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반도체로 벌어들인 달러화를 원화로 바꿔 은행에 예금하려고 했는데, 은행들이 거절했다고 한다. 언론 등에서는 부동산 대출 규제로 인해 은행이 대규모의 예금을 가계대출과 연결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최근 은행대출은 오히려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올해 1~2월 가계대출은 약 1조 원 감소했지만 같은 기간 중 기업대출은 15조 원 이상 늘어났다. 기업대출 증가에 힘입어 올 2월 중 은행대출은 10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늘어났다. 따라서 대출할 곳이 없어서 예금을 안 받는다는 것은 은행의 핑계일 가능성이 크다.
대출 증가에도 불구하고 은행이 예금을 거절하는 이유는 예대마진 하락과 연체율 상승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지만, 예금은 대출의 원천이 아니라 대출의 결과다. 즉 대출의 원천은 자기자본이며 대출이 예금을 창조한다. 그리고 대출로 인해 생겨난 예금은 대출이 상환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고 이리저리 주인(예금주)을 옮겨 다닌다. 반면 대출은 차주가 파산하면 소멸한다. 따라서 개별 은행 차원에서는 예대율(대출÷예금)이 100%를 넘을 수 있지만 한국은행 자금순환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경제 전체적으로는 결코 100%를 넘을 수 없다. 연체율이 높아지고 예대마진이 하락하는 상태에서의 예금 증가는 은행의 예대율과 수익성을 모두 하락시킨다. 은행의 거액 예금 거절은 이 같은 차원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 최근 삼성전자는 은행 예금 대신 연 2.7%의 수익률이 예상되는 만기 3개월 이내의 단기 은행채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한다. 은행채는 은행의 자금 조달원이라는 측면에서 은행 예금과 같다. 그런데 예금은 안되고 은행 입장에서 조달 비용이 더 높은 은행채는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첫째, 예금에 부과되는 높은 수준의 의무 지급준비율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3개월짜리 정기예금과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수시입출금예금에 1조 원을 반반씩 나누어 예치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은행들은 지급준비율(수시입출금 7%, 정기예금 2%)을 고려해 무수익자산인 지급준비금 450억 원을 한국은행에 예치한 뒤 줄어든 9,550억 원으로 자산을 운용해야 한다. 따라서 고객에게 일정한 수익률을 약속하는 경우 1조 원의 예금에서 지급준비금을 떼고 남은 9,550억 원을 굴려서 수익을 내는 것보다는 은행채로 받은 1조 원을 운용하는 게 유리하다.
두 번째는 단기 자금을 비교적 안전하게 운용할 수 있는 국채(정부채)나 통안채(통화안정증권)가 부족하다는 점도 있다. 국내 은행들은 국채를 거의 보유하지 않는다. 경제 규모에 비해 국채가 많지 않고 한국은행도 국채 매매를 통한 통화정책을 별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채와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는 통안채 역시 한국은행이 적극적인 발행을 꺼리기 때문에 양이 충분하지 않다. 국채는 정부로부터 이자를 받지만, 통안채의 경우 한국은행이 이자를 지급하기 때문에 국회와 언론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국채나 통안채 모두 국가가 이자를 지급하는 채권이지만 국채는 국가부채로 잡히고 통안채는 그렇지 않다는 문제는, 소위 국가부채의 본질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제일 수 있지만, 논점에서 벗어나므로 생략하자.
몇 차례 언급한 대로 우리나라는 (높은 의무 지급준비율과 국채의 미활용 때문에) 은행 자산에서 차지하는 예금의 비중이 낮은 대신 은행채의 비중이 높다. 이는 회사채 시장을 교란할 뿐 아니라 통화정책의 효과성도 떨어뜨린다. 게다가 은행이 삼성전자의 예금을 거절한 이번 사태에서 드러난 것처럼 기업(자금조달과 생산)과 은행(자금운용과 결제)의 역할 분담 체계가 흔들릴 수도 있다.
국내 은행들의 은행채 의존도가 높아서 회사채 시장이 종종 불안한 이유, 은행의 의무 지급준비율이 높고 국채가 잘 활용되지 않아서 통화정책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이유 등은 한국은행의 은행 감독 배제 등 구조적인 요인과 관련이 있다. “국채 발행은 미래의 세금이고,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는 담론 효과, 또는 밈(meme) 효과는 그런 구조적인 문제를 뒷받침한다고 생각한다.
구조적이고 복잡한 문제일수록 찬찬히 따져서 해결해야 한다. “의자왕의 삼천궁녀 때문에 백제가 멸망했다”는 식의 직관적이지만 근거 없는 스토리에 의지하면 제대로 된 처방을 내리기 어렵다. 최근 은행들의 예금 거절 해프닝이 국내 금융시장과 통화정책의 구조적 문제들을 살펴보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진리처럼 수용했던 경제학적 밈들 역시 다시 한번 살펴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추신) 경제학을 좀 더 재미있고 현실적인 것들과 연결하고, 경제학에 관한 편견과 오해 중 우리에게 이롭지 않은 것들을 찾아서 고쳐보겠다는 거창한 생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동시에 책도 쓰는 중입니다. 하지만 능력의 부족이라는 너무나 단단한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해 한곳에 집중하는 것이 능력 부족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되어서 당분간 짧은 글은 쉬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쓰게 해주시고, 읽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