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주인공, 파즈와 시타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아이들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사소한 일에도 까르르 웃고, 껴안고, 넘어지고, 소리친다. <이웃집 토토로>의 사츠키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슬랩스틱에 가까운 명랑함이다. 그들은 가장 속된 의미로 ‘만화적’이다. 지브리 소년소녀를 이루는 특징인 어른의 원형, 때묻지 않은 인간, 조숙한 관찰자의 성격에서 오직 파즈와 시타만 튕겨나간 것은 무슨 까닭일까.
파즈와 시타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암울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파즈는 십대의 나이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탄광에서 일하는 소년공이고, 아버지는 하늘섬의 미신을 전파한 사기꾼으로 몰려 자살했으며, 어머니는 존재조차 희미하다. 시타 역시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의 손에 길러졌으며, 그녀의 비행석과 핏줄로 인해 하늘과 땅 양면의 악당들에게서 노려지고 있다. 두 사람의 명랑함은 우선, 이 르포 드라마를 방불케하는 설정을 무마하기 위한 위장이다. 만약 파즈와 시타가 치히로와 같은 태도로 반응했다면 이 이야기는 활극의 표피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작의 주제는 여러 기성 평론가가 지적했듯, 또 테마곡의 제목이 가리키고 있듯(<Innocence>), 순수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아이들이, 무기화될 위기에 놓인 어른의 세계에 종말을 고하고 자연을 회복하는 이야기. 멸망의 예언을 외울 때 눈을 감은 파즈와 시타는 미래를 되찾고, 원대한 사업을 그리던 무스카는 눈을 잃어버린다. 순수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순수를 되찾기 위해 분투한다는 점에서, 성장이 아닌 퇴행을 그리는 곡선은 깨나 독설적인 아이러니를 말하고 있다.
영화 전체를 휘어감는 역방향 시계축에서, 유일하게 정방향을 가리키는 표지가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캐릭터, 그리고 한 줄의 대사다. 영화의 중반부, 시타의 미모에 홀린 해적들은 그녀에게 꽃을 바치고 허드렛일을 도맡아하며 애정공세를 펼친다. 넋이 나가버린 무리는 시타를 쳐다보며 이렇게 되뇌인다. “저렇게 예쁜 아이가 나중에 엄마처럼 된다니 믿을 수가 없어”.
도라는 과연 이 작품의 유일한 정상인이다. 그녀는 노령에 걸맞게 노련하고, 엄마답게 아이들을 다루며, 해적답게 재물을 밝힌다. 시간을 벗어난 파즈와 시타, 한참 뒤쳐진 해적들(그들은 성인임에도 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사이에서 오직 도라만이 자신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녀는 잔혹하고 속물적이나- 동시에 인간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타가 도라의 품에 안기며 끝나는 결말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시타가 일찍이 떠나왔던 할머니 품으로의 귀환이기도 하고, 또 ‘과도한 명랑함’이라는 거짓 순수를 벗고 한 명의 여린 소녀로 되돌아가는 복각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그녀가 그렇게 된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인간적인 미래, 즉 정방향 시계로의 안착이다.