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 사라진 자리, 삼전도의 기억
요즘처럼 하늘이 높고 공기가 맑은 날엔 산책하기 좋은 곳이 많다.
그중에서도 석촌호수는 유난히 가을이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사이로 호수의 빛이 반짝이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걷는다.
그 길 한편, 빌딩의 그림자 아래 묵묵히 서 있는 오래된 돌 하나가 있다.
삼전도비(碑)
화려한 도심 속에서 그 비석은 마치 ‘시간의 틈’처럼 조용히 과거를 품고 있다.
‘삼전도’라는 이름을 처음 들으면 어딘가 섬 같지만, 사실 ‘도(渡)’는 ‘섬(島)’이 아니라 ‘건널 도(渡)’이다. 즉, 삼전도는 세 개의 논이 있는 나루터, 지금의 잠실 일대에 있던 한강 남쪽 나루였다.
조선 시대 이곳은 한강을 건너는 중요한 통로이자, 장터와 군대, 사신이 오가던 길목이었다. 지금의 석촌호수와 올림픽공원 일대가 모두 물길이던 시절, 사람들은 이 나루를 통해 강을 건넜다.
그러나 1637년 1월, 그 평범한 나루는 한 나라의 굴욕이 새겨진 장소가 된다.
병자호란 패전 후, 인조는 청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의식.
그 장면은 삼전도의 모래 위에서 이루어졌고, 그날의 기억은 조선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2년 뒤, 청 태종은 그 항복의 흔적을 영원히 남기라 명했다.
그리하여 1639년, 삼전도 언덕 위에 세워진 비석이 바로 ‘삼전도비’다. 비문은 한문·만주어·몽골어로 새겨졌고, 내용은 오로지 청 태종의 은혜와 공덕을 찬양하는 말들로 채워졌다. 조선의 왕이 항복했고, 청이 용서했다는 기록이었다.
조선의 문신 이경석과 장유는 비문을 쓰면서 “부끄럽지만, 후세가 반드시 보아야 한다”고 남겼다. 굴욕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기억의 표식’이었던 셈이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자 고종은 삼전도비를 강물에 던지게 했다. 굴욕을 씻으려는 행위였지만, 1917년 일제가 이를 다시 세웠다. 그들에게는 이 비석이 조선을 복속의 역사로 꾸며낼 좋은 도구였다.
해방 후 비석은 다시 땅속에 묻혔다가,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며 복원되었다.
그리고 2010년, 석촌호수 동쪽으로 이전된 지금의 자리에 서 있다.
세 번 묻히고 세 번 다시 드러난 돌 - 부끄러움을 덮을수록, 기억은 더 또렷해졌다.
삼전도비는 오랫동안 패전의 상징으로 불렸다.
하지만 지금, 가을 햇살에 반쯤 잠긴 그 비석 앞에 서면 다른 생각이 든다.
청의 글자로 새겨졌으되, 그 안엔 조선의 침묵이 있다. 침묵 속엔 부끄러움이, 부끄러움 속엔 기억이, 그리고 기억 속엔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가 있다.
굴욕의 흔적은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기억의 비’로 바뀌어 왔다.
석촌호수의 바람은 차갑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시간의 숨결이 흐른다.
삼전도는 더 이상 강이 아니지만, 여전히 ‘건넘’을 품은 이름이다.
굴욕에서 기억으로, 부끄러움에서 성찰로.
우리가 건너야 할 강은 어쩌면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Q1. ‘삼전도’는 어떤 의미를 가진 이름일까? ‘삼전도(三田渡)’는 ‘건널 도(渡)’로, 세 개의 논이 있는 나루터를 뜻한다. 지금의 잠실 일대 한강 남쪽이다.
Q2. 삼전도비는 왜 세워졌을까? 1637년 병자호란 패전 후,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1639년 청의 명으로 건립되었다.
Q3. 오늘날 이 비석은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세 번 묻히고 세 번 드러난 이 돌은 굴욕의 상징에서 ‘기억의 비’로 변했다. 시간이 덮은 부끄러움 위에서, 기억은 다시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