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 펭귄(Nihilist penguin)밈에 대해

But why?; 삶에 던지는 의문

by 박창휘

2026년에 들어서서 알게된 밈(meme)이 하나 있는데, 바로 허무주의 펭귄(Nihilist penguin)이다.

허무주의 펭귄.jpg 무리에서 떨어져 정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허무주의 펭귄.

https://www.youtube.com/shorts/YC1ezC6YwgI

"... 무리 중 하나가 저희 눈에 포착되었습니다. 중심에 있던 녀석입니다. 이 개체는 먹이가 많은 가장자리로 가는 것도 아니고, 무리로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짧은 시간 후, 우리는 그가 곧장 산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70km 정도 떨어진 곳 말입니다. 에인리 박사는 그가 펭귄을 잡고 무리에 다시 넣는다고 할지라도 즉시 산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도대체 왜일까요(But why)?"

"But why?"

이 펭귄이 이런 돌발행동을 하는 이유로 '본래 무리 속에서 짝짓기에 실패해서', '동사해버린 새끼를 붙잡고 있는 짝과 함께하기 위해서' 등이 있다는데, 아무래도 출처가 된 다큐멘터리가 15년 전에 촬영된 것인데다 원본은 영어로 되어있는 영상이기 때문에 내가 정확하게 확인하는 건 힘들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이 펭귄이 무리를 떠나 홀로 허허벌판을 향해 걸어가는 광경은 퍽 특이하다. 펭귄은 집단 생활을 하는 동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엄동설한 속에서 무리가 떼를 지어 빙글빙글 돌면서 열을 만들어내고, 바다의 포식자들로부터 생존을 도모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 펭귄은 자살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동물이 스트레스로 인해서 자해나 자살을 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지만, 인간만큼의 지성을 가지지 않은 존재가 생존 본능을 거스르고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는 광경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 의미있어 보이고 뜻 깊게 다가오는 것이다.


"They survived, he lived."

이렇게 새해를 들어 영미권을 강타하는 밈이 허무주의 펭귄(Nihilist penguin)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아마도 앞서 언급했던 이 펭귄이 무리를 떠난 이유에 있다. 짝짓기에 실패했든, 이미 죽은 새끼와 그것을 붙잡고 있는 짝과 함께 하려는 것이든, 거의 무조건 죽음이 이 펭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펭귄은 생존(Survive)하고 싶다는 생물의 생존 본능이라는 자연의 질서에 정면으로 반박하듯이 날개를 펴고 걸어갔다.

펭귄의 삶이란 무엇일까? 짝을 이루어서 새끼를 낳아야만 하는 것일까? 무리 속에서 태어나 무리 속에서 죽는 것일까? 그렇게 해야만 펭귄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펭귄들은 그렇게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고,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개체로서의 개성은 가질 수 없다. 플레이어가 아닌 NPC가 되고 만다.

영미권 사회에서는 개인의 개성에 대한 가치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밈을 즐기고 소비하는 젊은 층의 사람들에게 사회 질서에 대한 의구심과 저항, 일탈은 낭만적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실제로 그럴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비록 죽는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길을 뛰쳐나간 펭귄처럼 ─아마도 그런 생각은 없이 어떤 스트레스로 인해서 이유 모를 행동을 한 것이겠지만─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Live) 모습이 감명깊게 다가왔고, 이런 점이 뒤늦게 바이럴이 되어서 떠도는 것 아닐까 싶다. 그래서 허무주의 펭귄 영상에서 달린 코멘트 중 "They survived, he lived. (그들은 '생존'했고, 그는 '살았다'.)"라고 짧게 감상을 남긴 것을 보았는데, 이 밈의 핵심을 강타하는 짧은 코멘트였다.


허무주의 펭귄, 실존주의 펭귄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 펭귄은 허무주의 펭귄이라고 불러야 되나 싶었다. 허무주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다. 무리에서 떨어져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무리에서 떨어져야 할 이유도 없다. 생존해야만 하는 이유도 없지만, 생존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사람들이 이 펭귄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맥락은 전체 속에서 의미없는 연명을 거부하고 70km나 떨어진 산을 향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펭귄은 허무주의 펭귄이 아니라 반대로 삶의 의미를 찾는 펭귄, 혹은 자신의 길을 찾은 펭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 밈이다.

점점 자신의 삶에 의미를 더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 '사람이 으레 살아야하는 삶'이라는 본질보다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더하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밈의 이름으로 '실존주의 펭귄(Existenialist penguin)'이 더 정확히 표현하는 바를 뜻하는 지칭 아닐까? 실존주의(existentialism)란 본래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의미는 없을 수 있다는 전제로서 개인의 선택, 책임과 실천을 통해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간다에 방점을 두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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