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년의 낭만적 가출의 역사

소년은 돌아오기 위해 집을 나갔다

by Oscar Jung

어제저녁, 매주 술잔을 기울이는 후배 명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다짜고짜 호텔 객실을 하나 잡아달라더군요. 이유는 뻔했습니다. 또 제수씨와 한바탕 하고 나온 겁니다. (웃음)

저는 기가 차서 쏘아붙였습니다. “야, 이 친구야. 자네 나이가 오십이야, 오십.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이에 무슨 비행 청소년도 아니고, 잊을 만하면 가출이냐? 에이구, 답 없다, 답 없어.”

입으로는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손으로는 호텔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해주고, 맥주 한 잔을 들이켜는데, 문득 옛 기억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이들은 우리 때만큼 가출을 안 하는 것 같네요.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의 저는, 꽤나 알아주는 ‘가출 상습범’이었습니다. (설마 저만 그랬던 건 아니겠죠?)


고등학교 때만 해도 굵직하게 두세 번은 집을 나갔던 것 같습니다. 이유야 차고 넘쳤습니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의 깨알 같은 잔소리가 싫어서, 복장이 불량하다고 혼나서, 몰래 담배 피우다 담임 선생님 몽둥이 찜질이 서러워서... 주말에 몰래 학교 앞 문방구 안방에서 술 마시다 걸려, 사감 선생님이 그 비행 사실을 부모님께 고자질하면 집에 가서 아버지께 또 맞았죠.

그러면 저는 억울함에 가출을 감행하고 서울역 앞 만화방에서 며칠 뒹굴다 결국 담임 선생님 손에 이끌려 귀가하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알고리즘’이었습니다.

하지만 학교로 복귀할 때면, 친구들에게 저의 ‘영웅적인(?) 가출 기행담’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며 으스대곤 했죠.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요. 그러다 또 아버지가 “공부는 안 하고 기타만 치냐”라고 타박하시면, 이번엔 엄마 금반지 슬쩍해서 서울로 상경해 전당포에 맡기고, 그 돈으로 또 만화방 순례를 하고... 참 대책 없는 청춘이었습니다.


그 당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가다 대전역에 잠시 정차하면, 승객들이 우르르 내려 승강장 가락국수(우동)집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요즘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짧은 정차 시간이었죠. 그때 허겁지겁 사 먹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끈한 가락국수 한 그릇의 맛이 아직도 혀끝에 생생합니다. 어쩌면 가출의 목적이 반항이 아니라, 그 가락국수 맛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듭니다.

당시 제 별명은 ‘번바’였습니다. ‘번민의 바다’, 영어로 하면 ‘Sea of Heartbreak’.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무슨 번민이 그리도 많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웃음)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폼이란 폼은 다 잡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탐독했는데 사실 그건 ‘로또 꿈 해몽 책’인 줄 알고 잘못 샀던 겁니다. 그러니 만화책이나 빌려 보던 친구들이 제 눈엔 얼마나 하찮게 보였겠습니까. 선생님도, 어른들도, 세상도 다 제 발아래 있는 것만 같았죠.

제 가출의 결정적 방아쇠를 당긴 건, ‘J.D.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이었습니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퇴학 통지를 받고 기숙사를 뛰쳐나와 3일 동안 뉴욕 거리를 방황하는 그 여정. 그걸 읽으며 저는 전율했고, 완벽하게 감정이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수틀리면 그냥 뛰쳐나가는 어떤 ‘야성(?)’이 제 안에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숱한 가출을 통해 얻은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짐 싸기 기술’입니다. 지금도 출장이든 여행이든, 저는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짐을 꾸립니다. 가출이란 모름지기 들키지 않게 신속해야 하고, 필요한 물건을 정확히 챙겨야 하거든요. 하나라도 빠뜨리면 그게 다 돈이니까요. 이 기술을 훗날 이렇게 자랑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후배 녀석의 철없는 ‘가출 소동’ 덕분에, 아주 오래전 묻어두었던 나의 가출 기행을 다시 꺼내 봅니다. 어쨌든 저는 어릴 적 그렇게 세상을 향해 튀어 나가 보다가, 나중엔 자연스레 흥미를 잃고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지면을 빌려 부모님께 사죄의 마음을 전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때 그 철부지 아들 때문에 속이 얼마나 새카맣게 타들어가셨을까요. 지금 제 나이가 되어보니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은 나이 오십에 또 가출한 저 후배 녀석과 소주나 한잔 기울여야겠습니다. 옛날 제 아버지처럼 몽둥이를 드는 대신, 술 한잔으로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내야지요.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혹시, 가출을 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결국은 다 제자리로, 따뜻한 밥 냄새가 나는 집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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