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바람의 기억

기억. 자각. 성찰 감성의 테마시

by 정하

나는 광활한 바다 위에서
돛을 밀어주던 친구였다.

산 위에서는
땀 흘리는 이들의 어깨를
조용히 쓰다듬는 벗이었다.

나는 세상을 휘감고 떠도는
방랑의 성정을 가졌다.

가는 길마다
수많은 인생의
웃음과 눈물을 만났다.

먼 대항해 시대,
세상 끝 까보 다 로까¹ 바람의 언덕에서
웅대한 포부로 바다로 나서는
한 남자의 호탕한 웃음을 보았고

그를 떠나보내던
여인의 눈물을 보았다
휘날리는 머리칼에
그 눈물이 닦이던 순간을....


백일홍으로 피어난,
피 맺힌 절규를 삼키던
한 여인의 숨결도 기억한다.

나는 멈추지 않고
시간의 틈을 지나
어제와 오늘을 흔들며 흘러간다.

나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세상은 분주히 움직인다.

내가 세차게 지나간 골짜기를,
봉인된 기억이 해제된다 하여
사람들은
‘바람의 기억’이라 부른다.

뜨겁게 살았던 이들의
사랑과 그리움,
말할 수 없었던 울음과 고통들이
그 골짜기에서 풀린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평생을
‘바람의 기억’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 모른다.

¹ 까보 다 로까 (Cabo da Roca) — 2019년에 가 본 포르투갈 대서양 연안에 있는 유럽의 최서단 곶.
고대에는 ‘세상의 끝’이라 불리며,
거센 바람이 끊임없이 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에세이

까보 다 로까의 바람은 그야말로 지구 끝에서 몰아치는 바람 같았다.
절벽 아래 파도는 쉬지 않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딪치고,
센 바람은 우리 몸을, 우리의 숨결을, 심지어 기억까지도 흔들어 날렸다.

그곳에서 나는 사람의 생과 교감하는 바람을 만났다.
깎아지른 절벽과 무한한 바다, 끝없이 몰아치는 바람.....
세상을 휘감고 도는 바람을 의인화해서 글을 쓰고 싶었다.
지난날의 삶을 기억하고, 마음 깊이 봉인해 둔 상처와 고통까지 되살려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마주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존재로서 바람을 그리고 싶었다

‘바람의 기억’은 단순한 자연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삶을 기록한 글이자, 고통과 그리움, 그리고 잊고 싶었던 순간들을 품으며 그 안에서 위로와 치유를 발견하게 해주는 매개체다.


글을 쓰는 것은 곧 그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나를 마주하고, 삶의 고통을 뛰어넘어 새로운 숨결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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