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만 보이는 길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길이 내 눈에만 보이기 시작했다.

by 문나인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길이 내 눈에만 보이기 시작했다. 그 길은 마치 나를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길의 끝은 보이지 않지만 기어코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한다. 투명한 듯 새하얀 듯 은은한 등불이 밝게 비춘 그 길을 향해 달려가고 싶어지게 된다. 그 길을 따라 걷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돌아서 반대로 향할 때면 늘 마음속 한 켠이 시큰해진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질문 있는 사람?


지겹기만 한 오후 수업들이 드디어 끝이 났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다. 나의 발 밑에 위치한 나에게만 보이는 그 길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보고 있다. 종례가 끝나자 모두가 요란하게 일어나 자기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왠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 내가 오늘 저 끝을 모르는 길을 따라 걷기로 다짐했기 때문일까?


나는 책상걸이에 걸어두었던 가방을 들어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책상 앞으로 밀어넣고 그렇게 복잡한 교실 속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해 뒷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왠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기분이 든다. 가슴 속에 일렁이는 묘한 감정을 뒤로 하고 겨우낸 용기를 되뇌었다.


이 길이 보이기 시작한 건 약 한 달 전이었다. 특별한 주문을 외웠다던가, 위험한 놀이를 시도했다던가 놀랍도록 그런 건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서 눈을 떴을 때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당연하게 생겨있었다. 그 길은 복잡하고 엉켜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길처럼. 그리고 그 길이 보이기 시작한 이후로 기이한 현상도 같이 나타났다. 시계가 거꾸로 돌아간다거나 방금 주문한 음식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지고 없다던가. 같은 반 친구인 세연이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침대에서 눈을 뜬 적도 있다. 마치 내가 시간을 역행하고 있는 건지 아님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게 말이 될 리가 있을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특별히 병원을 찾아야 할 정도로 증세가 악화되진 않았다. 이상 현상들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고 늘 일어나던 방식으로 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주일 전 하다못해 물건이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은 순간을 발견했다. 내가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식빵 한 조각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병원에 가볼 생각이 들었다. 엄마한테 얘기했더니 말도 안 된다며 우리 형편에 정신과 상담까지 받기는 어렵다는 말이 되돌아왔다. 그날 이후부터 세상이 모두 거짓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마법 같은 걸 쓸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싶어 수치심을 이겨가며 유치한 모든 방법과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일개 인간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무엇일까.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친오빠한테 이것과 관련 있는 의학 논문이 없냐고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자신은 그쪽 전문이 아니라는 말밖에는.


이쯤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나는 외로웠다. 왜인지 모르게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기분. 이상한 기시감 같은 게 구름처럼 내 머릿속에 몽실몽실 흐르는데 마주할 필요가 없다고만 단정 지어왔다. 외롭긴 하지만 지금이 너무 평온하고 평범해서 열정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죽겠지. 아니, 잠시. 죽어?


내가 죽어? 죽을 수가 있나? 왜 나는 당연히 더 이상 죽을 일은 없겠다고 예단해온 거지?


문득 잊고 있던 무언가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이런저런 생각으로 주변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저 계속 걸어오던 하얀 길이 발광하며 나를 덮쳤다.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뜨거운 열풍이 나를 확 감싸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세상은 온통 하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길이 없어졌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길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더 이상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놀란 듯 평온한 심장을 부여잡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죽는다. 죽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맞이하게 될 죽음이라는 순간. 그러나 나는 왜 그것을 잊고 살아왔는지, 무엇보다도 왜 당연히 누구도 죽지 않는다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던 것인지. 짧은 머리를 쥐어 잡고 가슴 앞으로 모은 무릎 위로 폭 쓰러졌다.


나는 죽고 싶은가, 또는 살고 싶은가. 별로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왜 하찮은 생명 따위에 내가 목을 매달아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이 백지 같은 공간에서 나는 죽고 싶은가 살고 싶은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는 문득 나의 삶을 돌이켜보았다. 내가 투명 인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집안 분위기. 개천에서 용 난다는 표현을 죽어도 싫어하는 가난한 집안에서 오빠는 용이 되었다. 전액 장학금으로 붙은 의대에,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오빠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까지 공부했다. 늘 부모를 원망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기에 오빠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그 때문일까. 가진 건 없어도 저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고 잘 유지해왔던 우리 가족의 모든 게 순식간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모두가 오빠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아빠는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공사장에서 짤렸다. 엄마는 아빠가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된 이후로 동네에 있는 작은 김 공장에서 근근히 일했다. 부모의 자존감 그래프는 바닥을 뚫고 더 깊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또 이렇게 말하면 울겠지. 날 재우고 먹이고, 그래, 그렇게 나를 키워냈지. 진짜 치사해. 최소한의 희생은 참 치사한 거야.


아, 그래. 오빠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학교에서도 투명 인간이었던 것 같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마치 새하얀 이 방 안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사무치게 외로웠던 것 같다. 그 감정에 공감이 된 순간 가슴이 미어지게 아파왔다. 눈물은 내 뺨을 타고 흘렀다.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도 없이 마구 흘러내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도, 집 밖에서도, 어디에도 내가 존재할 곳은 없다며 혼자 외롭게 분투하던 내가 떠올랐다.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관심. 그것보다도 더 원하는 게 있다면 누군가의 관심 없이도 외롭지 않은 나 자신.


그래서 잠깐은 내 세상에서 그토록 사무치게 외롭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서 나는 다시 외로움을 마주할 자신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어느 곳에서도 혼자였다. 하지만 외로웠으나 스스로 외로움을 모르던 내 자신이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당장에 외롭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건 그 순간만 행복할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늘 애매하게 살아왔다. 한 번도 제대로 내 의사를 당차게 말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마음속의 응어리가 실타래 엉키고 설키듯 거대한 눈두덩이처럼 불어나도 그것을 품고만 있었다. 아직도 여전히 마음속 말들을 거침없이 해낼만큼 용기 있지 않지만 이상하리만큼 정이 들지 않던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꿈에서 깨어나듯이 눈이 떠졌다. 밝은 백색등에 눈이 부셔 눈을 찌푸렸다. 몸이 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슬쩍 돌려 바라본 곳에는 엄마와 아빠가 울고 있었다. 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다급하게 벽에 달린 호출벨을 눌렀고 가운을 입은 오빠가 저 멀리서 다가왔다. 그 순간들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지나갔다. 소리도 귓속에서 먹먹하게 울렸다. 나지막히 읊고 있는 엄마의 입모양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