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육행정직 공무원이다.
두려움 반 설레임 반, 잔뜩 긴장된 마음으로 첫 출근을 했던 앳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언제 세월이 이렇게 흘러갔는지 올해가 벌써 27년 째다.
교육행정직이라 하면 공립 유치원을 포함한 일반 학교 및 교육청 같은 기관에서 교육과정 운영을 비롯한 회계, 시설, 재산, 물품, 급여 등 학생과 교직원과 건물 관리까지 기관 내의 모든 부분들이 원활하게 잘 유지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행정업무를 한다.
사실 난 각양각색의 여러 직업들 중 수익을 창출할 만큼 잘 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저 순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어릴 때에도 친척들이 오면 엄마 뒤에 숨기 일쑤였고 지금도 사람들이 많은 곳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작은 학교에서 그저 조용히 즐겁게 지내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학창시절에는 수학을 포기해서 취업준비에도 제약이 많이 따랐다. 그래서 짬짬이 아르바이트도 하고 학원 가를 배회하며 이것저것 시험을 준비 하던 중 어느 해에 우연히 교육행정직 시험에 수학 과목이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금이 기회'다 싶어 죽자사자 매달려서 다행히 거의 끝번으로 합격했다.
솔직히 말하면, 교육행정직이라는 직업이 어디에서 어떤 업무를 하는 것인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로 무작정 시험을 봤다. 나중에 물어 보니 교육기관에서 근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70~80년대 학교 현관에 들어서면 작은 쪽창문이 있어 수업료 등을 납부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현금을 수납하거나 고장 난 시설을 고쳐주거나 서류 등을 발급 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시험에 합격한 이후 인사발령이 1년 정도 지나서 났기 때문에 당시에는 '2년 안에 발령이 안 나면 합격조차도 취소된다'는 소문이 있어 엄청 걱정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첫 발령지가 중학교였는데 회계업무 뿐만 아니라 재산. 물품. 시설 관리 등 모든 업무를 두루 해야 했다. 교직원 급여도 마찬가지다. 매월 초에 호봉별로 교직원 수당과 급여를 계산하고 세금을 징수하여 급여 날이 되면 농협에 가서 직접 수납한다.
물품이나 재산관리, 시설 등은 그나마 배우면서 하면 되는데 수포자인 나로서는 매일매일 숫자와 씨름하는 일이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시험과목 중에 수학이 없어져서 잘 됐다 생각했는데 학교에 오자마자 하루도 빠짐없이 숫자에 매달려야 했고 급여 작업 시기가 되면 긴장으로 둘러싸여 마음 갈 곳을 잃은 채 인근 학교에 물어물어 밤샘 작업을 하거나 급할 경우에는 비슷한 업무를 하는 다른 학교 직원이 퇴근 후에 학교까지 오셔서 도와주기도 했다.
한가지 에피소드를 들자면, 급여작업을 마치고 프로그램 상으로 세금을 분명히 징수했는데 정작 당일 날 농협에서 정산을 하고 세금을 납부하려고 보니 날 비웃으며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듯 내 손에 동전 한닢 남지 않아 머리가 하얘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순간 엄청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또한 급여를 잘 못 계산해서 수당을 제 때에 주지 못해 직원들에게 눈총을 한 몸에 받은 아슬아슬한 상황도 있었다.
학교에서 며칠 째 야근하던 어느 날은 남편에게 전화 해 ‘나 이 직장 더는 못 다니겠다’고 울면서 그만둔다고 떼쓴 적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별다른 재주가 없는 관계로 그 시기를 잘 극복했다.
지금은 경력도 많이 늘었고 시스템이 많이 간소화 되어 예전에 비하면 행정 지원 여건이나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지만 행정실에서는 교육활동 지원 뿐만 아니라 소방이나 전기, 시설 관리 등 본연의 업무도 꼬박꼬박 신경 써야하는 데다가 여전히 안팎으로 챙겨야 할 것들이 부지기수로 많아 항상 긴장하게 된다.
그래도 IMF나 코로나19 등 큰 위기가 있을 때에 여전히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고 급여도 꼬박꼬박 나오므로 얼마나 감사했던지...
그때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지 않았거나 그만 두었으면 아마 나의 생활도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 해 본다.
시부모님과 세 아이를 포함한 일곱 식구가 26년 동안 함께 살면서 학원비나 생활비 걱정 덜 하며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었을지, 시부모님 눈치 보면서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단순한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한번은 나에게도 슬럼프가 있었다. 누가 들으면 '호강에 겨운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직장생활 한 지가 벌써 20년이 넘어 여전히 회계를 포함 해 매년 비슷한 업무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고 있으려니 '나의 적성과 맞는 직장인 건지 정말 내가 원했던 다른 길은 없었는지.' 가끔씩 회의감이 들었다.
그때 마침 딸아이가 고1이었는데 아직 장래 희망도 없고 공부가 자신이 없는 터라 미래에 대한 불안과 방황으로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사주'를 보고 싶다고 했다. 행여 안좋은 말이라도 듣게 될까봐 약간 걱정되기도 했지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일거라는 생각에 딸의 기분도 맞춰줄 겸 카페에서 봐 주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 갔다.
정말 사주를 잘 봐줄 것 처럼 그럴듯한 분위기에서 주인장?이 딸의 생시를 나열하며 한참 풀이를 하시더니 '이 아이에게는 앞으로 꽃이 필거라는 둥 엄마와 둘이 궁합이 잘 맞으니 엄마 말을 잘 들으라'는 등의 희망적인 얘기들을 해 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딸도 자신의 사주에 그럭저럭 만족 해 하며 일어서려던 그때 혹시나 하고 나도 좀 봐달라고 했다.
나의 태어난 일시 말고는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문득 '은행이나 회계 관련 업무가 맞다'고 해 주셨다. 분명 어떤 힌트를 준 것도 없는데 말이다. 덕분에 딸보다 나의 마음과 발걸음이 더 가벼워져서 '내 업이구나!' 생각하며 돌아온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불평불만 없이 그냥 내게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며 잘 적응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 아이들이 큰 사고없이 즐겁게 생활 할 수 있도록 열심히 신경쓰며 적극 행정을 하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직장생활이 마냥 편한 것 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일복을 타고났는지 전근을 가는 곳마다 통폐합을 추진 중이거나, 강당을 신축하거나, 잔디운동장 만들기부터 강당 바닥보수, 본관 석면공사까지 학교 전체가 들썩이도록 힘든 공사를 했던 적도 있었고 건물이 너무 오래 되어 개축을 위해 근처 폐교를 재 정비하여 이사를 한 기억도 있다.
또한 장마가 한창인 후덥지근한 여름 무렵, 시골에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어 뼈대만 앙상한 건물을 중심으로 열심히 공사 중인 신설학교에 발령받았는데 번듯한 사무실 하나 없이 온통 공사판인 건물 한 켠에 자리 잡고 앉아 선풍기 하나로 습한 더위와 귀를 찌르는 소음과 먼지들을 견뎌가며 늦은 밤이 되도록 학교 내부에 필요한 교구나 비품 등을 채워 넣고 거센 장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장님을 재촉해서 겨우겨우 공사를 마무리하고 개교를 했다.
서류 작성부터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터라 신경써야 할 것도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건물은 지하 1층 부터 4층까지 최신식으로 지어졌지만 누수나 하자에 따른 관리가 수시로 필요했고 새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내부 구조에 불편함이 많아 방학기간을 이용 해 부분 보수 공사도 잦았으며 해마다 학생이 2배 이상씩 증가하므로 매년 초가 되면 교실 위치를 바꾸고 정리 해 주는 등의 자질구레?한 일들도 수시로 챙겨야했다.
특히 전기. 물탱크. 소방 등을 별도로 관리하는 실이 따로 있었는데 한번씩 고장이 나면 지하에서부터 4층까지 숨이 턱턱 막히도록 달려다니느라 유격훈련을 받는 기분이었고 특히 수업시간이나 시험이 있을 때 소화감지기가 오작동하여 비상 벨이 울릴까봐 평상시에도 바짝 긴장해야 했다.
건물이 워낙 넓고 규모가 커서 잠깐씩 점검만 하고 다녀도 하루에 금방 만보를 넘겨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고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원래 신설학교는 다들 기피하는 곳이고 어느정도 정착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림에도 불구하고 가점 규정이 전혀 없어서 이동도 못 하고 있다가 3년 만기를 꼬박 채우고서야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와 두통 등의 후유증만 남긴 채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종종 내가 근무했던 학교 근처를 지나게 되면 나의 땀과 수고와 내 삶의 일부가 깃든 정든 학교라는 생각에 자랑스러움과 아련함이 함께 남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일복과 더불어 인복도 있어서 학생과도 친하게 지내기도 하고 좋은 직원들을 만나 도움도 많이 받았다. 가끔은 퇴직하신 분들이 잊지않고 연락을 주시면 '내가 잘 살았나보다' 라는 회상과 함께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직장 생활 중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일을 꼽는다면, 교육청에서 청렴업무를 맡았었는데 추진 결과가 좋으면 해외연수 기회도 있어서 나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기관별로 매년 실시하는 청렴 점수가 낮아서 나의 노력은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다른 부서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인데도 불구하고 외부전화로 교육청에 전화를 하면 컬러링에 아직도 ‘♬ 청렴한 당신이 있어서 세상이 청렴 해 지네요~’로 시작하는 청렴송이 나온다. 나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아 그 시절 고생한 기억이 스치면서 옛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 외에도 승진하고나서 차로 1시간 거리인 시골 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는데 근처 섬과 육지에 분교가 5개나 있는데다가 유일한 차석마저도 출산휴가 중인 상황에서 그 중 한 곳을 통폐합 해야했다. 덕분에 가끔씩 쪽배 타고 섬에도 가고 결원대체와 별보며 달보며 출퇴근했던 힘든 경험들이 아득하다.
그 이후 분교가 2개인 학교로 이동했는데 교장선생님 하시는 말씀 "전임자는 야근도 많이 하고 많이 벅차하던데 실장님은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분교 5개 있는 학교에 있다가 2개 있는 곳으로 오니 훨씬 수월하네요" 그런데 더 황당했던 건 가자마자 또 통폐합을 추진했다는 거~
수를 헤아려보니 내가 통폐합 한 분교만 해도 3개나 되었다.
또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 겨울날, 탐스러운 흰눈을 감상 할 여유도 없이 학교 이전을 위해 직원들과 굵은 땀 뻘뻘 흘려가며 짐 나르고 이사했던 기억, 통폐합 후 받은 지원금으로 매년 학생들 수학여행을 해외로 추진해서 중국과 싱가포르를 같이 다녀왔던 좋은 추억, 지하에 물탱크와 전기 시설이 함께 있었는데 물탱크 청소 후 센서가 고장나서 지하 바닥에 물이 고여 위험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이제는 모두 다 마음 한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빛바랜 추억들이 되었다.
지금은 단설 유치원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애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챙겨주고 손 잡고 다니고 매일 눈맞춤하며 인사했더니 이제는 정이 들어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행복을 부르는 가장 정겨운 소리임을 알게 되었다. 나이 먹으면 젊은 사람들이 돈을 줘도 놀아주지 않는다는데 어린 꼬맹이들이 북적대는 작은 공간에서 올망졸망 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잡념도 사라지고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지며 나도 모르게 행복해진다.
내 나이 벌써 50이 넘어서 정년퇴직이 열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남았다.
예전과 비교하면 근무 여건이나 시스템들이 훨씬 나아졌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 같은 직에서 근무하는 지인들도 다들 빨리 퇴직하고 싶다는 얘기들이 종종 나오는 것 같다.
나도 마음으로는 빨리 퇴직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으나 사실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그런 바램도 간절하지 않나 싶다.
가만히 있는 것을 싫어하고 무엇이든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집에서 며칠만 쉬어도 몸이 근질거리기 때문에 오히려 출근 하는 것이 더 좋다. 집에서는 TV를 보거나 소모적인 일들을 많이 하는 반면, 직장에서는 좀 더 생산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고 또한 급식을 하므로 더욱 즐겁다.
움직이기만 해도 땀이 주륵주륵 흘러내리는 한 여름에도 매미소리 들어가며 시원한 사무실에 앉아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고 조금 부족하긴 해도 조금씩이라도 올려주니 그 또한 기쁘고, 잊을만 하면 보너스도 챙겨 주고 춥거나 더운 날씨와 상관없이 항상 조용한 사무실에 앉아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업무를 처리할 수 있으니 잘 하는 것이 별로 없는 나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직장이 없다.
또한 내가 눈 뜨면 나를 기다리는 곳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역시 난 천상 공무원 팔자가 딱! 맞는 것 같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예전에 카페사주 봐주셨던 분이 정말 용~~하신 족집게 어르신?이 확실하다.
남은 재직 기간에도 별일, 별탈 없이 아이들과 교직원들이 어려움 없이 잘 지낼 수 있도록 더 신경써서 지원 해 주고 웃음 가득한 직장이 될 수 있도록 더욱 애쓰며 잘 보내야겠다.
사실은 퇴직 후에도 애들 가까이에서 오래 머물고 싶어 한국어교사 자격증도 땄다. 요즘 저출산으로 가뜩이나 사회가 불안하고 심각한데 우리 아이들 뿐만 아니라 점점 늘어나는 다문화 아이들까지 모두 즐겁게 잘 커나갈 수 있도록 열심히 뒷받침하고 응원 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