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인턴] 머리가 굳어버린 말턴

내가 가진건 텅빈 머리와 튼튼한 다리

by 작문의

나는 말턴이다. 평가에서 자유로운 몸이 된 인턴은 해리포터에게 양말을 받은 도비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로 자유를 만끽한다.

물론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한다. 사실 말턴이 일을 안 하는 건 말턴이고 말고를 떠나서 한 사람의 의사로서, 또 사회인으로서의 기본이다.

1월, 2월에 아파서 입원한 환자분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흔히들 3월에는 아프지 말라는 말을 한번 즈음 들어보았을 텐데, 3월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참 환자분들께 면목이 없다.

3월 만큼은 제발 건강하시라고 환자분들께 목놓아 외치고 있지만, 1월과 2월은 아니다.

능력이 무르익을 대로 익어서 일을 제일 잘할 때이지만 일을 덜하는 건 마인드의 차이니까

하지만 나 역시 말턴인지라 일을 대충 하고 싶은 미숙한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때가 많다. 이렇게 솔직한 고백을 기회 삼아 계속 마인드를 고쳐가야지.


CMC_Talk%EF%BC%BF20240124%EF%BC%BF202924%EF%BC%BF408.png?type=w773 불쌍하게 보여서 어떻게든 콜을 줄여보려는 말턴


하여간 나는 요즘 하루하루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즐기고 하루에 소시지를 세 개씩 데워 먹으며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다시금 체감하는 중이다.

한 손에는 소시지 한 손에는 제로콜라를 들고 통통하게 올라온 배를 쓰다듬다가 갑자기 문득 내가 정말 의사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손은 나날이 빨라지고 있는데 손이 빨라지는 만큼 머리는 더욱 빠르게 굳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달 전, 전공의 시험을 볼 때만 해도 머리가 팽팽 돌아가서 나름 괜찮은 의사로 성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목 위에 달린 게 커다란 돌멩이인지 머리인지 분간이 안 간다.


1706095674786.jpg?type=w773 요즘 나의 행복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머리를 열심히 쓰라는 말일 텐데, 반대로 몸이 고생하니까 머리가 나빠져버렸다.

사실 인턴 일을 하다 보면 머리를 쓸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

국가고시를 치르기 위해 100만큼 공부했다면 인턴 일을 하면서 쓰는 건 5는 되려나 모르겠다.

분명 이 세상 어딘가에는 공부했던 내용을 적재적소 잘 활용하는 S급 인턴 선생님들이 계시겠지만 부족한 점이 많은 나는 그렇지가 않다.

나에게 배움과 현장은 너무나도 달랐다.

주치의 업무를 맡는다고 해도 루틴 처방, 약속 처방에 시나브로 익숙해졌다. 간혹가다 환자의 상태가 안 좋아졌을 경우 바로 교수님께 노티를 드리거나 병원의 천사 같은 존재인 내과 선생님들에게 연락을 드렸다.

인턴의 본분은 사고 치지 않는 것이라 이렇게 하는 게 환자를 위해서, 또 모두를 위해서 이게 맞는 일이긴 하나 가끔은 인턴이 의사가 맞긴 한가 싶을 때가 있다.


qUkEFaPJPd%EF%BC%8DZdudRFZ60UF8U2VOogQG75%EF%BC%BFqHUPylo5cHpa1VzZBaZcNuQf8HnSpf%EF%BC%8DfSaHy1ZajEgXaR4bJ1K6Q.jpg?type=w773 흔한 내과 선생님들의 모습


스무 살 시절, 위풍당당하게 이마에 주민등록증을 척하니 붙이고 술집에 들어갔던 우리

의사 면허증이 나온 이후 이마에 의사면허증을 떡 하니 붙이고 어깨 쫙 허리 쫙 펴고 대학병원에 들어왔다.

이제 의사의 인생이 시작되는구나. 오늘을 위해 6년간 열심히 공부해왔다. 세상아 덤벼라

하지만 대학병원에서 인턴은 무엇 하나 맘 편히 맡기지 못하는 불안한 존재였다.

환자를 위해서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를 위해서 인턴은 사고 확률이 낮은 술기, 사고 확률이 낮은 매니지를 한다.

두뇌가 사용하는 ATP는 점차 줄어들고,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두 다리가 미친 듯이 ATP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도 두 다리가 움직여 다음 병실에 도착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두 다리는 하루 종일 움직인다.

그렇게 스쿼트없이도 백색근, 적색근을 10개월 동안 튼실하게 키운 나는, 속이 빈 수박처럼 텅텅 소리가 나는 머리와, 실전 압축 근육으로 무장한 두 다리를 갖게 되었다.


Screenshot%EF%BC%BF20240124%EF%BC%BF203246%EF%BC%BFSamsung_Health.jpg?type=w773 만보 이하로 걷는 날이 손에 꼽는다


실력 있는 의사가 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막상 의사가 되니까 실력이 없어져 버린 아이러니 한 상황 (물론 나만 그럴 수도 있다)

요즈음 내 머릿속에 Red flag sign이 켜졌다.

당장 한 달 뒤면 레지던트로 근무해야 하는데, 이 상태로 갔다가는 나를 뽑아준 의국의 얼굴에 먹물을 한 사바리 뿌려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나는 학생 시절에 거의 배운 적이 없는 마이너과 레지던트가 되는데, 이대로 가면 진짜 동태 같은 눈깔로 가만히 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말턴을 즐기되 남는 시간에 머리에 지식을 조금씩 채워 넣어야겠다. 소위 말해 진심으로 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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