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시간이 머무는 자리

by 슈펭 Super Peng

프롤로그 시간이 머무는 자리


걷다가 멈춘 적이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어디로 가던 중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순간, 발이 멈췄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그림자가 흔들렸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몇 초였을까. 아니, 시간이라는 감각 자체가 잠시 희미해졌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현대인은 멈추는 법을 잊었다. 아니, 멈추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곧 낭비이고, 비생산적인 순간은 죄책감을 부른다. 우리는 늘 어딘가로 향하고, 무언가를 하고,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빈 시간마저 채워버렸다.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우리는 스크롤을 내린다. 1분의 여백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뇌과학은 흥미로운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 뇌에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는 영역이 있다. 이 영역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멍하니 있을 때 활성화된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상상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일. 이 모든 것이 이 네트워크에서 일어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만난다.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걷는 행위는 창의성을 평균 60퍼센트 높인다고 한다. 앉아서 생각할 때보다, 걸으면서 생각할 때 더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것도 러닝머신 위에서 걸을 때보다 바깥을 걸을 때 효과가 더 크다. 왜일까. 연구자들은 단순한 신체 활동 이상의 무언가가 작용한다고 말한다. 주변 풍경의 변화, 예측 불가능한 자극, 자연의 리듬. 이런 것들이 뇌를 다른 방식으로 깨운다.

니체는 "위대한 생각은 걸으면서 나온다"고 했다. 키르케고르는 매일 몇 시간씩 코펜하겐 거리를 걸었고, 루소는 『고백록』에서 "나는 걸을 때만 명상할 수 있다.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썼다. 그들이 뇌과학을 알았을 리 없다. 하지만 몸으로 알았던 것이다. 걷는다는 것, 그리고 때로 멈춘다는 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100여 년 전에 이미 '주의(attention)'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는 주의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자발적 주의'다. 의지를 가지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 업무를 처리하고, 문제를 풀고,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우리가 쓰는 주의다. 다른 하나는 '비자발적 주의'다.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끌리는 주의. 새소리에 귀 기울이고,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눈으로 따라갈 때 작동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문제는 자발적 주의의 과부하다. 우리는 하루 종일 집중해야 한다. 회의에, 이메일에, 메신저에, 운전에, 끝없이 쏟아지는 정보에. 뇌의 전두엽은 혹사당하고, 우리는 만성적인 피로를 느낀다. '번아웃'이라 불리는 상태. 더 이상 집중할 힘이 남지 않은 상태.

환경심리학자 레이첼 카플란과 스티븐 카플란 부부는 이를 '주의 피로(attention fatigue)'라 불렀다. 그리고 그 해독제로 '주의 회복 이론(Attention Restoration Theory)'을 제안했다.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면, 지친 자발적 주의가 회복된다는 것이다. 숲을 걷거나, 공원 벤치에 앉아 있거나, 그저 나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연은 우리에게 비자발적 주의를 허락한다. 억지로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 시간 동안 뇌는 쉬고, 회복하고, 다시 균형을 찾는다.

일본에서는 이를 '삼림욕(森林浴)'이라 부른다. 단순히 숲을 걷는 것이 아니라, 숲에 몸을 담그는 것. 연구에 따르면 삼림욕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고, 면역 세포인 NK세포의 활성을 높인다. 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의 효과라고도 하고, 자연의 프랙털 패턴이 뇌에 편안함을 준다고도 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결과는 분명하다. 자연 속에서 우리는 회복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을까.

진화심리학은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인류의 역사 대부분 동안, 우리는 자연 속에서 살았다. 사바나의 초원, 강가의 숲, 동굴 근처의 들판. 우리 뇌는 그 환경에 맞게 진화했다. 자연의 리듬에 맞춰 깨고 자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이동하고, 주변 환경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며 생존했다. 그 시간이 수백만 년이다.

반면, 도시 문명은 고작 몇천 년, 스마트폰은 고작 십수 년이다. 진화의 시간으로 보면 눈 깜짝할 순간이다. 우리 뇌는 아직 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몸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지만, 뇌는 여전히 초원을 그리워한다. 형광등 아래에서 모니터를 보면서도, 어딘가에서 햇살과 바람과 흙냄새를 찾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이유 없이 답답해지는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 그것은 어쩌면 뇌가 보내는 신호일지 모른다. 잠깐 멈추라고. 밖으로 나가라고. 걸으라고. 숨 쉬라고.



나는 그날 왜 멈췄을까.

돌이켜보면, 몸이 먼저 알았던 것 같다.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무겁고, 어딘가 균형이 깨져 있다는 것을. 뇌의 어떤 영역이 과부하 경고등을 켜고 있었고, 몸은 그것을 감지하고 발을 멈춘 것이다. 의식은 한참 뒤에야 따라왔다. 아, 내가 지쳐 있었구나. 아, 이게 필요했구나.

우리는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느낌이 먼저 오고, 생각은 나중에 온다"고 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논리적 분석이 먼저가 아니다. 몸에서 오는 미세한 신호, 내장에서 올라오는 감각, 근육의 긴장과 이완. 이런 것들이 먼저 판단을 내리고, 의식은 그것을 사후적으로 해석한다. 다마지오는 이를 '신체 표지 가설(somatic marker hypothesis)'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몸의 말을 들어야 한다. 발이 멈추고 싶다면 멈춰야 한다. 숨이 막힌다면 창문을 열어야 한다. 걷고 싶다면 걸어야 한다.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생존이고, 낭비가 아니라 회복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본래적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비본래적 존재'다.

비본래적 존재란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다. 남들이 하니까 하고, 사회가 요구하니까 따르고, 바쁘니까 바쁜 대로 살아가는 것. 거기엔 '나'가 없다. 그저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다스 만(das Man)', 익명의 세인(世人)이라 불렀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상태로 산다.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로서 산다.

본래적 존재는 다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유한성을 직면하고, 자신만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전환은 종종 '불안'을 통해 일어난다. 일상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순간. 그 불안이 우리를 본래적 존재로 불러낸다.

나는 생각한다. 걷다가 멈추는 순간이 바로 그런 순간이 아닐까. 바쁘게 어딘가를 향해 가다가 문득 발이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게 되는 순간. 왜 가고 있었지? 어디로 가고 있었지? 그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 그때 우리는 잠시 '다스 만'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시간이 머무는 자리란, 어쩌면 그런 곳이다.


동양의 전통에서는 이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선불교의 '행선(行禪)', 걷기 명상이 있다.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각에 집중한다. 숨을 쉬고, 몸의 무게를 느끼고,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다.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걷느냐가 중요하다.

틱낫한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숨을 들이쉬며 세 걸음을 걷고, 숨을 내쉬며 세 걸음을 걸으세요. 그리고 미소 지으세요. 당신은 살아 있습니다." 단순한 말이지만, 그 안에 깊은 진실이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걱정 속에서 보낸다. 정작 현재, 지금 이 순간은 스쳐 지나간다. 걷기 명상은 그 현재로 돌아오는 연습이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를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 부른다. 존 카밧진이 개발한 MBSR(마음챙김 기반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은 이제 전 세계 병원과 기업에서 사용된다. 연구에 따르면 8주간의 마음챙김 훈련은 불안과 우울을 줄이고, 집중력을 높이며, 심지어 뇌의 구조까지 변화시킨다. 해마의 회백질이 두꺼워지고, 편도체의 활성이 줄어든다. 기억과 학습을 담당하는 영역은 강화되고, 공포와 스트레스를 담당하는 영역은 진정된다.

과학이 증명하고 있다. 멈추는 것, 숨 쉬는 것,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 그것이 단순한 철학적 사치가 아니라 실질적인 치유라는 것을.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생계가 급하고, 마감이 촉박하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은 사람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살아왔고, 지금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여유 있으니까 그런 소리 하지"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거창한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 시간의 명상도, 매일의 산책도 아니다. 그저 잠깐의 멈춤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30초 동안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 것.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는 것. 퇴근길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것. 그 정도의 틈새라면, 누구에게나 있다.

그 작은 틈새가 쌓이면 무언가가 달라진다. 뇌과학자들은 이를 '미세 회복(micro-recovery)'이라 부른다. 거창한 휴가가 아니어도 된다. 하루에 몇 번, 몇십 초씩이라도 멈추는 것. 그것만으로도 스트레스 호르몬이 줄고, 집중력이 회복되고, 감정 조절 능력이 높아진다. 작은 쉼표들이 모여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준다.



다시 그날 오후로 돌아간다.

나는 왜 멈췄을까. 그리고 왜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을까.

아마도 그때, 나는 나 자신을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누구나'가 아니라, 지금 여기 서 있는 '나'를. 햇살을 느끼고, 바람을 느끼고, 살아 있음을 느끼는 이 몸과 마음을. 그 만남은 짧았지만, 무언가를 남겼다. 설명하기 어려운,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를.

시간은 계속 흘렀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해야 할 일들을 했고,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그 멈춤의 순간은 하루 전체에 다른 색을 입혔다. 조금 덜 조급했고, 조금 더 여유로웠다. 사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저녁 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것도 기억난다.

이 책은 그런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이 머무는 자리. 그곳은 어딘가 멀리 있지 않다. 숨 한 번 고르는 사이에, 발걸음 하나 멈추는 사이에, 창밖을 바라보는 그 짧은 순간에 열린다. 거기서 우리는 자신을 만나고, 삶을 만나고, 세상을 다시 본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천천히 스미는 것들의 의미를 발견한다.

이 책이 당신에게 그런 순간을 선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읽는 동안만이라도, 잠시 멈춰 서기를. 그리고 책을 덮은 뒤에도, 가끔은 걷다가 멈추기를. 하늘을 올려다보기를. 깊이 숨 쉬기를.

당신의 시간이, 어딘가에 머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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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 그림, 글쓰기로 저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예술가. 공방 창업의 꿈까지, 창작의 모든 순간을 솔직한 언어로 기록하고 나다움에 대해, 심리치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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