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정책의 효율성을 높이려면

by 노진호

올해 재정지출은 예년보다 규모가 커졌다. 상반기 중 추경 편성도 예상된다. 그래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으면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인하해야 한다.

중앙은행은 복잡한 정치적 의사결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우며 이윤도 추구하지 않는다. 이런 독립성은 중앙은행이 (지폐와 동전을 제외한) 현실적인 통화 발행 주체인 정부와 은행을 견제하거나 지원할 수 있는 힘이 된다.

하지만 독립성만으로 통화정책이 잘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통화정책의 효율성을 높이려면 은행의 국채 보유 확대, 한국은행의 은행감독 강화와 법정 은행 지급준비율의 대폭 인하가 필요하다. 이유를 살펴보자.

작년 4분기의 경제 지표는 안 좋았지만 올해 1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만장일치로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그뿐 아니라 의결문에서 ‘기준금리의 추가 인하’ 문구까지 삭제했다. 경기 회복 신호가 아직 나온 것도 아닌데 금리 인하 가능성마저 서둘러 봉쇄한 이유는 2월 초 공개된 의사록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부동산 가격과 환율이 불안해서다.

부동산 투자는 일자리, 교육, 주택 공급, 국회에서 결정되는 세율 등에 기인한 장기 기대 수익의 영향을 받는다. 버냉키 전 미국 연준 의장은 그의 『21세기 통화정책』에서 통화정책은 너무 둔탁하여 부동산 가격 안정의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으며 잘못 사용하면 고통스러운 결과만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금 과장하면 대포로는 새를 잡을 수 없고 엉뚱한 것만 파괴할 수 있다는 말이다.

통화정책 외 수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는 환율도 마찬가지다. 통화의 삼중난제(the monetary trilemma)에 의하면 자본 이동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환율 안정과 통화정책의 독자성은 동시에 달성할 수 없으며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쉽게 통제하기도 어렵고 정부 정책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부동산 가격과 환율을 한국은행이 성장이나 고용보다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통화정책의 효과성이 제한된 상태에서 너무나 많은 문제가 통화정책 탓으로 돌려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기준금리와 장・단기 시장금리, 은행 대출금리가 자주 다르게 움직인다. 한국은행이 관리하는 지급준비금이 시중 유동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신호다. 지급준비금은 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일종의 요구불예금이다. 은행은 지급준비금이 부족하면 파산한다.

하지만 시중 유동성이 풍부하거나 은행이 국채 등의 안전자산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면 필요시 중앙은행과 다른 은행을 통해 지급준비금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중앙은행은 이런 원리를 이용해 국채 매매나 은행 간 신용대출, 또는 국채 담보대출 등의 기준이 되는 금리를 정한다. 우리는 이를 통화정책이라 부른다.

선진국 은행들의 의무 지급준비율은 대부분 제로다. 은행은 위험하지만 수익성 높은 대출 자산과 상대적으로 수익성은 낮지만 안전한 국채 등의 비중을 자율적으로 정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은행의 지급준비금 잔고와 기준금리 수준이다.

그런데 국내 은행들은 고객 예금잔고의 최대 7%까지 이자 수익이 전혀 없는 지급준비금을 의무적으로 쌓아두어야 한다. 이로 인해 국내 은행들은 예금 부채 대신 지급준비금 적립 의무가 없는 은행채로 자금을 조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은행채 발행 금리에는 민감해지는 반면 지급준비금 관리를 위한 안전자산의 보유와 기준금리의 변화에는 둔감해진다. 이는 기준금리와 장・단기 시장금리, 은행 대출 간의 연계를 약화시킨다. 은행채 발행 규모가 커지면 회사채 시장이 위축되고 금융 불안의 시기에는 기업의 유동성 위기까지 초래될 수 있다.

그럼에도 국내 은행의 의무 지급준비율이 높게 책정된 이유는 한국은행이 평상시 은행의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의 변동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해 두터운 완충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장기간의 재정 흑자로 인해 국채가 부족하고 금리보다 통화량을 중시하는 사고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탓도 있다.


[출처 : 머니투데이]


[참고 1] 이 글을 완성하고 난 직후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았습니다. 최근 국제결제은행(BIS)에서 자료를 발표했는데, “한 나라의 국가 부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사실상 마비된다”고 경고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쓴 글과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인 것 같아 기사에서 인용된 국제결제은행(BIS)의 논문을 찾아보았습니다. 가정(hypothesis)으로부터 결론이 도출되는 전형적인 주류 경제학 논문이었습니다. 이런 논문에서 중요한 것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해서 수리적 모형을 만들고 모형에 현실 데이터를 넣었을 때 그 모형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주느냐 아니냐입니다. 놀랍게도 가정이 현실적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 논문은 현실 데이터를 모형에 넣어 통계적으로 검증을 한 것도 아닙니다. 가정을 수학적인 모델로 만들고 다시 그것을 풀었을 때의 시사점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마치 물리학에서 자연계를 대상으로 수학적인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을 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복잡한 현실 세계를 축약해서 수학적인 사고 실험을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런 논문들을 가정 의존적인 동어반복(tautology) 내지 순환론이라고 비판합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의 탈을 쓴 경제학의 정치적 행동이라고 비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 BIS 논문에서는 GDP 대비 정부채 부담에는 상한선이 존재한다고 가정합니다. 게다가 정부의 부채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이자 부담 때문에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지 못한다면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부정합니다. 첫 번째는 학파마다 의견이 달라서 논쟁의 여지가 많은 가정이고 두 번째는 그리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최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연준 개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수학적인 모델로 위장해서 작성한 정치적인 논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의견이 정답으로 둔갑하는 현상입니다. BIS 논문에서는 하나의 의견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지만 위의 기사에서는 BIS의 권위를 내세워 마치 진리처럼 보이는 것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BIS 논문에는 나오지도 않은 일본의 사례까지 덧붙였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와 함께 말입니다. 악의로 작성한 것은 아니겠지만, 시간에 쫓겨 작성되고 여과 없이 유통되는 경제 기사에서 무수히 많은 편견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 2] 2025년 말 기준으로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현금(동전과 지폐)이 M1과 M2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15%와 5%입니다.


[참고 3] 주요국 중앙은행이 규정한 은행 예금에 대한 의무 지급준비율

자료 : 한국은행, 미국연방준비제도, 일본중앙은행, 유럽중앙은행, 위키피디아(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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