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말>이라는 시의 첫 구절이다. 얼마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표현인가. 사랑하는 당신과 내가 모두 세상을 떠나 서로를 볼 수 없게 된 어느 날, 당신 곁에 나뭇가지를 흔드는 봄바람이 불어오거든 그것을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 당신을 그리워하는 나의 영혼이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이 시는, 짧은 구절만으로도 깊은 울림을 준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는 이 ‘영혼’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학 사전에는 영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육체 속에 깃들어 생명을 부여하고 마음을 움직인다고 여겨지는 무형의 실체.
인간 이외의 생물과 무생물에 깃들어 있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죽은 이의 넋.
영어로 표기할 때 나는 ‘spirit’보다는 ‘soul’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고 싶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인지하는 영혼의 의미보다는, 'spirit'가 어떤 정신이나 기조에 가까운 의미로 학습되어 왔기 때문이다. 흔히들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영혼이 자유롭다는 것은 과연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1901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헤이브릴의 의사 던컨 맥두걸(Duncan MacDougall)은 '영혼에 무게가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기상천외한 실험에 착수했다. 맥두걸은 영혼이 실재한다면 사람이 사망할 때 반드시 육체를 빠져나갈 것이며,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그 영혼에는 마땅히 무게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임종을 앞둔 환자들의 사망 전후 몸무게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사망 시 발생하는 체액 증발 등 과학적인 질량 변화 요소를 배제하고 남은 미세한 무게의 차이가 곧 '영혼의 무게'일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는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을 앞둔 6명의 환자를 모집했다. 그리고 아주 미세한 무게까지 측정할 수 있는 산업용 정밀 저울 위에 침상을 올린 뒤, 환자들이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의 무게 변화를 기록했다. 어찌 보면 반인륜적일 수 있는 이 실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맥두걸은 아마도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이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며, 사후 당신의 이름이 중요한 연구 자료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설득했을 것이다.
실험 결과는 어땠을까? 한 환자는 사망 시 무게가 줄어들었다가 잠시 뒤 다시 원래 무게로 돌아왔다. 두 명의 환자는 사망 순간에 무게 손실이 있었으나, 수분이 지난 뒤 '영혼의 무게'라기엔 너무 많은 질량이 추가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오직 한 명의 환자만이 정확히 사망 시점에 '21.3g'의 무게를 잃었다.
맥두걸은 저울이 세밀하지 못했다거나 장비의 눈금이 맞지 않았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다른 환자들의 결과는 철저히 무시했다. 그리고 오직 그 한 명의 결과만을 토대로 "영혼의 무게는 21g이다"라고 세상에 발표했다. 당연히 당시 과학계에서는 표본의 허술함과 다양한 변수를 무시한 그의 '선택적 보고'를 비과학적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맥두걸의 기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오직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고 동물에게는 없다는 자신의 굳은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15마리의 개를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진행했다. 그리고 "어떤 개도 사망 후 무게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물 역시 체내에 수분과 공기를 가지고 있는데 사망 시 아무런 무게 변화가 없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며 반대론자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맥두걸이 실험을 위해 병든 개를 구하지 못하자 건강한 개들을 독살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결국 그의 실험은 표본이 너무 작고, 통제 방식에 결함이 있으며, 무엇보다 6명 중 단 한 명의 결과만을 취사선택했다는 점에서 철저히 비과학적인 해프닝으로 치부되었다.
과학계에서는 철저히 외면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맥두걸의 이 황당한 실험은 대중들에게 '영혼에는 무게가 있으며, 그것은 21g이다'라는 묘한 낭만적 개념을 깊이 각인시켰다.
물론 지금도 이런 실험 결과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는 세상이니 놀라운 일도 아니다. 미국의 심령학회나 51구역의 외계인을 믿는 사람들의 흥미로운 술안줏거리가 되기엔 충분한 가설이지만, 나는 이 황당한 주장을 믿지 않는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맥두걸의 실험 과정 이전에 그의 '질문' 자체부터가 잘못되었다고 본다. 애초에 영혼에 왜 무게가 있어야만 하는가?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영혼의 존재를 종교적 관점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영생이나 윤회를 신봉하고, 죽는 순간 육체를 떠나 사후세계로 향하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 것. 그것이 종교가 갖는 순기능이자 위안이라면 나는 기꺼이 동의한다. 개인의 믿음이나 신념은 타인이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니까.
아마도 맥두걸에게 '영혼의 무게'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오직 인간만이 영혼을 가진 고귀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6명 중 1명의 오차를 가지고 그토록 억지스러운 주장을 펼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가설이 진정으로 중요했다면, 기술이 더 발달한 1920년에 임종을 앞둔 맥두걸 본인이 스스로 정밀 저울에 올라 실험을 완성해 달라고 유언이라도 남겼어야 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 종은 약 150만 종으로 추산된다. 그 수많은 생명체 중 유일하게 오직 인간만이 영혼을 품고 있어야 할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 슬프고 맑은 눈을 가진 소나 사슴, 노새, 코끼리에게는 왜 영혼이 없다는 것일까? 깊고 차가운 심해를 평생 외롭게 떠돌다 죽어, 몇 십 년 동안 심해 생물들의 양식이 되어주는 향유고래의 사체. 그 향유고래에게는 왜 영혼이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향유고래의 영혼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 끝없이 깊은 바닷속을 하염없이 유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백번 양보해서 정말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 인류는 진화의 역사 중 도대체 어느 시점부터 영혼을 가지게 된 것일까?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을 거쳐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년의 시간 동안, 150만 종이 넘는 다른 생물들과 함께 진화의 강을 건너오면서 도대체 어느 정확한 지점에서 우리에게만 영혼이 깃들게 되었는가?
결국 인간 중심적인 오만한 주장일 뿐이다. 그 정확한 지점을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과학자나 장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면, 마땅히 다른 모든 생물에게도 영혼이 존재해야 한다.
만약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귀신'이 되는 것이라면, 억울하게 죽은 다른 생물들도 모두 귀신이 되어 나타나야 논리에 맞지 않겠는가. 하지만 서양 영화에는 왜 항상 창백한 백인 여자아이 귀신만 등장하고, 우리나라에는 수백 년이 지나도록 왜 하얀 소복에 산발을 한 처녀 귀신만 나타나는 걸까. 저승사자는 왜 아직도 21세기에 검은 갓을 쓰고 하얀 분칠을 한 남성의 모습으로만 독점되는 걸까.
세렝게티 초원에서 야수에게 찢겨 죽은 얼룩말, 상아 때문에 밀렵꾼에게 억울하게 도살당한 코끼리 모자, 차가운 도로 위에서 흔적도 없이 짓밟혀 스러져간 수많은 로드킬 동물들…. 그들에게도 인간 못지않게 억울하고 서러운 사연이 넘쳐날 텐데, 왜 거리를 떠도는 코끼리 귀신이나 고라니 귀신은 없단 말인가.
한 사람의 생명이 꺼져가는 엄숙한 임종의 순간.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경건함과 유족들의 슬픔은 온데간데없이, 저울의 눈금을 들여다보며 21g의 오차를 찾겠다고 허둥대는 의사들의 모습이 과연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었을까.
던컨 맥두걸이 살아 있다면 나는 그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다.
"그게 뭣이 중헌디?"
광활한 우주와 아득한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한 줌 모래조차 되지 못하는 찰나의 인생에서 그깟 영혼의 무게나 질량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저 어느 봄날, 나뭇가지를 흔드는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내 뺨을 부드럽게 스치면 '아, 누군가의 영혼이 나를 몹시도 그리워하며 다녀갔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 그 스쳐 가는 바람 속에서 그리운 할머니의 얼굴이나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의 미소를 잠시나마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한 번뿐인 이 짧은 인생이 충분히 아름답고 낭만적인 기억으로 채워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