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마지막화

by 문나인

2018. 05. 15


기욱이에게,

기욱아, 나 주림이야.

무슨 말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날, 그 일이 있고 나서 오늘은 네가 수술받은 지 한 달 되는 날이야. 아직도 네 몸에서 피가 울컥울컥 튀어나오던 그때가 선명하게 떠올라. 근데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니. 하루가 무척이나 빠르게 지나가. 이러다가 훌쩍 일 년이 지나 있을 것만 같아. 수간호사님께서 네게 편지라도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어. 그런데 펜을 들 때마다 손이 떨려. 역시 아직은 좀 어렵다. 또 편지할게.



2018. 06.30


기욱이에게,

오랜만이야, 기욱아. 편지로는 오랜만이지만 얼굴을 꼬박꼬박 보러 가고 있어. 7월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벌써 날씨가 많이 더워졌어. 날이 많이 더워지니까 여기도 낮에는 밖을 잘 나가지 않아. 오늘은 연수 형사님이랑 형준 형사님이 수박을 사 오셔서 중앙휴게실에서 다 같이 나눠 먹었어. 아윤이랑 재혁이가 스케치북에 우리를 그려줬는데 그림을 보면서 우리 같이 그라피티를 그렸던 기억이 떠올랐지 뭐야. 셋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언제 적일지 까마득해. 그림 속 셋이 꿈만 같아. 참, 민우도 잘 지내고 있어. 민우는 요즘 원식이 삼촌한테 조경 노하우를 배우고 있어. 더운 날씨에 밖에서 힘들지 않을까 싶지만 무척 즐거워 보여. 너도 함께 하면 좋을 텐데...



2018. 07.13


기욱이에게,

매일매일 네가 깨어나길 기도드리고 있어. 네가 반드시 일어날 거라 믿어. 그날까지 우리 힘내자.



2018. 08.20


기욱이에게,

오늘은 다 같이 화채를 만들어 먹었어. 화채 베이스로 딸기우유 파와 사이다 파가 나뉘어서 한참을 토론했어. 나는 딸기우유 파였고, 민우는 사이다 파였는데 너는 뭐가 더 좋아? 다수결로 하자는 말에 너를 딸기우유 쪽에 포함시켰더니 한 표 차이로 우리가 이겼어. 수간호사님이 사이다를 쏟아버리는 바람에 결국에는 둘 다 넣게 되었지만 말이야. 그래도 결과적으로 맛있었으니 대성공이야. 정말 다행이지. 여름도 이제 거의 끝나가려나 봐. 저녁에는 아주 가끔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 같기도 해.



2018. 09.01


기욱이에게,

오늘 유민우랑 살짝 다퉜어. 진짜 나빴어! 날씨도 선선해진 김에 다 같이 연을 날리기로 했거든. 연을 날리는데 유민우가 내 연을 끊어버린 거야! 엄청 화를 내면서 쫓아갔는데 달리기가 너무 빨라서 못 잡았지. 약이 올라 미칠 지경이라구. 유민우 몸 엄청 커진 거 알아? 이곳에 남자 어른이라고는 원식 삼촌이랑 민우밖에 없으니까 힘쓰는 일을 도맡아서 했더니 그렇게 되어버렸어. 아무튼 다음번에 꼭 복수할 거야.



2018. 09. 30


기욱이에게,

오늘은 민우 생일이야. 본인이 말을 안 해서 몰랐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알았어. 그래서 다 같이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했어. 나연 간호사 언니가 케이크를 얼마나 잘 굽는지! 민우 생일 케이크지만 내가 거의 다 먹었을지도 몰라. 네 것도 조금 남겨서 가져왔어. 더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해. 언니한테 100개라도 구워달라고 할 테니까. 얼른 맛보고 싶지? 그럼 부디 일어나, 이제는.



2018. 10.30


기욱이에게,

이제 저녁 바람이 차. 그래도 완연한 가을이야. 날씨가 너무 좋아서 시간이 더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네. 나는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어. 여기서 일을 하다 보니까 제법 적성에 맞는 거 같더라고. 차근차근 하나씩 준비해 보려고. 너도 응원해 줄 거지?



2018.11.15


기욱이에게,

호스피스 사람들하고 같이 캠핑 분위기도 낼 겸 뒤뜰에서 캠프파이어를 했어. 아윤이와 재혁이가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간다니 믿을 수 없어. 이곳에서 초등학교가 멀어서 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 아이들의 고집을 꺾을 수가 있어야지. 결국 원식이 삼촌이 아침 일찍부터 태워다 주기로 했어. 역시 삼촌은 따뜻한 사람이야.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글자를 다 읽고 싶다길래 내일부터 내가 한글 수업을 해주기로 했어. 너도 믿기지 않지? 내가 선생님이라니. 아주 단호한 선생님이 될 테야.



2018. 12. 25


기욱이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챙겨본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 우리 꽃구름도 새 단장을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 크리스마스트리, 오너먼트 같은 연말 전용 소품들에 쌓인 먼지를 하루 종일 닦아도 끝이 나질 않더라. 그래도 결국 완성해 놓고 오늘 아침에 보니까 뿌듯했어. 어제저녁에 조금 고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바로 났어. 기욱아 너는 산타의 비밀을 알게 된 게 언제쯤이야?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곳에는 아직 동심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어른, 아이를 가리지 않고 말이야. 그래서 산타 역할도 자처했어. 어떻게 하면 더 진짜 산타할아버지처럼 웃을 수 있을지 열심히 연구했어. 하하 웃는 거보다는 허허 웃는 게 더 진짜 같아. 너도 잘 기억해 둬.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네가 산타 역할을 맡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이건 꿀팁인데 그래도 트리나 선물상자 역할을 맡는 편이 더 좋을 거야. 그쪽은 해괴한 목소리를 흉내 내지 않아도 되거든. 큭큭.



2019. 01.01


기욱이에게,

해피뉴이어! 기욱아 우리 열아홉이야. 나이 한 살 더 먹은 거 축하해. 이제 1년 뒤면 우리도 성인이다! 어른이 되면 뭐가 제일 해보고 싶어? 나는 말이야. 운전면허증을 따서 강변 드라이브를 꼭 해보고 싶어. 엄청난 경치를 보면서 운전하면 얼마나 상쾌할지 상상이 가? 아, 생각이 난 김에 내 버킷리스트에 추가해 둬야겠어. 편지 쓰면서 민우한테도 성인이 되면 가장 해보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더니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대. 정말 재미없단 말이야.



2019. 02.28


기욱이에게,

오랜만에 편지 쓰네. 오랜만이라고 너를 잊은 건 절대로 아니야. 사실은 수간호사님께서 나와 민우에게도 학교를 다시 다녀보는 게 어떠냐고 물어봤어. 민우는 바로 괜찮다고 답했지만 나는 사실 조금 고민됐어. 그래서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다고 했어. 그리고 지금은 마음을 정한 날이야. 너한테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방금 정한 따끈따끈한 선택이야. 나 학교로 돌아가려고. 아윤이랑 재혁이의 초등학교 옆에 붙어있는 고등학교 전학 갈 예정이야. 이곳은 아주 작은 마을에 있는 작은 학교라서 학생 수도 적고 교원 수도 적어. 수간호사님이랑 친한 분이 그 학교 교장선생님이래. 그래서 문제없이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셨어. 검정고시 준비는 이제 그만둘 거야. 네가 열심히 버티고 있는 것처럼 나도 힘낼게.



2019. 04. 06


기욱이에게,

개학하고 나서 벌써 한 달이 지났네. 적응하느라 꽤나 고생했어. 늦어서 미안. 학교에서 친구들을 많이 사귄 건 아니지만 이제 얘기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고 오랜만에 수업을 들으니 재밌었어. 어젯밤에는 네가 갑자기 많이 아파서 다급하게 달려왔어. 오늘 저녁까지만 여기서 자고 가려고. 의사 선생님께서는 얼마 남지 않은 거 같다고 하셨는데 거짓말이면 좋겠어. 이제 곧 따뜻한 봄이 올 텐데 그때 네가 함께 왔으면 좋겠어. 내일은 주말이니까 우리 호스피스 뒤뜰 정원에 예쁘게 핀 개나리들을 좀 가져오려고. 화병에 꽂아두면 화사해서 예쁠 거 같아.



나는 보고 있던 종이에서 시선을 떼고 화병에 꽂힌 풍성한 개나리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편지에 적힌 날짜를 조용히 읊조렸다. 달력에 나열된 엑스의 행렬 뒤에 아직 비어있는 날짜를 확인했다. 4월 7일.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교복을 입고 손에는 가지각색의 꽃을 한가득 든 여자와 남자였다. 활짝 갠 듯 웃고 있는 표정은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이었다. 여자는 손에 든 꽃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나는 입을 열었다.


-늦어서 미안해.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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