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성 Jul 31. 2024

나의 손절이야기[3]

쫌생이와 열등감덩어리의 콜라보

’콜라보‘ 에서 알 수 있듯 소제목에서 일컫는 쫌생이와 열등감덩어리는 한 사람이고,

그게 나다.

나는 좀스러우면서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다.

오늘은 그 탓에 내가 먼저 손절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쫌생이라서

지금도 돈을 아끼긴 하지만 결혼 전 어느 시점까지의 나는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쫌생이였다.

지금 말하는 절약이 명품백이나 해외여행 등에 돈을 쓰지 않는 거라면 어릴 적 내게 있어 절약은 밥값, 커피값등을 아끼는 거였다.

학창시절 매점에서 1,800원짜리 김밥 한 줄을 사먹어도 친구가 900원을 주면 받았고, 스티커사진을 7,000원 주고 찍으면 꼭 3,500원씩 내자고 제안했다.

친구가 천원짜리만 있어도 예외란 없었다.

한번도 야, 100원은 됐어, 500원은 넣어둬, 그런 말을 해본 기억이 없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서도 워낙 에너지가 없고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니 식당이나 카페에 가는 게 한달에 한두번 될까말까 손에 꼽았는데,

그때도 고독사에 대한 공포가 심해

최소한의 횟수는 채워야 한단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

누굴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

먹는 동안 마시는 동안 머릿속으로 나눗셈을 했다.

두 사람 밥값이 18,900원 커피값이 7,200원, 조각케익 4,500원 다 합쳐서 ₩&@(-/나누기 2는@“&???


지금은 저러지 않는다는 변명으로 한 박자를 쉬고......


고등학교 친구가 하나 있다. 학교 다닐 때보다 졸업 후 오히려 가까워진 친구다. 졸업하고도 나를 길게 만나주는 애가 걔 하나였으니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사회 나와서 쌓는 우정은 가짜고 학창시절 친구가 평생 진짜라는 어디서 주워 들은 말 때문에

분명 껄끄러우면서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결혼하고 출산 후까니도 걔랑은 계속 인연이 이어졌다.


마지막 만남은 2년 전 겨울인 듯하다.

친구가 내 생일날 치킨 한마리 기프티콘을 보내고 올해 초 친구의 생일날 내가 알면서도 연락하지 않았으니

내가 먼저 손절한, 첫 케이스.


걔랑 껄끄러운 부분은 단 하나였다.

밥값. 만나면 항상 밥을 내가 샀다. 내가 직장에 다니던 무렵 친구는 대학원생이긴 했지만 아버지가 미국에서 사업을 크게 한다고 들었고, 나는 신림동, 걔는 서울 꽤 좋은 동네의 신축 오피스텔에 살았지만

한번도 친구가 밥값을 부담한 적이 없었다.

 계산할 때가 되면 딴청을 부리거나 반을 보내준다고 하고 절대 챙겨주는 일이 없었다.

글로 쓰니 호구같지만 자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던 것 같다.

고작 일년에 두어번 만나는데, 게다가 걔는 학생이고 나는 직장인인데 밥값 이야기를 꺼내기가 싫었다.

겨우 벗어난 쫌생이가 다시 되고 싶지 않다는 반감도 있었다.

대신 친구의 오피스텔에 놀러가면 냉장고에 있는 밑반찬들을 꺼내고 계란도 부쳐 밥을 차려주곤 했기에

그걸로 충분했다.

돈을 내가 더 쓰면 어때? 자주 못 봤지만 일단 만나면 어릴 적 이야기와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 이야기 등으로 밤새 깔깔대며 시간이 가는 줄 몰랐고 그게 참 좋았다.


하지만 그러다 각자 결혼을 하고 출산도 하고 예전보다 더 자주 못보게 된 어느 날, 친구네 동네 근처로 갈 일이 있어 약속을 잡았더랬다.

못본 사이 친구와 나는 각자 한번씩 유산을 했고, 나는 복직을 했고, 친구는 남편의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서로 자연스레 껴안았다. 이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서너시간을 쉴새없이 떠들었다. 학창시절 이야기, 자취하던 시절 서로의 집에서 며칠씩 잤던 이야기, 남편과 애들 이야기, 일 이야기 등.할 이야기가 끝도 없고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서

 이런 친구가 있는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집에 갈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친구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사라졌다.

그리고 한참 나오질 않았다. 그때 마음에서 가느다란 실이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날 밥값은 8만원대,

큰돈이라면 큰돈이고 적은돈이라면 적은 돈이지만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냥 그 순간 더 이상 얘를 만날 일이 없겠구나 직감했다.

결혼생활을 하며 관계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졌던 걸까.결국 그날 밥은 내가 계산했고 뒤늦게 나온 친구가 어머, 반 보낼게! 계좌번호 줘? 했지만 괜찮다는 말로

친구와 헤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걔의 연락에 답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 우린 완전히 끝났다.

쫌생이 같으니라고,

밥 좀 사주는 게 어떻다고 그렇게 오랜 관계를 끝내니?

아직도 꿈에 걔가 가끔 나온다. 교복차림으로,

대학원생 시절 차림으로, 마지막 봤던 모습으로.


그리운걸까?

그러나 이제 현실에서 걔랑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다시 만나도 밥먹는 시간이 즐겁지 않을 게 뻔하다.

나는 밥맛이 중요한 사람인데,

밥값 부담에 불편한 식사자리를 가지고 싶지 않다.

불편한 관계를 의리로 유지하기에는

이제 늙었나보다.



열등감덩어리라서

첫째를 낳고 조리원 시절 친해진 동생이 있었다.

청순한 외모가 내가 추구하는 이미지와 닮아

자꾸만 눈이 갔고 목례가 눈 인사로, 존대가 반존대로, 누구씨가 자연스레 언니동생이 되어

나중엔 아기띠를 하고 집을 오가는 사이가 되었다.

집에 가서 보니 내가 나온 대학의 졸업앨범이 있었다.

그렇다, 걔는 내 대학 후배였다.

나는 서울에서도 꽤 괜찮은 대학을 졸업했는데

우리학교엔 부잣집 딸들이 많았다.

동생도 대학시절 내가 동경하던 그런 부잣집 딸들 중에 하나였던 거다.

그때부터 심사가 꼬이기 시작했던 거 같다.

심지어 동생의 남편은 의사였는데 그냥 의사도 아닌

‘잘생긴’ 의사였다.


동생은 만나면 만날수록 너무나 순수하고 예의바르고 겸손했으며, 심하게 예쁘고 심하게 착했다.

아가들이 어릴 때 서로 꼬집거나 때리거나

장난감 쟁탈전이라도 벌어질 때면,

우리 애가 맞을까봐 혹은 장난감을 빼앗길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나와 다르게 동생은 천사같은 미소로

너무나 우아하게 그 상황을 넘기곤 했다.


- 야! 친구꺼 뺏지마!!


내가 이런 식이라면 동생은,


- 얘들아, 우리 이거 가지고 놀까?


하며 다른 장난감이나 책을 꺼내 아가들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리곤 했던 거다.


그게 집안 재력의 차이는 물론이거니와 자라난 가정의 분위기 차이라고 생각되니,

동생을 만날 때마다 마음이 너무 힘들었던 것 같다.

동생의 집에는 친정아빠가 결혼식에서 읽어준 축사와

출산 후 써준 손편지가 액자로 놓여 있었는데

구절마다 딸바보 아빠의 사랑이 흐르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난 아빠와도 거의 손절수준으로 지낸다.


그럼에도 동생과 꽤 오래 만났다.

애들이 유치원 졸업반이던 여름, 동생의 집에 놀러갔던 게 마지막인 것 같으니까 거의 7년 가까이를 매일 연락하며 지냈다.

그해 여름엔 동생이 전원주택으로 이사하고 처음 우릴 초대해 놀러갔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다가 주택이라니,

심지어 올리모델링이라니?

초대받는 순간부터 나는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같은 아파트에 살았어도 동생의 집은 차원이 달랐다.

평수가 우리집보다 넓었고 집안 모든 게 명품이었다.

하다못해 떡볶이를 내어오는 그릇들이나 커트러리도 예뻐서 검색해보면 가격을 보고 기절할 수준이었다.

그런 동생이 일년 가까이 리모델링 한 전원주택이라니, 얼마나 멋졌겠는가.

마음을 다스리고 놀러갔지만 삐빅- 열폭버튼은 그날도 눌리고 말았다.

애들은 옥상에 설치된 수영장에서 실컷 물놀이를 하고

3층에 마련된 시네마룸에서 영화를 보고,

각종 레고와 비싼 자석교구 풀세트를 펼쳐놓고 놀았다.

그동안 동생과 나는 치킨에 맥주를 마셨는데

아, 육아가 이렇게 수월할 수도 있구나......

그날 처음 알았던 거 같다.

그야말로 딴 세상, 육아의 신세계.

동생의 피부가 왜 날이 갈수록 백옥처럼 빛이 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후 나는 그녀의 연락을 피했다.

티가 나는 핑계들로 약속을 거절하다가 이사가 확정된 후, 아예 번호를 차단해버렸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나면 비교, 질투, 현실 불만족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걔를 만나고 와서 거울을 보면 너무 비교되는 피부결은 물론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못난 사람이 보였다.

내가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더 치열하게 살았는데,

왜 쟤가 더 잘 살지? 열심히 살 필요가 없는 걸까?

그런 답도 없는 질문들이 이어지는 게 너무 싫었다.

언젠가 동생과 다시 연락할 일이 있을까?

차단한 동안 어떤 연락이 왔을까?

궁금하지만 그녀 또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 같다.

우린 서로 차원이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좀스럽고 열등감이 심하다고 쓰긴 했지만 이런 이유로

관계를 끝낸 사람이 나만 있진 않을 거라 믿는다.

누구나 자기 돈은 아깝고,

잘난 사람을 보면 심사가 뒤틀리니까.

그래도 언젠가 차단을 풀고 둘에게 먼저 연락이 온다면

만나서 밥을 사주고 격이 다른 일상을 부러워하면서도

나는 나대로의 생활에 만족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가능할까?


자신 없지만 그래도 노력해보기로 한다.


아직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과 맛있는 걸 나누고

그들의 행복에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는,

진짜 ‘어른’이 되고 싶은 마흔번째 봄이다.



작가의 이전글 힘든 마음에 칼질을 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