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달 반의 유목생활, 그 이후 거꾸로 쓰는 여행기
3개월 반 동안 해외 이곳저곳을 떠돌다 집으로 돌아온 지 한 달째. 이제야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받아보았다. 아 그래, 꿈은 아니었구나. 내가 정말 긴 여행을 하긴 했구나.
스페인 바르셀로나 한 달 살기를 시작해 모로코-프랑스-영국-노르웨이-체코-헝가리-오스트리아-뉴욕에 이르는 이 무모한 여행을 무슨 생각으로 시작했을까. 여행 초반 쓴 일기장을 펴보자.
홀로 여행 15일째.
이방인이 된다는 게 마냥 외로울 것만 같지만 사실 그렇진 않다. 누구나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 보고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 있지 않은가. 잘 생각해 보면 외로움의 조건은 오묘하다. 한국에 있다고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고, 연인과 가족이 있다고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익숙한 공간과 익숙한 사람들 틈에서의 외로움은 설명이 잘 안 되고 전혀 예견되지 않은 외로움이라 더 사무치기도 한다. 반면 낯선 공간과 낯선 사람들 틈에서의 외로움은 예견된 외로움이기에 오히려 버틸 만 한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엄연히 말하면 없다. 어떤 도시에 가서 무엇을 봐야겠다는 계획이 없다. 발이 닿는 대로, 혼자면 혼자인대로, 함께면 함께인 대로. 그나마 하나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낯선 타지에서 혼자 잘 생활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이다. 그냥 그 느낌이 궁금했다. 마치 나를 두고 하는 하나의 실험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답이 yes라면 내가 어디서든 적응해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구나 하는 큰 자신감을 얻을 것 같고, 답이 no라면 한국에 돌아갔을 때 평소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가족과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함께 정착해서 살아갈 누군가가 생겼을 때 3개월간의 유목생활을 하며 느꼈던 이 외로움을 다시 꺼내보자.
2023.10.27
우리는 일상을 살아갈 때 관성에 의해 살아간다.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며 계속 반복되는 매일. 이 반복되는 일상은 우리가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바닥을 치지 않도록 지탱해주기도 하고, 반대로 굴레에 갇히게 만들기도 한다. 노력하지 않아도 나이가 먹을수록 인간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반복되는 일상과 지켜야 할 사람들, 이 두 가지로 지탱하는 것처럼 보인다. 저절로 도전보다는 안정을 향해간다. 내 안에 있는 장기 여행에 대한 갈망은 나이가 먹을수록 사라질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분명 같은 놀이공원인데 지금보다 어렸을 때 갔던 놀이공원이 세 배는 더 재밌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같은 경험이라도 시기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는 사실도 분명해진다. 2023년 26살의 나는 떠나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여행이 끝난 지금도 나는 어디에 정착해야 할지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아프리카에서 북극 그리고 북아메리카까지 이동하면서 내가 어떤 환경에서 행복감을 느끼는지는 좁혀졌다.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한 주제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후 조건에 따라 사람들의 성격이 눈에 띄게 다르다는 점이 너무나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 것 같지만 책으로 보는 것과 내가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껴보는 것은 깊이가 다르다. 마치 <총, 균, 쇠> 책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PD가 된 것 같은 느낌이라 할까. 너무 두꺼워서 읽기도 전에 겁부터 나는 이 책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인류 문명의 불평등은 생물학적 차이가 아닌 환경적 차이'라는 것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기후가 의식주를 넘어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도 결정한다는 게 정말 몸소 잘 느껴진다. 여행 동안 가보았던 모든 나라와 도시를 하나씩 곱씹어 보면서 점점 희미해질 이 소중한 경험을 나를 위해 기록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