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을 감명 깊게 읽고 난 후, 김초엽 작가의 장편 소설인 <파견자들>이 학교 도서관에 있다는 걸 안 다음날 곧바로 도서관에 갔다. 연체로 인해 도서 대여가 불가능해 도서관 안에서 전부다 읽어야 했지만, 4시간 반이라는 시간동안 앉은 자리에서 쉬지 않고 전부다 읽었다. 그만큼 흡수력이 대단했고, <지구 끝의 온실> 이후로 왜 김초엽 작가의 작품에 빠지게 됐는지에 대해 다시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특히 초반부의 묘사가 정말 생생했다. 글을 읽으면 그 장면이 그려져서, 머릿속에서 영화가 재생되는 듯 했다. 예를 들면 서랍에서 나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라던지, 등장인물이 겪는 혼란, 배경에 대한 묘사까지 말이다. 아마도 내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작품이나 관련 영상을 즐겨봐서 그런 영향도 있겠지만.
해당 작품이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파견자들>이 가진 주제의식이라는 점이었다. <파견자들>에서 주인공(프로타고니스트)과 반동인물(안타고니스트)는 '범람체'와 범람체에 '감염'된 일련 집단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다. 주인공과 그 찬동 인물은 범람체와 감염체가 공존할 수 있는 존재들로서 보았다면, 반동인물들은 이들을 극복하고, 박멸하며 승리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반동인물들의 이러한 주제의식은 파견자들의 서약과 작품 중반에 나타나는 칼럼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은 오로지 인류의 번영을 위하여 행동하고, 범람체들이 뒤덮인 지상 세계와 지구를 마땅히 인류의 것이며 되찾아야만 하는 것으로서 생각한다.
이 가치관 대립의 시발점은 관점의 차이로 나타난다. 외계로부터 온 범람체와 지구에 살고 있던 인간의 대립과 같은 세계관은 이를 대변한다. 작중 '오로지 내가 나로써만 존재해야 하며, 자아를 가져야만 '나'이고, 자아가 없는 것은 죽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태린과 그것이 왜 죽음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외부 생명체인 범람체의 대화에서 그 가치관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범람체는 '나' 들의 집합이 이루는 '우리'가 아니라, 모든 것들이 '나'이자 정의할 필요가 없고, 집단이자 하나이기 때문에 자아의 상실을 죽음이 아니라 일종의 합류,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는다.
'마땅히 인간의 것'인 지구를 뺏어간 범람체를 바라보는 작중 인류의 시선은 언뜻 모순되어 보인다. 범람체를 연구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이유는 범람체를 말살하기 위함이다. 범람체가 만들어내는 풍경을 아름다워하면서 한편으로는 이들을 증오하고 멸절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자아라는 것 또한 그런 것이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제프를 쏘았던 태린처럼,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끝끝내 이해할 수 없다. 서로의 이해가 다르며, 서로가 추구하는 바가 다른 것은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 반대거나.)
'가이낙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제의식은 대략 이러하다.
'인간은 자아로 인해 고립되어 있고, 고독하며, 외로운 존재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선뜻다가가는 것은 어렵다. 타인으로부터 내적인 상처를 입기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고, 우리는 비록 가진 배경이나 경험이 달라 자아의 충돌로 서로 상처입힐 수도 있지만, 부족한 부분을 서로 사랑해줄 존재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
<파견자들>이 가지는 주제의식도 이와 비슷하다. 쏠은 어릴적 자신의 존재로 인해 위험에 처한 상황의 태린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죽였다. 태린은 쏠의 존재를 밖으로 내보내려하고 제거하려 들지만, 이번엔 태린이 쏠과의 공존을 선택한다. 외계에서 온 존재이자 이름으로 구분되는 인간처럼 자아가 없음에도 스스로를 하나의 개체로 여기는 범람체 쏠과, 원래 지구에서 살고 있던 존재이자, 다른 존재와 구분되어야만 살아있다고 여기는 인간이지만 쏠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태린은 한 몸에서의 공존을 선택한다. 태린이 격리되었던 실험실에서 결국 범람체와 인간을 분리하지 못했다. 범람체가 지구로 들어온 경유는 작중에서 나오지 않지만, 태린과 그 몸에 들어간 쏠은 서로 태어난 존재, 이미 세상에 나온 존재이기에, 이들은 일체성을 가지지만 또 서로의 자아는 양립하는 모순적 존재이다. 그럼에도 이는 태린과 쏠 모두 의도한 일이 아니고,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기에, 서로 공존할 수 밖에 없다. 분리가 서로의 파멸을 불러올 수 밖에 없다면, 그리고 서로의 존재로써 유익함을 찾을 수 있다면, 이해할 수 있다면, 함께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인간과 범람체 대립 구도의 해소는 태린과 쏠, 그리고 태린을 거두었으며 스승인 존재이자 태린 몸 안의 쏠을 격리시킨 존재인 '이제프'로써 완성된다.
이제프는 지구를 탈환하기 위해 지상으로 파견되는 파견자들 집단에서 가장 우수한 인물이며, 범람체를 몰아내고자 하는 인간들의 존경을 받고 군림하는, 권위를 가진 이 중 한 명이다. 태린을 자식처럼 여기며 사랑하고, 한 명의 제자로서 존중하며 아낀다.
태린은 이제프에게 엘리트 파견자로서의 존경심과 보호자로서의 애정, 그리고 연심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람체와의 공존에 동의하지 않으며, 자신을 ─보호자로서든, 스승으로서든─ 사랑하기에 행하는 거라고 얘기하는 이제프를 쏘아 (고의는 아니지만) 죽인다.
이는 신세대와 구세대가 가지는 세계관에 대한 이해, 서로 다른 의견을 관철하고 대립하며, 비슷하지만 다른 이해를 낳는 구도로 보였다.
꽤나 예전에 <프로이트 패러다임>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해하기로 프로이트는 아이는 그 부모를 하나의 모범으로 여기며 따라하는 존재로 여기면서, 한편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최초의 이성인 아버지(혹은 어머니)를 차지한 다른 부모를 억압자이자 넘어서야만 하는 존재로서 여긴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장했다는데, 이러한 구도가 왜인지 태린과 이제프의 관계에서 엿보였다. 태린은 이제프를 파견자로서의 모범이자 자신의 앞길을 먼저 나아간 존재이며 부모이자 연모하는 존재로 생각하지만, 범람체와의 공존을 반대하는 대립 구도로 이어지자 태린을 억압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실제로 이제프는 태린에게 인간의 지구를 물려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자신이 가진 범람체에 대한 생각을 관철한다.
태린은 이제프에 대한 복합적인 사랑과 존경을 넘어서서 결국 이제프를 쏜다. 의아하게도 태린은 이제프의 설득과 회유에 넘어가는 듯한 묘사가 나오다가, 갑작스레 쏜다. 왜 쏜 것인지에 대한 묘사는 작중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 또한, 그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결정하고 마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아의 선택이라는 점 또한 시사하는 것 아닐까 한다. 결국 세대가 서로의 배경, 서로의 경험과 그로 인해 형성된 자아를 끝끝내 이해할 수 없다는 주제의식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세대(부모)를 죽여야만 하는 세상의 섭리를 그린 것으로 보여져서 더욱 감명 깊었다.
한동안 책을 읽지 않아서 이제는 독서에 대한 애정이 사라졌다고 이미 생각했는데, 나를 책의 세계로 이끈 <지구 끝의 온실>에서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던 작품이다. 읽다가 기지개를 필 때서야 내가 목이 마르다는 사실을 자각할 정도였다. 하나의 연극처럼, 혹은 드라마처럼 진행되는 서사 뿐 아니라 인간을 벗어난 시점에 대한 묘사도 훌륭했는데, 균사체처럼 묘사되는 범람체와 그들을 바라보는 인류 뿐 아니라, 인류를 바라보는 범람체의 감상은 어떨지 다양한 방식으로 세세하게 서술한 것은 역시 김초엽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라고 할만 하겠다.
혹시 만약 SF, 디스토피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독서에 흥미가 없더라도 꼭 한 번은 권하고 싶다. 어렵지 않고 재밌으니까... 눈 여겨본 책이 있는데, <숲의 신>이라는 책이다. 꽤나 두꺼운 책이었는데, 이번에 책을 읽었다는 자신감이랑 계기로 당분간에 읽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