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전상서 1 [1987년 그 언저리에]

가출의 서막이 오르다.

by Oscar Jung

부모님 전상서 1 [1987년 그 언저리에]


아버지, 저는 떠납니다.

아버지께서 이 편지를 읽으실 즈음, 저는 아마도 익산역에서 서울행 첫 기차를 타고 어느 좌석 구석에 웅크려 꾸벅 졸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밤새 가슴이 설레어 잠을 한숨도 못 잤거든요. ‘가출’이라는 건, 할 때마다 참 가슴 설레게 만드는 신기한 도발(?) 같습니다.

며칠 전부터 노트를 펼쳐놓고 가출의 큰 설계를 시작으로, 세부적인 동선까지 디테일하게 정리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벅찬 일인지 아버지께서는 잘 모르실 겁니다. 이번 가출은 목적지를 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중간 경유지에 들러 만날 친구를 정하고, 도착지에서는 미리 연락해 둔 지인이 역 대합실로 마중 나오게 하는 등... 아버지가 회사 업무에 신경 쓰시는 것만큼이나 신경 쓸 게 생각보다 많습니다.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제가 가출 경력이 좀 되지 않습니까? 저는 다 계획이 있답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가출을 감행하는 이유가, 단지 며칠 전 사건 때문만은 아닙니다. 기억하시죠? 제가 기타를 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공부는 안 하고 딴따라질이냐” 하시며 기타를 집어 던지셨던 그날요. 방구석 모퉁이로 내팽개쳐져 줄이 다 끊어지고 풀어진 제 기타는, 마치 비 오는 밤 성황당 주변을 배회하는 산발한 미친년 머리 꼴이 되었습니다. 자기는 죄가 없고 억울하다며 제 눈앞에서 통곡하는 기타의 그 처절한 하소연 때문에 떠나는 것만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또한 제가 굳이 이 먼 길을 가는데 짐스럽게 기타를 챙기는 이유가, 제가 없는 동안 화가 난 아버지께서 기타에 휘발유를 뿌려 화형식을 거행하거나, 앞마당 장작 패는 도끼로 기타를 해하실까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그냥 기타가 혼자 있으면 외로울까 봐 데리고 떠나는 것이니, 너무 분해하지 마십시오. 화풀이하실 곳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겨우내 땔 장작이라도 많이 패 놓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제 기타는 죄가 없습니다.


가출의 사유가 딱히 특정한 하나는 아닙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나 설날 즈음 돌아올 생각도 없습니다. 아마도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제 기타가 그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상처를 치유할 시간도 필요하니, 기분도 풀어줄 겸 동해안 바닷바람이라도 좀 쐬어 주겠습니다. 전화든 서신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연락은 드리겠습니다.


아, 참! 엄마께 전해 주실 말씀이 있습니다. 어차피 곧 알게 되실 테니 미리 이실직고합니다. 작년에 엄마가 곗돈 타서 장만하신 금목걸이와 금반지, 제 가방에 고이 넣어 갑니다. 아무래도 이번 ‘가출 여행(?)’은 좀 길어질 듯해서요. 다른 가출보다 여비가 많이 들 것 같아 이번엔 좀 큰 걸 들고 떠납니다. 아버지께서도 사랑하는 아들이 가출해서 서울역 만화방 같은 데서 라면이나 끓여 먹으며 고행의 시간을 갖는 건 원치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서울역 만화방을 안 가겠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아무리 가출을 했어도 고기며 각종 비타민 등 영양 섭취에 소홀하지 않게 살겠다는, 소자의 굳은 의지로 받아주십시오.


아버지, 지금쯤 머리끝까지 화가 나셔서 손을 부들부들 떠시며 담배를 물고 계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는 다 보입니다. 식전 담배는 몸에 해롭다고 늘 제게 조언해 주셨으니, 아침 챙겨 드시고 마음을 좀 가라앉히신 후에 태우시는 게 건강에 좋지 않겠습니까?

아들이 엄마 패물을 들고 튀는 게 흔한 일은 아니겠지만, 사나이가 뭐 그런 거 가지고 화를 내십니까? 금목걸이나 반지 같은 지극히 물욕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아들보다 소중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대신 그에 상응하는 걸 엄마에게 사드리면 간단할 일입니다.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으시면... 뭐, 사랑으로라도 엄마를 위로해 드리세요.


아버지, 저는 반드시 성공적인(?) 가출을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꼭 사전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화가 덜 풀려 예고 없이 컴백한 아들이나 기타에게 해를 끼칠 확률을 파악해야 하니까요.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조짐이 보인다면, 저는 2차 가출 동선까지 설계해야 합니다. 또한 아버지가 저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실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는 차원이기도 하니, 그때는 거짓 없이 정직하고 진솔하게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번처럼 들어오라고 해놓고 야구 방망이를 들고 현관부터 이단 옆차기를 날리시는, 간사한 쪽발이들보다 못한 무분별한 행동은 안 하셨으면 합니다.


물론, 아버지가 하해와 같은 넓은 아량과 고결한 인품으로 인류애가 가득한 분이라는 걸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혹여라도 아버지께서 저와 제 기타의 신변을 위협하신다면, 저에게도 ‘히든카드’가 있다는 걸 미리 알려드립니다.

아시죠? 그... ‘청주댁’ 말입니다. 저번 달이었나요? 아버지가 저녁나절 집에 전화하셔서 술집으로 와 자전거를 가져가라 하셨죠. 그래서 제가 째보 선창가 작부집으로 자전거를 가지러 갔다가 꽤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했거든요. 전 아버지가 그렇게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태어나서 처음 봤습니다. 짙은 화장에 요상한 한복을 입은, 머리는 뽀글뽀글 볶아 촌스럽게 생긴 그 아줌마와 아버지가 젓가락 장단을 맞추며 ‘홍도야 울지 마라’를 술집이 떠나가라 부르시더군요. 노래가 끝날 때마다 그 아줌마의 한복 저고리를 제치고 가슴팍에 손을 넣으시는 장면... 문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전 아버지의 여자 취향이 참 독특하시다고 생각했습니다. 입술에 인육을 먹은 듯 핏빛 립스틱을 바른 그 아줌마가 그리 좋으셨습니까? 카메라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제 두 눈으로 찍어서 마음속 폴더에 잘 저장해 두었습니다.


그러고는 밤에 들어오실 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우리 삼 남매가 좋아하는 통닭과 엄마가 좋아하는 이성당 모찌(찹쌀떡)를 사 오셨더군요. 입술과 볼에 묻은 빨간 립스틱 자국은 말끔하게 지우시고요. 아버지, 이해합니다. 남자라면 다 그럴 수 있는 거죠. 너무 당황해하진 마십시오.

아무튼 아버지, 제가 '커밍홈' 하기 전에 저와 제 기타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으시면 저도 다 계획이 있음을 미리 고지해 드립니다. 저와 제 기타의 신변에 문제만 없다면, 우리 집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아침부터 이런 편지를 드리게 되어 소자,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입맛 없으시겠지만 물에 말아서라도 아침은 꼭 챙겨 드세요. 참, 막내에게 당분간 제 방을 써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하지만 제 레코드판과 책장은 건드리지 말라고 해주십시오. 제 나름의 규칙으로 정리해 놓은 거라 순서가 흐트러지면 안 되거든요.

저는 익산역 앞에서 뜨끈한 유부우동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기차에 오를 겁니다. 헤헤헤. 그럼 이만 소자는 물러갑니다. 건강하세요. 엄마 잘 설득해 주시고요.


- 불충한 소자 올림 -


추신: 듀폰 라이터 가져갑니다. 잘 쓰고 돌려드릴게요.    

담배 두 갑도 같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