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관계인 인턴과 간호
인턴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낸다. 아직 어둑한 새벽녘, 코끝에 아려오는 차갑고 축축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출근해서 출근하며 보았던 하늘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짙은 남색의 하늘을 보며 퇴근을 하니까
우리는 병원이라는 일터에서 하루에도 다양한 복장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환자, 보호자, 간병인, 안내데스크 직원,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 선생님, 영상 촬영실 선생님, 엘리베이터 직원, 119 구조 대원, 환경미화원, 신부님, 수녀님, 인턴 동기, 전공의 선생님, 교수님 등등
어느 때는 얼굴을 마주 보며 인사를 하기도, 바쁠 때는 차마 인사를 못하기도 하며 하루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을 마주한다.
이렇게 수많은 직종의 사람들 중에서 유독 인턴들과 부대끼며 일을 하는 직종이 있다. 가장 많은 교류를 하는 만큼 미운 정 고운 정 온갖 정이 다 쌓여버린 분들. 바로 간호사 선생님들이다.
모든 관계는 쌍방의 상호 관계이지만 우선 나는 인턴이니까 인턴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가 보려 한다.
우리 인턴들과 간호사 선생님들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이다. 미울 때는 한없이 밉다가도 또 감사할 때면 또 한없이 감사한 간호사 선생님들
인턴의 하루는 간호사 선생님들의 콜로 시작해서 간호사 선생님들의 콜로 마무리된다.
정해진 정규 업무를 하면서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하나씩 쌓여가는 콜들을 하나씩 해결해 가는 게 인턴의 하루이다.
한 병원에서 6개월씩일을 하면 모든 병동을 경험하게 된다. 근무하는 과마다 담당 병동이 있기 때문인데, 온 병원을 헤집고 다니며 일을 하다 보면 유독 나와 잘 맞는 병동이 있다.
의사로 치자면 전공별로 과의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것처럼 병동도 역시 병동별로 특유의 느낌이 있다.정형외과 선생님들끼리, 또 마취통증의학과 선생님들끼리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처럼 병동에도 왠지 모르게 비슷한 간호사 선생님들이 모여 계신듯하다.
중환자실에는 성격이 시원시원한 선생님들이 많다. 목소리도 크고 말투나 행동에서 쿨내가 흐른다. 그래서일까 중환자실에서 일할 때는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속이 시원하고 일이 착착착 흘러간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중환자실과 잘 맞았고 중환자실에서 일을 하는 게 재미있었다. 주치의로 근무하면서 중환자실에 갈 일이 많았기도 했고 진짜 해결하기 힘든 일들도 거의 중환자실에서 터졌던 나는 중환자실 선생님들과 전우애가 쌓였다. 그래서 중환자 실에서 콜이 올 때면 왠지 고향에서 콜이 오는 것만 같은 몽글몽글함이 느껴진다.
호스피스 병동에 계시는 선생님들은 뭐든지 품어줄 것 같은 푸근함이 있다. 늘 편안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호스피스 병동의 영향일까, 호스피스 병동 선생님들도 늘 평온하고 자애로우며 왠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진다. 주로 연차가 높으신 선생님들이 계시고 병동의 특성 때문인지 마치 이모(?)처럼 대해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 고생한다며 간식도 많이 주셔서 더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응급실 간호사 선생님들은 용맹한 여전사 같다. 응급실은 다른 병동들에 비해 환자분들의 캐릭터가 다양하고 별의별 일이 다 있다 보니 심적으로 단련이 되나 보다. '이 정도 고통으로는 나를 쓰러뜨릴 수 없어'의 아우라를 풍기며 다니는 이 선생님들은 무인도에 갇히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만 같은 강인함을 보여준다.
간혹 술에 취한 환자들이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어이 아가씨' 하는 무례한 언행을 할 때 '여기 아가씨가 어딨어요? 말씀 제대로 하세요' 하며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 모습을 보면 속이 다 시원할 정도이다.
그 이외에 병동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데, 마이너 병동이라고 해서 막 마이너스럽고 메이저 병동이라고 해서 막 메이저스럽지는 않은 것 같다.아 정형외과 병동은 예외다. 정형외과 병동 간호사 선생님들은 왠지 정형의 느낌이 폴폴 풍긴다.
이렇게 다양한 병동, 다양한 선생님들과 일을 하며 여러 추억들이 생겼다.
너무 감사했던 적도, 극대노를 한 적도 있다.
물론 극대노를 했다고 해서 선생님들께 직접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베개에 얼굴을 박고 육두문자를 소리쳤던 건 안 비밀이다.
여러 극대노 포인트 중 하나를 이야기하면 당직이 아닌 새벽에 전화가 올 때다. 예를 들어 1월 1일 당직이 A고 1월 2일 당직이 B라고 하자. 1월 2일 02시에 급한 일이 생겨 인턴에게 전화를 해야 할 상황이다. 그럼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될까?
당연히 A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1월 1일 당직이 A라는 뜻은 1월 1일 18:00부터 1월 2일 06:00까지 A가 근무한다는 뜻이니까. 하나 상황이 너무 급했던지, 미처 생각을 못 했던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신규 선생님이셨는지는 몰라도 당직이 아닌 B에게 전화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당직이 아니라 한참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새벽 2시에 전화가 온다. '선생님 OO 병동인데요'
이미 잠이 깨어버린 나는 깊은 한숨을 한번 쉬고 '저 오늘 당직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때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면 '그래 실수할 수 있지'라고 이해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아 네' 하고 끊어버릴 때, 화가 솟구치며 소위 말해 꼭지가 돌아버린다.
당직이더라도 급하고 급하지 않은 걸 구분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전화 노티도 속이 터진다.
당직하던 날 새벽 3시, 저녁에 밥 먹은 게 소화가 잘 안되어 속이 더부룩하다며 새벽 3시에 전화가 왔다. 토를 했냐고 물어보니 아니란다. 설사를 했냐 그것도 아니란다. 그럼 그냥 속이 더부룩한 거냐 물었더니 맞단다.
소화제 처방을 내겠다고 전화를 끊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이게 전화로 얕게나마 잠이 들었던 당직의사를 깨울만한 콜이 맞나?
그 이외에도 엉뚱한 환자에게 EKG나 ABGA를 해달라고 노티한다던가, 다른 환자의 검사 결과를 노티 한다던가
심지어는 환자의 컨디션이 안 좋아서 활력징후(Vital sign)을 짧은 간격으로 측정해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꼭 해야 되는 거냐며 하기 싫은 티를 낸다던가..
'그래 실수할 수도 있지' 생각하며 넘길 때도 많지만 내가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이런 일을 마주하게 되면 나도 사람인지라 잠시나마 인간혐오에 빠질 때가 있다.
아 컨디션이 좋더라도 극대노 포인트는 용납이 안된다.
하나 이런 일만 있었다면 지금까지 스트레스성 위궤양이 안 생겼을 리가 없겠지
하지만 지금 내 위는 아주 깨끗하다. 스트레스 받는 일도 많지만 그보다는 좋은 일, 감사한 일들이 훨씬 많다.
3월에 갓 입사했을 당시, 처방 내는 법조차 잘 몰라서 낑낑대고 있을 때, 이 약은 보통 어떤 용법으로 얼마큼 내는지 하나하나 자세히 알려주시던 선생님들
수술방을 준비할 때 필요한 기계와 물건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알려주시던 선생님들
교수님들께 혼나지 않도록 내가 빠뜨린 것들을 조용히 뒤에서 챙겨주시던 선생님들
병동에 들렀을 때 간식 소매 넣기(?)를 해주시던 선생님들
당직 때 힘내라며 건네어주던 커피, 맛있는 게 있으면 뒤로 따로 불러서 같이 나누어 먹자던 선생님들
내가 해야 할 간단한 드레싱을 먼저 해주시고, 병동에 굳이 안 와도 된다며, 쉬라고 해주시던 선생님들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한 기억들도 한 트럭이다.
결국 인턴과 간호사 선생님들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이다.
스트레스 받는 일들이 있다 한들 부분으로 전체를 해석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100개의 선플보다 1개의 악플이 기억에 선명하게 남듯이, 병원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감사함과 미움의 비율이 1:99지만 1개의 미움이 더 자극적이고 기억에도 깊이 남는다.
하나 그런 경험으로 간호사 집단 전체를 미워하고 적대시하면 결국은 우리의 손해일뿐이다.
이전에도 여러 번 말했듯이 인턴생활, 아니 병원생활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없다.
인턴의 업무를 함께하는 간호사 선생님들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또 우리 인턴들이라고 간호사 선생님들을 열받게 하는 순간이 없겠나
처방도 틀려, 드레싱하고 뒷정리도 안 해, 대답도 퉁명스러워, 술기도 계속 실패해, 인턴에게 할 컴플레인을 자꾸 간호사 선생님들한테 해
생각해 보면 간호사 선생님들께 미안했던 일들이 많은데,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선생님들이 참고 넘어가 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턴들과 간호사 선생님들은 어쩔 수 없이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인다.
고운 정이 많이 쌓이다 보면 서로 호감이 생겨서 인턴-간호사 커플이 생기는 거고, 미운 정이 많이 쌓이면 서로 얼굴도 보기 싫어서 직접 얘기는커녕 메신저조차 한마디 이상 나누지 않게 된다.
어떻게 해서 커플이 되고 어떻게 해서 주적이 되는지 일을 해보면 안다.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면 직접 인턴을 해보며 스스로 경험해 보자
환자의 치유라는 공통의 궁극적인 목표를 가진 동료이자, 같은 월급쟁이 직장인의 처지인 인턴과 간호사
어차피 얼굴을 보고 함께 일해야 할 사이라면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서 좋은 사이를 유지하자.
사람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사이가 좋은 사람, 애정이 가는 사람,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도와주게 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