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하신다면 가르쳐드리는 게 인지상정인 출산의 세세한 민낯
지난 일주일은 오빠도 나도 초긴장의 상태였다. 하루에 몇만 명씩 코로나 확진자가 나오는 가운데, 스치기라도 했다가는, 불확실성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고 제왕을 선택한 내 용기가 물거품이 되어버릴 판이었다. 일주일 내내 둘이 집에 콕 박혀 금요일에 있을 신속항원 검사를 기다렸다. 금요일에 무사히 음성이 나오면 병원에 입장할 수 있다는 목표 하나로 버텼다. 나에게만 스멀스멀 드는 또 하나의 걱정은 주수보다 조금 큰 이든이가 약속된 날짜보다 먼저 나오겠다고 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애진작에 제왕절개를 선택해 놓고서 자연분만의 과정과 호흡법 같은 것들에 대해선 하나도 공부하지 않은 나는 혹시나 이든이가 갑작스레 신호를 보낼까 봐 임신 기간 내내 이어졌던 가벼운 증상들에도 괜히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신속항원 검사까지 잘 마치고 드디어 출산일이 되었다.
9시쯤 집에서 나서기로 해놓고선 늘 그렇듯 오빠보다 내가 먼저 준비를 마쳤고, 소파에 앉아서 잘 정리된 집을 둘러보면서 멍한 상태로 오빠를 기다렸다. 감상이랄 것도 없이 아무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건조하게 집을 나서서 오빠 차에 올라 병원으로 오는 내내 동안도 차 안이 유난히 조용했다. 둘 사이에 아무 말없이 시간을 메꾸는 순간들은 자주 있어왔는데 오늘따라 침묵이 유달리 무겁게 느껴져서 무슨 말을 해야 될까 고민해봤지만, 고민한다고 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 병원에서 제왕절개를 한 후기들을 검색해서, 포스팅 당 열 번 이상은 정독했었기에 나는 마치 아이를 낳아본 사람처럼 병원의 절차에 익숙하게 따를 수 있었다. 병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 딱 보기에도 북적거리는 병동을 보며 혹시나 1인실을 배정받을 수 있을지 물어봤지만 산모들에게 널리 퍼진 악명답게 역시나 1인실은 다 찼다고 답을 받았다. 이 결과가 내가 이 병원을 선택한 걸 후회할 이유가 될 줄을 이땐 미처 몰랐지…
10시 반쯤부터 블로그에서만 보던 출산 전 처치들이 나한테도 순서대로 행해졌다. 병동 간호사실에 일단 짐을 맡기고 다인실 병상의 남는 자리에서 제모부터 시작했다. 출산 3일 전 예약해 뒀던 브라질리언 왁싱을 셀프 격리로 취소해버렸기 때문에, 숱이 무성한 채로 베드에 누웠고 간호사가 도루코 면도기 같은 일회용 면도기를 들고 배 부분의 잔털과 외음부 위쪽 털들을 슥슥 베어냈다. 왁싱의 뜨끈하고 따끔한 고통조차 없이, 병원 침대에 누워 간호사에게 제모를 받는 기분은 정말 묘했다. 잘려나간 털들은 3M 테이프로, 옷에 붙은 먼지 떼듯 간호사가 수거했다. 한참 민망한 와중에도 저렇게 제모하면 피부 다 쓸릴텐데 하는 걱정과 크림이라도 바르고 해 주면 좋겠다는 사치스러운 마음, 다시 털이 자랄 때의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으로 왁싱을 미리 어떻게든 받았어야 했나 싶었다.
이 간호사는, 간호사로 취직해놓고 왜 처음 보는 산모들 제모나 해주고 있어야 하나 싶겠지 해서 미안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찰나 아 여기 좀 더 해야겠네요 라고 그녀가 정적을 깨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엇 죄송해요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보다도 열 살은 어려 보이는 그녀는 나른하면서도 단단한 말투로 “뭐가 죄송해요, 아무데서나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하고 끝을 온화하게 올리며 뜻밖의 대답을 했다. 나는 이내 울고 싶어졌다. 모두가 배려해주고, 모두가 신경 써주는 나의 수술 날 막상 왜 나는 남의 눈치나 살피고 있는 걸까. 엄마가 되는 걸 두 시간 앞두고도 간호사에게 이유 없이 미안해하며 시간을 보내다니 스스로가 멋대가리 없이 느껴졌다. 언제나 어디서나 곧고 당당한 엄마가 될 수 있어야 할 텐데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주어 그녀에게 고마워질 지경이었다.
다음 순서는 수액 바늘을 꽂는 거였다. 수술 중 혹시 모를 상황에 혈액 수급해야 할 걸 대비해 굉장히 굵은 바늘을 꽂아야 하는데, 나의 팔뚝은 혈관이 안 보이기로 악명이 높다. 노련한 10년 차 간호사 수경이도 언니 팔은 혈관이 안 보인다며 핀잔을 줄 만큼, 피 뽑거나 주사 놓을 때마다 고생하는 나의 팔을 간호사가 붙잡고 한참 톡톡 때리다가 결국 다른 간호사를 불러왔다. 그녀도 신중하게 오랫동안 내 팔을 문질문질 해보다가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손목에 있는 혈관에 바늘을 찌르기 시작했는데, 바늘을 한 번에 꾹 넣는 것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 겨우겨우 밀어 넣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악 소리가 절로 났다. 솔직히.. 출산 날의 모든 과정 중에 수액 바늘 꽂는 게 제일 아팠다.
겨우겨우 수액 주사를 마무리 짓고, 이든이의 태동검사가 이어졌다. 10분 정도 지나고 검사 결과를 확인해 본 간호사가, 아가가 안 움직인다며 좀 더 지켜보자고 했다. 아이를 낳는 일이란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말 걱정 속에 지내야 하는 거구나 싶었다. 이든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 어느 때보다 두려워졌다. 이내 아이는 조금씩 태동을 보였고 그 상태로 30분 정도 대기하고 있으려니 간호사가 찾아와 이제 수술실로 가자고 통보해왔다. 뒤가 휑 뚫린 수술복 위에 가운을 걸치고, 직접 수액 트레이를 밀며 6층으로 향했다. 분만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문에서 오빠를 대기시킨 뒤 안으로 들어가 추가 태동검사를 실시했다.
분만장 한 구석의 베드에 누워 태동검사를 받으며 생각했다. 출산 수술이라니. 보험에서는 질병으로 분류되어 버리는 출산 수술의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다른 질병들처럼 왜 이 병이 하필 나한테 찾아왔나, 왜 하필 내가 이 무서운 수술대에 올라야 하나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다시 말해, 가임기의 아주 많은 여성들이 이 수술을(제왕이든 자연분만 후처치든) 거치기 때문에 나만 유난스럽게 너무 힘들다, 너무 아프다, 너무 괴롭다 호들갑을 떨 수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엄마가 되려면 겪어야 하는 이 무섭고 알 수 없는 여정을, 다른 엄마들이 다 겪었다는 이유로 당연스레 받아들여야 하다니 왠지 조금 억울했다.
잡념 끝에 태동검사를 마치자, 간호사가 다시 나를 분만장 앞의 남편에게 데려갔다. 오빠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잘하고 오라고 했다. 눈물이라도 줄줄 흐를 줄 알았는데 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은은한 미소로 “이따 봐” 하고 의연하게 답했다. 웨딩 촬영을 5시간쯤 촬영했다면 나왔을, 광기 어리고 경직된 웃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온통 은색과 초록색인 수술실 안에 입장해 수술대에 올랐다. 간호사 분들은 많은 후기들과는 다르게 굉장히 친절했는데, 사실 친절하고 말고가 별로 중요하지 않을 만큼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하루에도 10명씩은 볼 평범한 산모에 대한 그들의 의연한 태도가 누군가에게는 불친절해 보였으려나. 내가 수술대에 오르고 있는 순간에도 옆 방의 아가는 우렁차게 울며 태어났고 얼굴 모를 그 집 애기 아빠는 수술방 앞에서 함께 목놓아 울고 있었다. 아이를 처음 보면 오빠도 저렇게 울게 될까 싶은 찰나에 마취가 시작되었다. 등을 세심하게 짚어보던 마취과 선생님이 조금 따끔해요 하면서 등에 주삿바늘을 꼽았다. 수액 주사에 비하면 모기 물리는 수준이었고, 주사를 꽂는 것보다는 새우등으로 몸을 웅크린 자세가 더 불편했다. 주사를 맞자마자 이내 다리가 뜨거워졌다. 이게 하반신 마취인가? 하며 다리의 무감각을 기억해두려고 하고 있을 때 간호사들이 와서 내 팔과 다리를 벌려 고정했다. 소변줄을 꽂는다고 해서 긴장했는데, 별 느낌이 없었다. 이내 십자로 뻗은 팔이 덜덜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조용한 수술방에 이가 위아래로 딱딱 부딪치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게 추운 건지, 겁먹은 건지도 헷갈리는 와중에 열 달 동안 봐주셨던 원장님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금방 잘해 드릴게요”가 에코처럼 들리며 나는 잠이 들었나 보다.
얼마나 지났으려나 누군가 이제 일어나셔야 돼요, 애기 나왔어요!라고 외치면서 나를 깨웠다. 간호사가 얼른 안경을 씌워줬고 안경을 쓰고 고개를 살짝 올려서 보니 누군가 이든이를 안고 있었다. 12시 50분, 약속한 시간에 이든이는 세상과 만났다. 저 아이가 정말 내 뱃속에서 나왔다니, 자궁부터 울컥하며 이든아 이든아 하고 울어버렸다. 울면서 애기 다 건강해요? 하고 물었는데 아무도 대답은 안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직감으로 아이가 무사하고 건강하게 나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만져보지도 못한 이든이를 간호사가 금세 또 데리고 나갔고 몸이 너무 흔들려서 이게 뭐지, 내가 떨고 있는 건가 했더니 그게 아니라 무언가 기다란 도구로 내 몸 안을 박박 긁어내고 있는 작업 중인 듯했다. 아 이렇게 몸이 망가진다는 거구나 하면서 또다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깼을 땐 아직도 수술실 안이었다. 너무 추워서 스스로 깬 기분이었다. 머리맡에 간호사 1명만 앉아있고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팔이 쿠당거리며 떨고 있었고 깬 순간부터는 이까지 딱딱거리고 있으려니, 간호사가 전기담요를 가져와 덮어주면서 옆 수술실 산모에게 응급 상황이 생겨 밖으로 옮기는 게 좀 늦어졌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수술실 안은 다시 마취를 시켜줬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추웠다. 두껍고 차가운 수술실 문으로 이 안과 세계가 구분되어 수술실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세 명의 간호사가 다시 들어와 나의 하반신을 바퀴 달린 침대로 옮겼고 상반신 이동에는 나도 용을 썼다. 하반신이 나한테 달린 것 같기도 안 달린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수술실 바깥쪽에서 혈압도 재고 회복하다가 다시 바퀴 달린 침대째로 수술장 밖으로 나갔다. 대기하고 있던 오빠가 머리맡으로 와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생했어 하고 말했다. 수술장 바깥의 얼굴 모를 남자처럼 엉엉 우는 드라마틱한 연출은 없어서 서운할 뻔했지만 오빠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을지, 그 경직된 얼굴 안 봐도 보이는 것 같아서 접어 두었다. 이든이 건강해? 손가락 발가락 다 괜찮아? 묻고 그렇다는 짧은 대답과 함께 병실에 도착했다.
배정된 병상은 나의 처참한 제모가 행해졌던 그 병실 칸 그대로였다. 자리도 하필 두 침대 사이, 창문도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나도 불편하지만 보호자인 오빠도 문제였다. 자리를 잡고 간호사들이 커튼 밖으로 나가자마자 오빠가 찍어둔 이든이 영상을 봤다. “응애”라는 의성어가 늘 어색하다고 생각했는데, 아가는 신기하게도 글자 그대로 “응애응애”하고 운다. 응애응애 우는 이든이를 안은 간호사가 이든이의 다섯 손가락, 다섯 발가락, 항문을 차례로 확인시켜줬다. 팔다리가 길고 예쁜 아가였다. 삼엄한 코로나 시국인지라 모자동실이 아예 불가능한 탓에, 거동을 못하는 수술 후의 나는 아기를 볼 수조차 없었다. 병실 바로 앞이 신생아실이라 몇 걸음만 걸어가면 유리창 너머로 아기를 볼 수 있는데도 그 몇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번이고 핸드폰 속의 이든이를 돌려보았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나 모성애 같은 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잠재된 DNA 같은 것일까. 나한테 그런 사랑 주머니가 달린 줄도 모른 채 살다가 이렇게 한 순간에 갑자기 발현되어 버리기도 하는 걸까. 이든이를 품고 있던 열 달 동안 이든이에 대해 가졌던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차라리 두려움이나 집착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실체를 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저 이든이를 잃는 일, 뱃속의 아가가 잘못되는 일, 그리고 그 이후의 슬픔과 막막함에 대한 두려움이 나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열 달 동안 이든이를 사랑했다기보다 열 달 동안 이든이를 집착적으로 보호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 진짜 사랑이었다. 정말 나에게서 태어난 아가라니. 경이롭고 대견하고 아름다웠다. 이미 탯줄을 잘랐고 나에게서 분리되어 나갔음에도, 그리고 나에게서 태어난 아가가 남편의 얼굴을 훨씬 더 빼닮았음에도 이미 우리 사이에는 탯줄보다 강력한 유대감이 이어져 있다고 믿고 싶었다. 나는 이든이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다.
몇 번이나 이든이를 들여다보다 정신이 조금 더 또렷해지고선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경이로운 순간에 엄마가 함께하지 못하다니, 엄마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났다. 11시쯤부터 병원 로비 아티제에서 마음 졸이며 소식을 기다리던 엄마 아빠는, 이든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가지고 내려간 오빠를 만나고서야 영상을 보고 눈물지으며 안도했다고 한다. 오빠가 이든이 태어난 날짜의 신문을 좀 사다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몇 군데의 편의점을 돌다가 못 찾고는 고속터미널까지 가서 신문을 구해오고 있는 중이라고. 종류별로 다 사서 3만원이 나왔다고 한다. 붓기도 하나도 없고, 아직은 통증도 없는 말간 얼굴로 엄마 아빠와 통화를 마쳤다. (통증과 붓기는 다음날부터 악몽처럼 시작된다는 걸 초짜인 내가 알 턱이 있나.) 아이를 낳고 나니 어느 때보다 엄마 아빠가 간절했다. 아가로 퇴행해버려 엄마 아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나보다도 거의 열 살은 어렸던 스물일곱의 혜정과 오빠보다 열 살도 넘게 어렸던 서른의 인봉을 떠올렸다. 인터넷으로 학습한 쓸모없는 배경지식조차 없었던 엄마는 나보다도 더 겁이 났을까. 아빠도 나를 안아 들고 벅차오르는 눈물을 흘렸을까.
나는 오후 5시까지 금식이었고 덩달아 오빠도 아침부터 한 끼도 못 먹은 상태였다. 마침 아빠가 신문과 함께 오빠 먹을 김밥을 사다 주셨다. 낮고 좁은 보호자 침대에 걸터앉아 우적우적 김밥을 욱여넣는 오빠가 안쓰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하나도 아프지 않고 배만 고팠다. 목도 너무 말랐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간절했다. 3시가 되면서부터는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되도록 따뜻한 물을 마시라고 해서 오빠를 시켜 복도 정수기에서 계속 물을 떠다 마셨다. 마신다고 마셨는데도, 처음 보는 간호사가 들어와서는 소변팩에 소변이 거의 없다며, 산모님이 꼴.찌.라고 물 무조건 많이 드셔야 된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나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이상한 오기가 생긴 나는 쉬지 않고 꼴깍꼴깍 물을 마셔댔다. 계속해서 오빠에게 빈 텀블러를 내밀며 물을 떠다 달라고 했다. 이 날이 나의 평생 중 가장 많은 하루 수분 섭취량을 기록한 날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늦은 오후쯤에는 이제 소변량 충분하하시네요 라는 소리를 듣고 의기양양해했다.
5시쯤 식사가 나왔다. 흰 죽에 간장이었는데 그야말로 시장이 반찬이라 허겁지겁 먹었다. 정확히는 오빠가 내 입에다 허겁지겁 떠 넣었다. 소변줄과 배 당김 때문에 전동 침대 등받침을 반도 채 올릴 수가 없었고, 그 상태로 밥을 먹기엔 테이블과 나 사이 거리가 너무 멀었다. 오빠가 밥을 떠먹여 줘야 했는데 확실히 좋은 간병인은 아닌 듯했다. 빠른 속도로 죽 한 그릇을 클리어했다. 오빠는 한 주 내내 계속해서 부동산 유튜브에 빠져 있었다. 수술하고 올라와 정신없이 누워있는 내게도 같이 듣기를 권할 정도였다. 내가 이든이와의 생활에 대해 걱정하는 건 지극히 미시적인 것들. 당장 기저귀는 뭘 써야 하나, 수유는 몇 달을 하는 게 맞나, 목욕은 어떻게 시키나 하는 잔걱정들과 스트레스. 반대로 오빠는 계속해서 이든이가 유치원을 가게 되었을 때, 이든이가 초등학교를 가게 되었을 때, 우리가 어디에서 어느 규모로 살고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굉장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후로도, 오빠가 아이를 낳은 감상과, 또 나의 회복에 대해 덜 신경 쓰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오빠가 가질 압박감을 생각했다. 애 아빠라도 저렇게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라 다행이라고 자위했다. 의외인 면도 있었다. 오빠는 남이 보기엔 22도씨의 텐션으로, 내가 보기엔 38도씨의 텐션으로 이든이를 귀여워하고 있었다. 이든이를 이야기할 때엔 묘하게 목소리가 올라가고 말이 많아졌다. 신생아실 앞에 가지 못하는 내가 오빠를 시켜 이든이 좀 보고 오라고 하면, 한 시간에도 몇 번이고 군말 없이 다녀왔다. (이든이는 계속해서 잠만 잔다고 했다.)
저녁이 늦어도 다리의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문지르고 꼬집어봐도 내 다리가 아닌 것처럼 손의 촉감만 느껴졌다. 상체 쪽에 힘만 주지 않으면 통증은 거의 없었다. 4시간마다 진통제 주사를 추가한 건, 혹시나 통증이 갑자기 심해질까봐 겁이 나서 꼬박꼬박 놔달라고 한 것뿐, 무통팩에 진통제까지 더해져 통증을 느끼는 것 자체가 불가했다. 다만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저녁때까지는 머리를 들지 말라고 했었는데 물 마시고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겠다고 버둥댄 것이 화근이었는지 머리가 너무 아팠다. 심호흡도 해보고 좋은 생각도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병원의 첫날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