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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지혜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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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Jung Jan 11. 2022

나는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의 힘, 지식에 대한 고찰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이에 대해 지식을 뽐내며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타인이 모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우월감과 이에 대한 칭찬을 듣기 때문인 것.


그러나 인간에게 진실로 중요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닌,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의 지식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내가 알아야 할 것과 알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 내가 정말로 알고 있는 게 맞는가? (경험과 지식의 차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진실로 나의 지식이 맞는가를 검증해보자.

보통은 그것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고, 머릿속에서는 그 지식에 대해 많은 생각들이 지나간다.

하지만 그것을 글이나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가? 타인에게 그 지식을 설명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말문이 막히게 된다.


왜냐하면 막상 설명하고자 하니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가 된 듯 멍해지거나,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알고 있는 지식은 누군가에게 그 지식을 풀어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외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닌, 그저 머릿속에 들어있을 뿐인 경험에 불과하다.

당연하게도 지식이 아닌 경험을 글이나 말로써 표현하려고 하니,

뇌를 직접 들여다보는 방법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아주 흔하게 경험(Experience)과 지식(Knowledge)을 혼동한다.

경험은 누군가에게서 들은 것, 어딘가에서 본 것 등의

가공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주관적인 것을 의미하며,

지식은 그 기억을 가공하여 마치 책장에 책을 정리해서 꽃아 두듯,

연관된 기억에서 정보만을 분류해둔 객관적인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에게 아는 것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주로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정보를 보고 들었던 기억은 남아있지만, 그 정보를 지식으로 분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한 예시로, '어제 내가 에그타르트로 해먹은 계란이 맛있었다.'의 기억을 가진 사람에게,

계란에 대해 아는 것을 질문하면 보통은

'저번에 에그타르트 해 먹었는데 맛있었어, 또 해 먹고 싶다.'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건 경험이지 지식이 아니며, 여기에서 정보만을 추출해서 정리한 것,

'계란은 에그타르트로 해 먹으면 맛있다'가 지식이다.

그리고 그 지식에 'OOO이 또 해 먹고 싶을 정도의 맛'의 정보로 지식에 중요도를 부여한다.


특히 이러한 혼동은 사람이나 일에 대해서 질문할 경우 크게 느껴지는데,

OOO은 어떤 사람인가? ~는 어떤 일인가?라고 물어보았을 때,

'OOO은 짜증 나는 사람', '~는 힘든 일'이라는 주관적인 경험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OOO은 ~을 하는 사람', '~는 ~을 하는 일'이라는 객관적인 정보를 알고 싶은 것이다.


즉, 내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이란, 주관적인 경험이 아닌, 객관적인 정보로 이루어진 지식들이다.


- 내가 모르는 게 무엇인가? (부족한 지식의 깨달음)

위에서 진정한 지식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내가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 보다 명확해졌을 것이다.

내가 객관적인 정보로 설명할 수 있는 기억이 바로 지식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주관적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나, 정보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것, 그것이 내가 모르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되면 우리의 지식욕에 불을 지피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에서, 내가 잘 모르고 있었던 것들이 하나씩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이고,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보통 관심사에 해당하는 전문분야이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자존심과 자신감에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평소에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만큼, 사실은 내가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지금까지의 경험만으로 큰소리쳐왔던 자신의 행동이 부끄럽고 어리석게 느껴지는데,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지식을 증명해서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이전까지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를 인용하자면,

원래의 뜻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많기에,

말하지 못하는 것을 굳이 말로써 표현하지 말라는 뜻이지만,


진정으로 알고 있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부하고 큰소리치다가

모르는 것을 다른 사람에 의해 깨닫게 되었을 때 겪는 자신의 무지함을 광고,

그로 인한 수치, 트러블과 오해 등을 침묵으로 피하라는 조언으로도 볼 수 있다.

더불어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말할 수 없는 것은,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라고 본다.


소크라테스 또한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다.

그 말의 의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님을, 자신의 무지를 깨달으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끝에서 '나는 나 자신이 모르는 것을,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하였다.


나의 무지함을 알아야 비로소 진정한 앎이 시작될 수 있다.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것을 배우고 알 수 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티끌에 불과한 작은 것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세상은 아주 넓고, 정보는 홍수와도 같이 넘쳐흐른다.

그 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나는 내가 무지한 존재임을 안다.

내 나이 이제 고작 25의 젊은 나이에, 아무리 알고자 노력했어도,

내가 아는 것은 세상의 단편에 불과함을 안다.


그러니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니,

세상이 너무 넓어 죽을 때까지 알고자 해도 다 알 수가 없음이다.


배움은 평생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깨닫고,

겸손함을 가진 체 더 높은 배움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존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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