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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문의 Jan 24. 2024

[병원인턴] 머리가 굳어버린 말턴

내가 가진건 텅빈 머리와 튼튼한 다리

나는 말턴이다. 평가에서 자유로운 몸이 된 인턴은 해리포터에게 양말을 받은 도비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로 자유를 만끽한다. 

물론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한다. 사실 말턴이 일을 안 하는 건 말턴이고 말고를 떠나서 한 사람의 의사로서, 또 사회인으로서의 기본이다.

1월, 2월에 아파서 입원한 환자분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흔히들 3월에는 아프지 말라는 말을 한번 즈음 들어보았을 텐데, 3월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참 환자분들께 면목이 없다.

3월 만큼은 제발 건강하시라고 환자분들께 목놓아 외치고 있지만, 1월과 2월은 아니다.

능력이 무르익을 대로 익어서 일을 제일 잘할 때이지만 일을 덜하는 건 마인드의 차이니까

하지만 나 역시 말턴인지라 일을 대충 하고 싶은 미숙한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부끄러울 때가 많다. 이렇게 솔직한 고백을 기회 삼아 계속 마인드를 고쳐가야지. 


불쌍하게 보여서 어떻게든 콜을 줄여보려는 말턴


하여간 나는 요즘 하루하루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즐기고 하루에 소시지를 세 개씩 데워 먹으며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다시금 체감하는 중이다.

한 손에는 소시지 한 손에는 제로콜라를 들고 통통하게 올라온 배를 쓰다듬다가 갑자기 문득 내가 정말 의사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손은 나날이 빨라지고 있는데 손이 빨라지는 만큼 머리는 더욱 빠르게 굳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달 전, 전공의 시험을 볼 때만 해도 머리가 팽팽 돌아가서 나름 괜찮은 의사로 성장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목 위에 달린 게 커다란 돌멩이인지 머리인지 분간이 안 간다.


요즘 나의 행복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머리를 열심히 쓰라는 말일 텐데, 반대로 몸이 고생하니까 머리가 나빠져버렸다.

사실 인턴 일을 하다 보면 머리를 쓸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

국가고시를 치르기 위해 100만큼 공부했다면 인턴 일을 하면서 쓰는 건 5는 되려나 모르겠다.

분명 이 세상 어딘가에는 공부했던 내용을 적재적소 잘 활용하는 S급 인턴 선생님들이 계시겠지만 부족한 점이 많은 나는 그렇지가 않다.

나에게 배움과 현장은 너무나도 달랐다.

주치의 업무를 맡는다고 해도 루틴 처방, 약속 처방에 시나브로 익숙해졌다. 간혹가다 환자의 상태가 안 좋아졌을 경우 바로 교수님께 노티를 드리거나 병원의 천사 같은 존재인 내과 선생님들에게 연락을 드렸다.

인턴의 본분은 사고 치지 않는 것이라 이렇게 하는 게 환자를 위해서, 또 모두를 위해서 이게 맞는 일이긴 하나 가끔은 인턴이 의사가 맞긴 한가 싶을 때가 있다.


흔한 내과 선생님들의 모습


스무 살 시절, 위풍당당하게 이마에 주민등록증을 척하니 붙이고 술집에 들어갔던 우리

의사 면허증이 나온 이후 이마에 의사면허증을 떡 하니 붙이고 어깨 쫙 허리 쫙 펴고 대학병원에 들어왔다.

이제 의사의 인생이 시작되는구나. 오늘을 위해 6년간 열심히 공부해왔다. 세상아 덤벼라

하지만 대학병원에서 인턴은 무엇 하나 맘 편히 맡기지 못하는 불안한 존재였다.

환자를 위해서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를 위해서 인턴은 사고 확률이 낮은 술기, 사고 확률이 낮은 매니지를 한다.

두뇌가 사용하는 ATP는 점차 줄어들고, 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두 다리가 미친 듯이 ATP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도 두 다리가 움직여 다음 병실에 도착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두 다리는 하루 종일 움직인다.  

그렇게 스쿼트없이도 백색근, 적색근을 10개월 동안 튼실하게 키운 나는, 속이 빈 수박처럼 텅텅 소리가 나는 머리와, 실전 압축 근육으로 무장한 두 다리를 갖게 되었다.


만보 이하로 걷는 날이 손에 꼽는다


실력 있는 의사가 되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막상 의사가 되니까 실력이 없어져 버린 아이러니 한 상황 (물론 나만 그럴 수도 있다)

요즈음 내 머릿속에 Red flag sign이 켜졌다.

당장 한 달 뒤면 레지던트로 근무해야 하는데, 이 상태로 갔다가는 나를 뽑아준 의국의 얼굴에 먹물을 한 사바리 뿌려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심지어 나는 학생 시절에 거의 배운 적이 없는 마이너과 레지던트가 되는데, 이대로 가면 진짜 동태 같은 눈깔로 가만히 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지도 모른다.

말턴을 즐기되 남는 시간에 머리에 지식을 조금씩 채워 넣어야겠다. 소위 말해 진심으로 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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