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NZO 입은 아저씨의 부아
어느 날 외국 방송사가 제작한 짧은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북한 평양에는 류경호텔이라는 330m짜리 고층 유령건물이 존재했고 철근콘크리트 구조 외에 아무런 배관이나 배선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건축물로써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1987년에 착공한 이 건물은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맞춰 완공할 계획이었으나 북한 GDP의 2%에 달하는 큰 건축자금을 열악한 예산과 재일교포 모금에 의존했고, 구 소련의 붕괴로 자금줄이 끊겨 1992년부터 약 16년간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후 2008년, 이집트 회사인 오라스콤(Orascom)에서 북한에서의 통신 사업권을 따낼 목적으로 자금을 투입하여 현재는 커튼월 공사까지 마무리된 상태이나 그 누구도 그곳에서 숙박을 한 적은 없다고 했다.
체제 선전을 위한 야심 찬 건축 프로젝트가 흉물스러운 조형물로 초라하게 마무리된 셈이다.
오늘은 건축물 이야기나 어디서 주워들은 정보를 나열하려 함은 아니고 부아가 치밀어서 연필을 들었다. 인생만사 다 부질없고 지나고 나면 별 일 아니며 노년에 겪을 무료함과 고독함을 짐작해 보면 차라리 지금이 모든 면에서 낫고 그리울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이 거북함을 토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거품을 한가득 물고 있는 꽃게요 뜰채로 갓 건져져 퍼덕이는 우럭처럼 성났다. 나는 시방 믿을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짐승이다.
제조업에 종사 중인 나는 노동조합이 존재하는 사업장에 종사하며 근로기준법을 상회하는 처우가 명기된 단체협약(노&사간 맺은 협정)의 적용을 받고 있다. 직원에게 단체협약 적용은 국가가 법령에 의해 노사관계를 일률적으로 규정짓기보다는 양자 간 자율적으로 사업장 특성에 맞게 합의된 룰을 더 우선적으로 존중해 주겠다는 취지이다. 이런 단체협상을 적용받는다는 이유로 주변의 시기 질투를 사기 십상이고 거의 모든 언론에서는 나와 같은 직원들을 '귀족'이라고 비아냥대고 있다.
인정한다. 다른 사업장의 통상적인 노동자대비 꽤 괜찮은 노동조건에서 일을 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추울 때 춥고 더울 때 덥게 일하지도 않으며 수시로 욕설이 들려오고 군대에서처럼 갑자기 예측 못한 주먹이 내 머리통으로 날아오거나 힘을 빼고 있는 내 측복부를 발길질로 가격하며 존재를 알리는이는 전무한 나름 존엄하게 지낼 수 있는 사업장이다. 국내 노조결성률과 우리 회사 입사 경쟁률로 표현되는 숫자만 봐도 귀족이라 부르며 온갖 혐오의 표현을 쏟아붓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26년 1월. 노&사간 협의된 주 2회 재택근무 사용 기회를 HR이 아무런 근거자료 제시나 배경 설명 없이 일방적으로 1회로 축소했다.(물론 가처분신청 등 법적 공방 중이다.)
그와 동시에 자율출퇴근제가 적용된 사업장으로 재택근무와 함께 매우 유연한 근무제도를 갖춘 매력적인 일자리로 취업시장 안에서 홍보되고 있다.
자율출퇴근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면, 말 그대로 자율롭게 출퇴근하며 주 40시간만 채우면 되는 제도로, 보직자급에서 '협업'이 안될 것이라는 우려에 지금의 나처럼 거품을 물며 반대했다고 했다. 회사는, 아니 HR은 이를 보완할 목적으로 필수 근무시간이란 제약을 두었고, 이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5시까지 설정했다. 그에 따라 당연히 가장 늦은 출근은 10시, 가장 빠른 퇴근은 15시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현업 보직자들의 불만이 많았는지 이런 필수 근무시간 외에 '근무시간 가이드(07시부터 20시까지만 일할 수 있음!)'라는 HR만의 지침을 전 직원에게 세뇌시키듯 전달하며 노&사간 얘기된 '자율'의 범위를 임의로 축소 해석하며 제약을 걸고 있다. 결론적으로 모든 HR의 조치는 이 회사 직원이라면 응당 출근 차량으로 교통체증이 발생하는 7~8시에 출근하고, 사람이 붐비는 점심시간에 오래오래 대기하다가 밥을 먹고 조금 쉬며, 역시 교통체증으로 두 시간은 우습게 소요되는 17시에 시달리며 퇴근하라는 의도로 귀결된다.
이런 이유로 2026년부터 귀족노조 영포티 MZ 직원인 나는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조악한 휴민트에 의하면 노동조합 간부활동 이력이 있다는 이유로 HR이 내 출퇴근 이력을 모니터링하며 1~2분 차이만 나도 가차 없이 징계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명백한 사찰이지만 의료과실을 주장하는 환자 측처럼 내겐 그들에 대항할만한 근거나 정보가 극도로 빈약하다. 이처럼 여러모로 HR은 어렵게 누리고 있는 나의 행복에 균열을 내며 삶을 아슬아슬하게 만드는 위협적인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 금요일, HR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회사 support 부문인 총무로부터 장이 뒤틀릴만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때문에 토, 일 양일간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들 생각에 코르티솔이 분비돼 면역력 저하와 복부지방 증대 그리고 수면의 질이 떨어지는 피해를 입었다.
업무적인 이유로 해외 출장을 갈 기회가 생겼고 소정의 양식에 맞게 계획 보고서를 작성 후 첨부했으며 숙박과 항공권 가예약은 물론 예산까지 품의를 상신하여 세 팀의 팀장 결재를 거쳐 실장 결재까지 득했고 마지막 총무팀 담당자의 승인만 남은 상태였다. 총무팀 해외출장 담당자는 이미 전산 결재를 득한 사항이지만 출장 품의서 본문에 그 이력이 명기되어있지 않고 전산 결재된 문서를 첨부하지지 않았다며 단박에 기각해 버렸다. 예를 들면 아파트 매매 계약서를 등기서류에 동봉했는데 서류 봉투에 '매매 계약서 첨부됨'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등기소에서 거부한 상황과 다름이 없었다. 총무팀 담당자면 나의 전산신청 이력과 해당 문서 그리고 여행자보험증서까지 열람이 가능할 테고 반드시 별도 파일로 필요했더라도 메일이나 사내 메신저로 요청해도 될 일을 이런 식으로 진행하니 갑질로만 보였다.
회사 전산 품의 시스템도 사용자 편의와는 거리가 멀어 총무팀 담당자가 기각한 문서는 폐기해야만 했다. 절대 '수정, 변경, 추가' 따위는 불가능해 처음부터 다시 다 작성해서 3명의 팀장과 1명의 실장 결재를 또 얻어야만 했고, 이런 시간 지체로 외주 여행사에서 가예약해놓은 항공과 호텔 확정에도 문제가 빚어질 수 있는 위기에 처했다. 그렇게 기각 버튼을 누르고 총무팀 담당자는 15시에 퇴근해 버렸다. 융통성 있게 다른 방법을 구해볼 기회조차 박탈당한 기분에 내 마음은 오늘의 화성시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처럼 뿌옇고 답답하기만 했다.
단순히 출장 품의 문서를 재작성하고 보직자들의 결재를 다시 읍소하며 받아내야 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우리 회사가 자랑하듯 내세우는 복지 중 하나가 '해외 출장 중 귀국 일정을 조정 신청할 수 있는 권리'이다. 뒤로 미룬 일정만큼 숙박비나 일비를 추가 지원하는 것은 절대 아니고 귀국 항공권만 조정해 주며 그 일정 중 평일이 포함되면 개인 휴가까지 써야 하는, 그다지 귀족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복지 사항이다. 단독주택을 지으며 월 부담 이자가 어마어마해져서 이자를 단 0.01%라도 낮춰보고자 대환대출 신청을 원했지만 이조차 가로막힌 암울한 상황이라, 내 인생엔 2024년부로 해외 방문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배우자에게도 이를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구글 로드뷰가 잘 되어 있으니 전자 화면으로 가보고 싶은 나라를 가보자고 했다.
게다가 나는 비행기 타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비싸고 줄 서고 까다롭고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 단 한 번의 사고라도 나면 대형참사로 이어지는 부담을 안고 해외까지 나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는지 이젠 도무지 모르겠다.
업무 특성상 휴가는 물론 외부 교육이나 출장으로 인한 부재 시 밀린 업무는 반드시 기한 내 자신이 해결해야만 하는 구조이다 보니 나는 교육 신청도 안 하고 해외출장 기회가 있어도 거부하는 대신 일을 마치고 가급적 빨리 퇴근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선호했다. 때문에 2014년 이후로 난 해외출장 이력이 없다. 구글 로드뷰 해외여행을 귓등으로 들었는지 배우자는 “무슨 회사가 해외출장 기회도 없냐며 다른 팀 직원들처럼 기회가 있으면 자신도 표 끊고 따라갈 텐데.” 하면서 바다 건너의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내비쳤다. 손대면 톡 하고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가만히나 있을걸 그때 내가 마음먹으면 해외출장을 갈 수 있고 마침 상하이 쪽 협력사에 문제가 생겨 방문할 명분이 있다는 말을 해버렸다.
배우자는 우리 회사나 협력사보다 출장 일정 확정을 재촉했고, 스케줄이 나오고부터는 '해외출장 귀국 항공편 변경권' 사용을 기정사실로 여겨 지체 없이 아이의 항공권과 함께 호텔 예약을 해뒀다. 그날 이후 무뎌진 중국어 감각을 되살리려는 듯 잘 보지 않던 중국 드라마를 넷플릭스로 정주행 하고 있다. 나로서도 2014년 이후 오랜만에 해외출장 기회였기에 새로운 시스템으로 계획서를 작성·첨부하고 희망 항공편과 호텔을 입력하는데 많은 애를 먹었다. 비교적 최근에 해외출장을 다녀온 후배들을 여러 번 자리로 불러 해외출장 품의서 작성이 막힐 때마다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결재를 올린 품의 문서를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총무팀 담당자가 기각을 해버렸고 다시 품의 문서 작성을 해 세 팀장과 예산 통제권자 그리고 실장 결재까지 언제 완료가 될지 기약이 없었다. 그만큼 외주 여행사가 가예약해놓은 항공권의 발권 시한과 숙소 가예약의 유효 기간이 도래할 가능성도 높아진 것이다. 재상신한 출장 품의 문서의 결재가 완료되는 때까지 항공편과 숙소 예약이 틀어지고 위약금을 부담하며 모든 계획을 다시 수립해야 하는 상상을 하니 오늘 새벽 3시 28분 눈이 떠졌고 그 이후로 다시 잠을 청했으나 실패했다.
몸이 으스러질 듯 피로에 휩싸였으나 오늘 근무시간을 많이 적립해두지 않으면 싱숭생숭한 날 일찍 퇴근할 수가 없기에 알부민 한 병을 털어 넣곤 바로 샤워를 하며 출근 준비에 열을 올렸다. 3년간 자리 잡은 루틴이 올해 들어 모두 망가지고 꼬여 오늘같이 몸도 마음도 무거운 날이 부쩍 많아졌다. 이 모든 게 HR과 같은 support 부서들이 카르텔화 되어 회사를 쥐락펴락하며 온 직원을 잠재적인 범죄자 내지 징계자로 치부하여 제도를 개악한 데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일찌감치 출근 준비를 마치고 뻣뻣한 raw 셀비지 데님에 웨스턴 프린지 데님 재킷을 입고 집을 나섰다. 10℃가 채 안 되는 날이었고 그리 두껍지 않은 차림이었지만 추위로 아프고 괴롭지는 않았다. 늦지 않게 출발했으나 혹시 셔틀버스 탑승 시간에 늦을까 봐 어둑한 새벽길을 달려봤다. Suede 소재의 프린지들이 휘날리는 모습이 그림자로 비쳤다. WWF 얼티밋 워리어가 힘차게 달려가는 모습이 연상되는 실루엣이었다. 사무실 문이 살룬도어였다면 발로 걷어차며 들어갈법한 반항적인 서부 개척시대의 미국 총잡이 st로 착장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좀 누그러지는 듯했다.
가장 치사하고 더러운 것이 줬다 뺐는 것이다. 사실 일방적으로 뺏을 수 있는 대상인지 법적으로 다퉈봐야 뚜렷해지는 사안이라 더욱 그렇다. 막대한 영업이익을 이끈 직원들을 매사 이런 식으로 대하니 회사의 미래가 어둡다. 평양의 류경호텔처럼 '글로벌 기업답게 우리 회사도 이러이러한 복지가 있지롱~'하며 과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지 모르겠다. 보이는 것에 비해 속은 볼품없고 썩어 문드러졌다.
문의가 쇄도할 듯하여 착장 정보를 남겨본다.
아우터 : KENZO × Levi's collaboration
바지 : Levi's
신발 : Solovair
궁핍하게 산다고 징징대면서 웬 KENZO냐 하겠지만 아웃렛에서 90% 가까이 할인 판매하는 개체를 15만 원에 겥하였을 뿐이다. 이 또한 류경호텔처럼 남들에게 잘 사는 척 보이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배우자가 잘 어울린다며 구매를 부추겼다. 다만, 자신과 외출할 땐 입지 말란다.
배부른 불만을 토해냈다. 오늘은 이만큼만 미워하고 내일 다시 미워하련다.
타이틀 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