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는 소중한 과정
체감상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출간과정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열정에 가득 차 뛰어들었던 에세이 출간이었으나 실제로 책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상상 이상의 노력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책은 내고 싶다고 해서 도깨비방망이로 뚝딱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써온 내 원고의 가치를 알아주는 출판사를 찾아야 했고, 책 표지 디자인을 고르고 들어갈 문구들을 선정해야 했다.
필명을 쓸지 실명을 쓸지도 정해야 했고 프롤로그와 작가 소개 페이지 등등, 독자의 입장에서는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응당 책에 들어가야 할 모든 것들을 열심히 적어야 했다. 그리고 인쇄 작업에 들어가기 전까지 끊임없는 퇴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지난 두 달 동안 그 모든 과정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해온 끝에 나의 책이 세상에 나올 준비를 마쳤다.
나는 일이 마무리될 때 즈음, 처음부터 일을 다시 되새김질하는 습관이 있다. 이번에도 역시 <의사로 한번 살아보겠습니다>라는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돌이켜보려 한다.
에세이뿐만 아니라 어떤 장르의 책을 출간하고자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양질의 원고이다. 음식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맛'인 것처럼 책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는 '내용'이다.
글을 쓰기 전, 내가 어떤 종류의 글을 쓰고 어떤 장르의 책을 출간하고 싶은지 먼저 갈피를 잡아야 한다. 나 같은 초보작가에게는 에세이의 문턱이 타 장르들에 비해 그나마 문턱이 낮았다.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솔직하게 적는 글이 곧 에세이니까
소설은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실제 사람 같은 인물을 만들어야 하고, 그 인물에 대해 깊은 연구와 상상이 필요하다. 흘러가는 사건을 설정하고 기승전결을 이끌어내는 사건과 그에 따른 인물의 변화, 소설을 통해 독자가 배울 수 있는 교훈 등등.. 이 모든 것들을 작가가 상상해야 한다. T 성향인 나에게는 소설은 써 내려가기 퍽 어려운 장르였다.
비문학 즉 논픽션도 마찬가지였다. 의사 경력이 단 1년밖에 되지 않는 내가 의학에 대해서 글을 쓸 수는 없었다.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나의 글의 정확성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전문분야라고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6년 동안 공부했던 의학마저 그런데, 의학 이외에 깊이 아는 다른 분야도 없었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 첫 책의 장르는 자연스럽게 에세이가 되었다.
에세이를 쓰는 것은 쉽지만 동시에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들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글인 만큼 일기와는 차별점이 있어야 했다. 에세이를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내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주제들을 뽑아내는 일이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밋밋한 일상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를 찾아내야 했다. 돌이켜보면 인턴생활 속에서 하나라도 더 배우고 최대한 열심히 하려고 했던 데에는 '어디 흥미로운 소재가 없나' 하는 속물적인 마음이 자리했을지도 모른다. 경험하는 것에 비례해서 재미있는 소재가 생기지 않을까, 눈에 불을 켜고 이곳저곳 뛰어드는 하이에나 같은 인턴이 바로 나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열정 넘치는 인턴으로 비쳤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스스로는 다른 검은 속마음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글쓰기의 생명은 성실함과 꾸준함이었다. 흥미로운 주제가 생기면 언제나 휴대폰을 켜서 메모장에 적어두었고, 어떤 흐름으로 글을 쓸지 대략적인 초안을 손가락 가는 데로 휘갈겨놓았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주제와 관련된 문장들을 하나둘씩 적어내려 갔다.
다른 병동으로 이동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글을 적고, 밥을 먹으면서 글을 적었다. 기가 막힌 문장이 떠올랐을 때는 병동에서 병동으로 이동하는 복도에서 잠시 멈춰 서서 글을 적었다. 당직을 서던 늦은 새벽에는 무거워져 가는 눈꺼풀을 이겨내며 글을 적었고 버스에서 기차에서 지하철에서 글을 적었다.
도무지 아무런 문장도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하루 종일 중얼거리며 그 주제에 관한 모든 경험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떠올려보았고, 그러다 보면 전구에 불이 켜지듯 불현듯 문장이 떠오르곤 했다.
다음은 퇴고의 차례이다. 퇴고에는 초고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블로그에 올릴 글 하나만 해도 이틀 이상 시간이 필요했다. 초고를 적을 때부터 형식과 규칙에 얽매이면 글이 전혀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운 나는, 초고만큼은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문장의 길이도 쉼표도 맞춤법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아주 엉망진창으로 휘갈겼다. 퇴고는 그런 문장들을 사람들이 읽을 만한 문장으로 탈바꿈하는 작업이다. 문장들이 내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는지, 글을 읽을 때 숨이 차지는 않는지, 사용한 단어들이 적절한 단어들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초고를 작성할 때의 격한 감정으로 부적절한 내용이나 표현이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검토해야 했다.
퇴고는 한 번으로 끝나는 작업이 아니다. 퇴고를 한 글을 다시 읽어보면 또 고쳐야 할 점들이 눈에 보인다. 그렇게 한 번을 더 고치고 또다시 읽어보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점들이 또 눈에 보인다. 하루에 세 번 네 번 이상 퇴고를 하더라도 다음날에 다시 읽어보면 고쳐야 할 점들이 또다시 눈에 보이는 끊이지 않는 무한궤도. 그렇게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의 퇴고 과정을 거친 후에야 나는 블로그에 글 하나를 올릴 수 있었다.
기가 막힌 점은 당시에는 혼신의 노력을 다해 퇴고를 마쳐 올렸던 글들이, 지금 다시 읽어보면 또다시 고쳐야 할 점들이 많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완벽한 퇴고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퇴고의 과정은 스스로와 어느 정도 타협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띄엄띄엄 적었던 문장들이 쌓여 퇴고를 통해 한 편의 글이 되었고, 그 글들이 모여서 한 챕터가, 챕터가 모여서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약 300페이지의 책 한 권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대략 140페이지의 워드 파일이 필요했다. 이게 어느 정도 분량인가 설명하자면, 1주일 노력이 들어간 블로그 글 하나는 짧으면 워드 1페이지 길면 3페이지 정도 된다. 그러니 책 한 권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 작업을 최소 50번 반복해야 한다. 1주일에 글 한편으로 계산하면 원고 작성에만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니 책을 쓰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준비를 갖추는 것만으로도 긴 여정이다.
블로그에 글을 15편 정도 올릴 때까지는 그저 재미있었다. 글을 쓰는 자체만으로도 기뻤고 내가 쓴 글이 마치 내 아이인 것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하지만 글을 20편 정도 올렸을 무렵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이 점점 커져갔다. 어느 순간 취미가 숙제가 되어버렸고 오늘 쓰려고 했던 글을 못쓰면, 마치 해야 할 일을 못 끝낸 것처럼 적잖은 무게감이 어깨에 지워졌다. 그러다 문득 '내가 행복하자고 하는 일인데 자는 시간과 쉬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글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일명 '블태기'가 찾아왔다.
나와 블로그 사이의 권태기는 주위 사람들의 관심 덕분에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이고, 그 행위의 목적은 결국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함이다. 글쓰기에서 점점 멀어질 무렵, 인턴 동기들이 내 글을 잘 읽고 있다며 다음 편은 언제 나오냐고 채근해 주었고, 또 내 글을 또 다른 그들의 동기들에게 추천해 주었다.
한 인턴 동기의 부모님께서 내 블로그를 통해 글 잘 읽고 있다며 동기를 통해 말씀을 전해주시기도 했고, 또 어떤 동기의 형제가 댓글을 통해 '내 글 덕분에 동생의 생활을 잘 알게 되었다'는 인사말을 남긴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의대생들 혹은 의대 지망생들이 메일이나 댓글로 본인의 고민 상담을 해오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내 글들이 단순히 나의 개인 기록이 아니라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1년 동안 여유로울 때는 자주 쓰기도 하고, 바쁠 때는 한 달 동안 못쓰기도 하며 50여 편 이상의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담은 글들도 있고, 동기들을 인터뷰 한 글들도 있었다. ㄱ그렇게 1년 동안 켜켜이 쌓아 올린 나의 글들은 <의사로 한번 살아보겠습니다>라는 책의 소중한 원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