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책임 사이에서 흔들리는 한 잔의 무게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도 장비라는 이름은 압니다. 호통치는 장수, 의리의 상징, 전장에서는 누구보다 앞장섰던 인물. 그는 늘 강했고, 늘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장비의 몰락은 더 오래 기억됩니다. 적의 계략이 아니라, 술 앞에서 자주 무너졌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장비는 훌륭한 장수였습니다. 유비의 곁을 끝까지 지킨 동지였고, 전투에서는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술이 반복될수록 그의 분노는 거칠어졌고, 그 칼날은 점점 적이 아닌 주변을 향했습니다. 결국 그는 전장이 아니라, 자신이 다스려야 할 부하들의 손에 허무하게 생을 마쳤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래된 역사 속 일화로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술 앞에서 무너지는 장면이 지금도 낯설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술이 사람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가 오면, 우리는 다시 그 경계 앞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서게 됩니다.
달력이 먼저 말을 겁니다. 약속이 늘어나고, 모임이 겹치며, 술자리가 일상의 일부처럼 스며드는 시기라는 것을요. 한 해를 정리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자리에서 술은 여전히 그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을 바라보면, 조금 다른 풍경이 보입니다. 술을 강권하지 않아도, 심지어 술을 마시지 않아도 그들은 충분히 시간을 나누고 관계를 이어갑니다. 술이 주인공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에 놓인 자리. 그 변화는 낯설기보다 오히려 단정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술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위태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는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던 한 잔이 어느 순간 판단을 흐리게 하고, 관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면들을 우리는 반복해서 봅니다. 뉴스를 통해 들려오는 숱한 사건 사고나 연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부 연예인의 음주 논란 역시 그런 익숙한 장면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술이 이성의 긴장을 풀고 감정을 솔직하게 만드는 촉매라는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 타인의 존엄을 침범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 술은 더 이상 소통의 매개가 아니라 폭력을 가리는 가면이 됩니다. 술자리라는 공간이 평등해 보일수록, 그 안에 숨은 위계와 권력은 취기를 빌려 더 쉽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전문가들은 술의 문제를 양이나 빈도보다 ‘조절’의 유무에서 본다고 말합니다. 많이 마셔도 멈출 수 있다면 아직 선택의 영역에 있지만, 멈추지 못하는 순간부터 술은 선택이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됩니다. 반복된 습관은 생각보다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일상을 잠식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순간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술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 단순히 의지의 부족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흐려진 판단력 뒤에 숨어 내뱉은 말과 행동은 결국 타인에게 상처를 남기고, 그 흉터는 술이 깬 뒤에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술이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술 때문에'라는 말은 용서를 구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고백에 가깝습니다.
저도 술을 마십니다. 한창 치열하게 일하던 현역 시절에는 조직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끝까지 남아 술자리를 지키던 때도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그때의 술은 즐거울 때도 있었지만 버티기 위한 도구였던 때가 많았습니다.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술에 기대어 관계를 확인하고 불안을 잠재우려 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술은 제게 여전히 ‘필요악’처럼 느껴집니다.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지만, 마냥 옹호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술은 사람을 바꾸기보다, 그 사람이 가진 내면의 균열과 평소 억눌러온 모습을 더 또렷하게 확대해 보여줄 뿐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잔의 개수가 아니라 술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잔을 들 때마다 우리는 선택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 한 잔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따뜻한 매개가 될지, 아니면 무책임을 가리는 방패가 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혹시라도 주변에서 “술 좀 줄여야 하지 않겠어”라는 말을 듣거나, 내가 과연 조절하고 있는지 스스로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면, 그 순간부터 이미 경계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늘 나는 술 앞에서 어떤 경계를 지키고 있는가. 취기에 기대어 소중한 것을 잃고 있지는 않은가. 술잔을 앞에 두고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