각해 주시는 마음이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리고 아저씨의 호의를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헤어지는 이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에 대한 호의가 아무 대가 없는 호의임을 알게 된 것이 안타까웠다. 아저씨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행을 하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호의를 베풀어 온다.

그중에는 아저씨처럼 순수한 마음에 아무 대가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어떤 목적(이 경우, 사기나 금전적 갈취가 대다수이다.)을 가지고 접근해 오는 사람들도 있다. 어쩌면 후자가 더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을 내가 알게 되는 건 언제나 그들과 헤어지는 순간이다.

범죄는 당하고 나서야 당한 줄 알고, 도움은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도움받은 줄 안다.

그러나 그땐 이미 그들은 떠나고 없다.

그것이 언제나 안타깝다.

그래서 그들에게 받은 감사한 마음을 최대한 다른 사람들에게, 당시의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아가고자 한다.


이 일이 2014년에 일어난 일이니 이제 딱 10년이 지났다.

10년이 지나도 그때의 일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저씨의 얼굴은 점점 흐려져 이제는 실루엣 정도로 밖에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아저씨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그때 찍었던 사진 한 장. 그게 아직 남아있었더라면, 그러면 좋았을 텐데..

세상엔 아저씨처럼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큰 사건을 겪게 되지만 그것은 조금 더 이후의 이야기... 




아저씨의 걱정과 도움으로 별 탈 없이 버스를 탄 나는, 리바스를 거쳐 코스타리카로 가기 위한 국경마을에 도착했다.


코스타리카로 넘어가기 위해 들른 국경마을.

이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

국경을 넘기 위한 사람들, 환전을 해주는 환전상들, 잡화를 파는 (잡)상인들, 그중에는 해먹을 파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데


...?



네가 왜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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