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귀에 보청장치

영포티의 어느 하루

by 김동의

초고를 털었다.

썩 만족스럽냐 자문해 보면 열심히는 썼으니 97% 정도 '그렇다'라고 답은 할 수 있겠다.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끓어올라 즉시 타이핑 못 해 안달 난 그런 상태로 쓰지 못 한 글도 몇 편은 되니 3% 정도는 쏘쏘쯤 될 것이다. 남들이 좋아할지 보다 글 초반 유지됐던 DNA가 훼손되지 않을 정도로 내 스타일이 쭈욱 유지되길 원한다. 웰메이드 드롸마가 시즌을 거듭할수록 변질되고 산으로 가는 그런 느낌만 주지 않는다면 흥행여부를 떠나 스스로 성공적이라고 평할 수 있을 듯하다.


비공개 일기 쓰듯 시작한 글이지만 컬트 에쎄이로 텐션을 끌어올려준 글벗님들 덕분에 번아웃 없이 무사히 마쳐서 다행이고 작게나마 댓글로 소통을 한 것이 생각지 못한 큰 기쁨이었다.


내가 속한 회사는 노·사간 합의로 재택근무(주 2회)를 실시하는 사업장이다. 별안간 작년 말 인사조직은 노측과 아무런 협의 없이, 단체협약 개정 없이 일방적으로 재택근무를 1회로 축소한다는 통지를 해왔다. 툭하면 직원들을 예비 범법자로 간주하여 '준법'에 대한 의무 교육은 정기적으로 그렇게 실시하면서 정작 그들은 법을 어기고 노·사간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외부에서야 부럽게 보든 고깝게 보든 회사의 이런 움직임은 분명 근로조건의 후퇴 내지는 개악에 해당하고 이런 변화는 반드시 노측 대표단과 협의·합의해야 함에도 입 꾹 닫아 강행하는 모습은 블라인드라는 대나무 숲에만 열심히 불만을 토할 줄 아는 대졸 직원들에겐 그런 절차조차 귀찮다는 눈치다.


그렇게 늘 아내와 함께하던 주 2일의 재택근무가 축소되어 2026년은 내게도 크고 작은 변화가 예상된다. 1997년 중국으로 국권 반환을 앞두고 홍콩에서 나고 자라 경제활동 주축이 된 중장년 층의 심정이 이렇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점심은 배우자의 리뷰어 챈쓰로 외식을 하기로 했다. 차에 연료가 바닥나 셀프 주유소로 향했다. 돈을 빌렸다는 이유로 매달 30만 원을 사용해야 하는 우리카드를 주유기에 넣었고 안내에 따랐다. 나는 일회용품 사용으로 환경 파괴에 앞장서는 몰상식한 어른이 아니므로 5년째 사용 중인 3M 작업용 장갑을 착용한 채 노란색 주유건을 들었다. 주유가 종료됐다는 메시지를 듣고도 괜히 호오스에 잔류한 휘발유가 더 있을까 봐 주유기 트리거를 다섯 번 정도는 더 당겨봤다. 대기하던 뒷 차 운전자에게 이런 궁상스러움이 발각돼 황급히 주유건을 제자리에 돌려놨다.


배우자가 차 안에서 음악이 듣고 싶다며 르쎄라핌 곡을 픽했다. 그녀는 분명 르쎄라핌의 코첼라 대참사를 보곤 '노래도 못하는 립씽커'로 악평을 한 건 까맣게 잊곤 요즘은 르쎄라핌이 노랠 잘 만든다며 좋다고 한다. 걸그룹의 신곡 소식은 주로 아내를 통해 듣는데, 한 번 듣고 누구 곡은 요즘 물올랐다고 하고 누구 곡은 망했다며 단정해버리는 그 말을 누가 들으면 평론가인줄 알 것이다.


나도 르쎄라핌이 좋은 영포티다. 정확히 말하면 난 카즈하가 좋다. 그렇다고 카즈하가 등장하는 영상을 찾아 헤매거나 피어나 동료가 되어 활동을 하진 않는다. 실제 성격은 전혀 알 수 없지만 선해 보이는 인상과 야리야리한 이미지에 단단한 코어근육을 자랑하는 반전이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걸그룹의 수명이 부쩍 줄어든듯하지만 르쎄라핌이 망한 후에도 그녀만큼은 안온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들의 노래를 들었다.


나의 드롸이빙 한계 시간은 30분이다. 그 이상 운전을 하면 도에 지나치게 피로감을 호소하며 고통스러워한다. 남들을 짓밟고서라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말겠다는 이기심으로 가득한 운전자를 목격하거나 편도 이차선 도로에서 서로 앞서보겠다고 덤프트럭과 트레일러 간 펼쳐진 자강두천 병림픽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탈진해 버린다. 이런 불편함에 운전면허만 있는 아내에게 운전대를 맡겨볼 생각을 아주 찰나 해봤다. 아내의 운전 미숙으로 길을 지나는 할머니를 숨지게 하고 가진 집과 재산은 압류당하며 유족들에게 10년 내내 고개를 조아리며 눈물을 보이는 상상을 하다가 그냥 자율주행이 상용화될 때까지만 버텨보기로 했다.


'샤브 20'이라는 식당에 왔다. 아내의 리뷰에 의지해 단 몇 명의 손님 수를 늘려보려는 그런 점포 수준을 넘어서서 초기 투자금이 어마어마해 보이는 큰 샤브샤브 전문점이다. 점심 기준 인당 최소 26,900 원으로 저렴한 편은 아닌데 가격의 끝자리가 900원이나 990원 따위로 눈속임하는 상술이 늘 언짢다. 차라리 26,883 원 이런 금액으로 표기됐다면 가격 산정 과정의 정성스러움에라도 흔쾌히 속아줄 듯하다.


일하시는 아주머니께 수줍은 목소리로 체험단으로 오게 됐다고 귀띔했다. 한적한 테이블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사람들이 몰려있는 스팟에 위치한 테이블에 앉으라며 안내해 주셨다. 좌측 테이블에도 오른쪽 테이블에도 아주머니 손님 세 명씩 앉아서 열심히 취식행위에 집중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나는 길을 걷거나 어떠한 장소에 가면 남의 얼굴이나 차림새를 보지 않는 것은 물론 타인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다. 주로 건물의 지붕 소재가 징크인지 아스팔트 슁글인지 따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는 편인데 그 때문에 나에게 인사하는 사람을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 종종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럼에도 뜻하지 않게 타인의 대화가 너무나 또렷하게 내 고막을 튕길 때가 있다. 오늘 이 식당에서 옆에 앉은 아주머니 한 분이 딱 그러했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놓고 모인듯한 세 분의 아주머니 중 한 분은 두꺼운 안경을 쓰고 적당히 마른 체형에 멀리서도 잇몸과 치아가 잘 드러날 정도로 입이 다소 컸는데 특별히 목소리가 크거나 개성 있지 않은 그분의 한마디 한마디는 듣고 싶지 않아도 내 귀에 보청기를 끼워 놓은 듯 식사하는 내내 들려왔다. 주로 아이들의 학원 이야기나 교육, 아이들의 선생님에 대한 내용부터 보이스피싱이나 MBTI와 같은 궁금하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은 내용을 무척 흥미롭다는 듯 홀로 웃으며 했지만 마주 앉은 아주머니들의 리액숀은 무척이나 성의가 없어 보였다.


음식들은 매우 건강한 재료로 맛도 괜찮았는데 이런 잡음이 내내 청력을 혼란시켜 소화액 분비되는데 방해가 되진 않을지 우려된다. 신선한 야채와 버섯부터 샤브샤브에 투입할 쇠고기와 돼지고기의 무한 리필은 물론 건강하지 않은 아이 입맛에 꼭 맞는 뷔페식 먹거리들도 정성스레 진열해 뒀으며 커피를 비롯한 디저트와 생맥주까지 무한 공급이 가능한 흥겨운 장소에서 오늘 영포티는 꽤 무기력했다.




이 글은 제품 또는 서비스를 제공받지 않고 주관적인 생각을 작성한 글입니다.

제공받고 글을 쓰는 사람은 제 아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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