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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 Jan 30. 2024

27. 우리는 덤덤히 마지막일지 모를 인사를 건넸다.

온두라스 |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

오픈워터 다이버 자격증을 따고 어드밴스드 오픈워터 다이버 자격증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하루 휴식을 가졌다.

다이빙을 배운 친구들과 함께 옆에 있는 다른 섬에 투어를 떠났다.


일정은 간단하다. 보트를 타고 섬의 해변으로 간다. 그곳에서 논다. 밥을 먹는다. 또 논다. 보트를 타고 다시 돌아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도착한 섬은 예뻤다.

해운대나 리우와 같이 관광지화로 본래의 모습을 잃은 유명한 해변들과 달리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오래전 그 모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해변과 카리브해의 에메랄드 빛 바다의 조화는 감히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이 있다.


거칠지 않은 잔잔한 파도소리에 귀 기울여 동해에서는 볼 수 없는 색의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몸에 힘을 빼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따사로이 내려쬐는 햇살에 눈을 감으면.

내 몸이 투명해지는 느낌이 든다.


잔잔한 파도가 발목을 간질이는 깊이까지 발을 담근다.

물은 너무 차지도 너무 따뜻하지도 않게 적절하게 시원하다.

햇살에 비친 내 그림자가 얇은 바닷물에 투영되어 파도의 흰색 그림자와 함께 일렁인다.


이 넓은 바다에 무수히 많은 흰색 파도 그림자에 오직 하나 나의 검은 그림자가 함께 일렁인다.

그 모습이 낯설어, 그렇지만 넋을 잃도록 청미하여 평소와 다른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오직 나와 내 주변의 시간만이 느리게 흘러간다.


마음이 조금 넉넉해진다.




아름다운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해변에는 그놈들이 있다.



넉넉해진 마음을 채우고 싶어 져,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를 흩트리며 얼굴을 간질인다.

기분 좋은 간지러움에 분위기 있는 척 머리를 쓸어 넘겨본다.


이번엔 파도가 발목을 간질인다.

허리를 숙여 발목을 살짝 긁었다.

그랬더니 이번엔 종아리 부근이 간지럽다.


 '이상하다. 파도는 발목까지 밖에 안 오는데..'


간지러워진 부위를 자세히 보니 아주 조금 빨갛게 부어올라 무언가에 물린 자국이 있다.

모기에 물렸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지만, 딱히 모기처럼 보이는 벌레는 없다.

대신 자그마한 날파리 같은 아이들이 날아다닌다.

그냥 어쩌다 뭔가에게 물렸겠거니 그냥 참고 계속 걸었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일행들과 멀어진 거 같아 다시 처음 보트에서 내렸던 해변가로 돌아왔다.

그늘에 잠시 앉아 쉬고 있자니 다른 사람들과 놀던 J누나가 옆으로 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떠들고 있는데 날파리 같은 벌레들이 몸에 앉는다.

손을 흔들어 벌레들을 쫓아낸다.

 

'날파린데 뭐.'


그랬는데..

어쩐지 그 날파리 같은 벌레들이 앉았던 자리가 점점 간지러워졌다.

눈치채지 못했는데 어느샌가 다리에는 수십여 개의 자국들이 나있다.

J누나도 비슷한지 다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일반 모기에게 물린 간지러움의 정도를 1이라 했을 때,

군대에서 그리고 산에서 물린 아디다스 모기(?)의 간지러움의 정도를 3이라 했을 때,

이 간지러움은 10의 간지러움이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어떤 재난 영화에서 연가시에 감염되어 미친 듯이 물을 찾는 사람처럼,

우리는 미친 듯이 시원함을 추구하며 다리를 긁기 시작했다. 다리에 상처가 나고 피가 나지만 멈출 수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몸을 긁는다는 행위에서 강한 엔도르핀의 분비를 느낀다.

함께 왔던 다이버샵의 스태프가 다리를 벅벅 긁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샌드플라이'


스태프는 주변에 날아다니는 저 날파리 같은 벌레의 정체가 우리가 흔히 아는 날파리가 아니라 샌드플라이라고 알려주었다.


모기는 침을 꽂아 피를 뽑아 먹는다. 이때 모기 본인의 타액이 혈액 속에 침투하며 혈액 응고를 막는 단백질이 생성된다. 이 단백질에 반응하며 몸에서 분비하는 히스타민이라는 물질로 인해 모기에 물린 부위는 붓고 가려워진다.

예로부터 모기에 물렸을 때 행해야 할 훌륭한 민간요법이 구전되어 한여름 우리의 삶을 아주 조금 평화롭게 만들어준다.

바로 십자가 자국 내기.

하지만 그건 모기에 물렸을 때의 이야기다.


이놈들은 빨대를 꽂아 피를 빠는 모기와 달리 피부를 물어뜯는 방식으로 피를 빤다고 한다.(독한 놈..)


십자가 자국 내기보다 안티구아에서 달군 숟가락으로 내 다리를 지졌던 Daniel의 처치가 지금은 더 적절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숟가락도 숟가락을 달굴 뜨거운 물도 없었다.

스태프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벌레기피제를 꺼내 우리에게 뿌려주었다.

이미 물린 건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더 물리지 말라며.

(알고 보니 이 지역 사람들에게 벌레기피제는 필수나 다름없었다.)

(이름도 기억난다. 'OFF!'.. 어쩐지 상점에 많이 팔더라.)




급한 대로 햇볕이 가장 쨍쨍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다리에 따뜻한 모래를 끼얹었다.

햇볕에 잘 달궈진 모래의 열기가 아주 조금이나마 샌드플라이의 독성을 중화해 주었던 걸까?

조금 살만해졌다.


그렇게 모래에 다리를 묻고 앉아 바다를 보고 있으니 내 앞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우리 일행과는 따로 이곳에 투어를 온 사람들인 듯싶었다.

눈앞에 지나가길래 무심코 봤는데,


!?


그중에 낯이 익은 사람이 보인다.


 "Yuto!!"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쳤다.

그랬다. 어쩐지 계속 무언가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했는데, Yuto였다.

하루 이틀쯤 뒤 바로 다이빙 수업을 하면 마주칠 줄 알았던 Yuto였는데, 내가 오픈워터 다이버 자격증을 따는 날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나도 다이빙 수업이 벅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모래에서 일어나 바로 Yuto에게 갔다.

Yuto도 여기서 나를 볼 줄 몰랐는지, 놀라움 반 반가움 반의 표정으로 나에게 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틀간 누워있다 다른 샵에서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수업에 앞서 투어에 왔다고.

내일부터 오픈워터 다이버 수업을 시작할 것이란다.

잠깐 서서 이야기를 나눴지만, 서로 일행이 있어 오래 붙잡아 두지는 않았다.


 "그래 Yuto. 다이빙 잘 배우고, 몸 조심해! 안녕!"


어쩌면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짧다면 짧길다면 지난 2주 동안 Yuto와는 함께 여행하며 맛있는 것도 먹고, 술도 마시고, 또 때론 의견충돌에 투닥거리기도 하며 동고동락했지만 고작 3일 스쿠버다이빙을 배우면서 Yuto를 잊어버린 나.

그리고 내가 스쿠버다이빙을 배우는 동안 다른 샵을 구했다는 것에 대해 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Yuto.

앞으로 우리가 다시 의기투합해서 우띨라 섬 이후의 여행을 함께 할 것 같지는 않음을.

우리의 2주간의 동행은 우띨라 섬에 도착한 순간이 마지막이었음을.


우리가 산 후안 델 수르에서 우연히 처음 만났던 것처럼, 오늘 이 섬에서 만났던 것처럼,

앞으로 각자의 여행을 계속하다 보면 또 어디선가 마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희박한 확률.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것 같지도 않다. 서운함이나 미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다.

그냥 지난 2주간 함께 여행하며 느낀 서로의 성향과 상성이 그러할 뿐이다.

기쁨도 해방감도 없다. 아쉬움도 미련도 쓸쓸함도 없다.

그냥 2주간 함께 여행했다는 추억만 있을 뿐.


그래서 어떤 이유도, 변명도, 설명도 필요 없었다.



우리는 덤덤히 마지막일지 모를 인사를 건넸다.



샌드플라이 때문에 다리는 너덜너덜해졌지만. 그래도 석양은 언제나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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